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조현우

델리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교류학생으로 파견된 조현우라고 합니다.

객관적인 주제들 - 정치, 시사, 문화, 유명장소 등 - 을 다루지만, 독자 분들과 보다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주관적인 형식을 다소 띄게 될 예정입니다.

교감하고 공감될 수 있는 칼럼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Title 열 번째 칼럼 <인도 미술의 아버지, 라자 라비 바르마>
Writer 로컬리티센터 Date 18-06-20 10:13 Read 919

본문

인도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경제정치 등 언론을 통해 자주 접하는 분야는 어느 정도 알지만, 예술문화 등의 분야는 무지하다시피 하다. 우리는 인도의 잠재력에 주목할 뿐, 유구히 이어진 인도 자체에 대해선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게 현실이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에 관심이 있기에 라비 샹카르(R.Shankar)를 필두로 한 샹카르 패밀리등을 제외하면, 나머지 예술 분야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델리대학교 측의 특강을 통해 인도 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라자 라비 바르마(R.R.Varma, 이하 바르마)에 대해 알게 되었다. 따라 이번 칼럼에선 특강 때 배운 사실들을 기반으로 하여, 바르마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와 업적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1. 전반적 소개

 

바르마는 1848, 현재의 케랄라(Kerala) 지방에서 귀족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200년이 넘도록 트라방코르(Travancore) 왕족 여식들의 배우자를 배출해오며 부를 쌓았는데, 그로 인한 부유함 때문에 가문의 구성원 중 적잖은 이가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았다. 따라서 바르마의 생가는 온갖 예술품들이 가득했고,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여러 예술작품들을 마주하며 살 수 있었다.

그의 천재성을 시사하는 일화가 있다. 바르마의 삼촌 중 화가가 있었는데, 그 삼촌은 이따금씩 미완성된 작품을 아틀리에에 놔둔 채 작품구상 등을 이유로 몇 달씩 유랑하곤 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아틀리에의 문을 연 바르마의 삼촌은 깜짝 놀랐다. 분명히 미완성 상태였던 그림들이 모두 완벽하게 완성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린 바르마의 솜씨임을 알자 조카를 예술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진실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바르마가 예술적인 부분에서 천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기존의 인도 화가들과는 다르게, 그는 서양의 서적과 작품을 통해 동서양의 특색이 뒤섞인 자신만의 화풍을 개발한다. 이후 25살의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종래엔 인도 전역뿐만 아니라 미국영국 등 당대 서구 열강들에게도 그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1873, 비엔나의 전시회에 전시한 작품으로 상을 수상했고, 1893년에는 시카고에서 열린 콜럼버스 400주년 기념 전시회에 참여해서 두 개의 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바르마의 작품 성향에 대해 간략하게 논해보자면, 그는 서양의 극사실주의 기법을 바탕으로 인도적인 색채를 표현하는데 집중했다.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외형의 정밀한 묘사를 중요시했던 서양과는 다르게, 인도는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개체의 속성과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예술작품들의 주제 중 다수가 신이었고, 종교인들은 예술작품을 통해 신의 영적 부분인 다르샨(Darshan)직접 보길원했던 탓이다. 따라서 바르마는 외형 묘사·색채 등은 서양의 것을 따르되, 소품 배치와 인물의 표정·시선·의복 등을 통해 작품의 속성을 드러냈다. 그는 인물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는데, 여러 왕족과 영국인 인사들뿐만 아니라, 당시로써는 드물게 카스트의 고하(高下)를 막론한 여성 모델들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상기된 성향을 통해 카스트 차이를 매우 잘 드러내는 것으로도 유명세를 떨친 바 있다.

 

 

ae39023eeaba5cf17ba1e8d90e1e2a6a_1529457ae39023eeaba5cf17ba1e8d90e1e2a6a_1529457

 

순서대로 <사색>, <마하라슈트라의 여인>. 

의복·장신구·소품 등을 통한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다.

 

2. 바르마의 업적과 그 의의

 

(1) 인도인의 정