Title | 열 한번째 칼럼 <인도의 바이닐(Vinyl)> -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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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8-06-27 16:06 | Read | 622 |
본문
인도의 바이닐(Vinyl)1
바이닐은 컴팩트 디스크(CD)의 발명으로 인해 밀려났다. 언제까지고 번영을 구가할 것만 같았던 컴팩트 디스크도 다운로드와 스트리밍 시장의 등장과 더불어 급속히 쇠락했다. 미래의 음악시장이 스트리밍 사이트들에 의해 점거될 것이라는 예측 속에서,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이치를 벗어난 채 바이닐은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인도 또한 마찬가지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인도 내 바이닐 시장의 규모는 급속하게 줄어들었으나, 최근 들어 아날로그 열풍이 불면서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되살아나고 있는 추세다. 이번 칼럼에서는 인도 바이닐의 역사와 특징, 그리고 필자가 직접 디깅(Digging)2 하면서 가장 괜찮았다고 생각한 뉴델리 내의 레코드샵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1899년 런던, 그라모폰(Gramophone) 회사에서 최초로 인도인의 목소리를 녹음했다고 한다. 이후 1902년에 캘커타 지역에서 SP가 제작되면서 인도 음악시장이 개시된다. 하지만 당시 그라모폰과 SP3는 상류층을 위한 전유물에 가까웠다. 기기(器機)와 레코드의 가격 자체도 만만치 않았고, SP에 사용되는 바늘은 레코드를 한 번 재생하면 버려야 되는 소모품이었기에 부대비용이 상당히 발생했다. 따라서 그라모폰은 영국에서 파견된 관리와 공무원, 혹은 인도의 부자들과 왕족들이 취미로, 혹은 재력 과시의 용도로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레코드 회전수 감소․바늘의 내구성 증가가 이뤄지고, 보다 저렴한 기계인 턴테이블(Turntable)이 1948년에 등장함에 따라 대중화가 조금씩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 음악이 본격적으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단연코 1968년 비틀즈의 리시케시 방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으로 ‘오빠부대’와 ‘파파라치’를 이끌고 다닌 비틀즈답게, 장기간 인도에 체류하는 동안 아예 그들을 쫓아다니며 영상을 촬영하는 방송국과 팬들도 존재했다. 이때 인도의 명상․요가와 사이키델릭(Psychedelic)한 음악 등이 서양에 노출되면서 ‘인도=신비함’이라는 밈(Meme)이 만들어졌고, 세계 최초로 팝에 시타르(Sitar)를 기용한 비틀즈의 Norweigan Wood(This Bird Has Flown)가 발표되면서 자연스레 대중의 관심 또한 높아져 인도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우선 인도의 아티스트들이 유럽에 진출하여 현지에 소개되거나 다른 음악가들과 협연했다. 이전 칼럼에서 소개했던 Louis Banks‘ Sangam도 먼저 독일에서 Jazz Yatra Sextett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이후 인도로 돌아온 케이스다. 이후에 추가적으로 생긴 인기에 편승하여, 유럽 레이블들의 바이닐 프레싱 플랜트(Vinyl Pressing Plant)가 인도 현지에 다수 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인 것은 영국 EMI 사의 산하 레이블인 HMV(His Master’s Voice)와 폴리도르 인디아(Polydor India)였다. 이들은 기존 인도의 국산 레이블들이 발리우드(Bollywood) 등 영화 OST의 바이닐 프레싱에 집중한 반면, 보다 다양한 소비자들의 음악적 욕구에 부합하고자 여러 인도 음악가들의 작품 혹은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의 라이센스판을 적잖이 생산했다. 하지만 1982년, 기존 바이닐에 비해 훨씬 더 저렴하고 저장능력도 탁월한 컴팩트 디스크가 상업적으로 생산4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바이닐 시장이 침체되었고, 이 시기에 인도 현지에 존재하던 공장들이 전부 문을 닫게 된다.
1)한국에선 흔히 LP(Long-Play Record)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이는 보통 12인치 판만을 지칭하는 용어이므로 모든 레코드를 포함하는 용어인 바이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2)레코드샵 혹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바이닐 레코드들을 뒤져보고 찾아내는 행위의 총칭. 산더미 같은 레코드 더미에서 가치 있는 바이닐을 ‘파내고 찾아낸다’라는 의미에서 어원이 유래됨.
3)턴테이블 이전, 그라모폰이 존재하던 시절의 레코드를 지칭함. 33 혹은 45RPM을 유지하는 최근의 바이닐과는 다르게, 녹음 기술의 한계로 인해 SP는 78RPM으로 제작되었음.
1) 영화와의 공생

인도의 음악시장은 타 국가와 다른 형태로 발전해왔다. 인도인들에게 가장 큰 유희거리는 단연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산스크리트 드라마의 전형적인 플롯을 따르는 영화부터 외화(外畫)의 번안(飜案)까지 인도인들은 다양한 영화들을 사랑하고 즐긴다. 그리고 영화에 반드시 들어가는 가무(歌舞)- 인도 전역에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형․군소 제작사들이 영화를 촬영하고, 그 영화에 들어간 OST는 컴팩트 디스크와 7․12인치 바이닐로 제작된다. 이렇듯 영화가 흥행하면 그 영화에 수록된 음악까지 히트를 치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한 많은 교류와 다양한 음악 장르가 발전한 최근까지도, 인도 내 음악시장에서 영화 관련 장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하물며 인터넷과 대중매체가 발명․발달되지 않았던 근대 시절, 영화의 영향력은 더욱 지대했다. 때문에 오늘날 찾아볼 수 있는 인도 바이닐 중 대부분은 영화 OST다.
2) 인도에서 구하기 힘든 인도의 바이닐
모순이지만 소제목 그대로다. 인도의 바이닐들은 역으로 인도 자국에서 구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필자가 한국에서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레코드샵의 사장님도 인도의 바이닐들은 인도가 아닌,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구해온다고 말한 바 있다. 이유는 두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첫째, 바이닐 자체가 외국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60년대 중반, 뭄바이에서 결성되어 활동했던 인도의 사이키델릭․가라지(Garage) 락 밴드 The Savages를 예로 들겠다. The Savages의 정규반은 단 두 장, <Live>와 <Black Scorpio>다. 각각 69년과 73년에 발매된 이 바이닐들은 발매 당시 인도 내에서 그다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여전히 주류였던 힌두스타니(Hindustani) 음악5 이 아닌, 서양의 악기와 음악기법을 채용한 락 음악을 한 탓이다. 하지만 일부 DJ들과 음악 애호가들이 디깅 도중 이들의 가치를 재조명하면서, 수많은 판들이 외국으로 유출되었으며 가격 또한 본래의 수백 배로 상승했다. 세계 최대의 음반 거래 사이트인 디스콕스(Discogs)만 봐도, 인도에서 프레싱된 바이닐들은 독일․프랑스․미국 등 엉뚱한 국가의 판매자가 판매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80년대부터 인도 내 바이닐에 대한 인기가 감소했기에 이런 현상은 더 심화되었다.
둘째, 바이닐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거나 아예 소실(消失)된 경우가 많다. 바이닐은 보관 환경에 매우 예민한 물건이다. 레코드는 열기와 냉기에 노출될시 레코드 자체가 깨지거나 휘는 경우가 생기며, 레코드를 감싼 슬리브(Sleeve)의 경우 종이 재질이기 때문에 습기․벌레 등에 매우 취약하다. 인도의 자연환경은 바이닐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계절에 따라 고온다습(高溫多濕)과 저온건조(低溫乾燥)를 마구잡이로 넘나드는 날씨와, 지처에 들끓는 벌레들. 게다가 인도인 수집가 중 이와 같은 보관환경의 중요성을 인지한 이가 몇 없었기에 민트(Mint)6 혹은 엑셀런트(Excellent)7 상태의 바이닐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인도인 중 약 35,000여 장의 바이닐 컬렉션을 선보인 마드라스(Madras) 지방의 수집가 랑가라오(V.A.K Rangarao)는 여러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며 바이닐들을 선보였는데, 슬리브의 군데군데에 구멍이 나고 찢어져 있거나 아예 슬리브도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보유한 바이닐의 절반 가량을 거리의 노점이나 고물상 등에서 건져냈다고 한다. 야외에서 극한의 환경에 노출되었으니, 그 바이닐들의 상태가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7)바이닐의 등급을 지칭하는 공식용어. 민트보다는 약간 떨어지나, 디스크에 1~2줄의 헤어라인(Hairline) 스크래치, 슬리브에는 코너 벤트(Corner Bent)가 조금 생긴 정도의 바이닐에 붙이는 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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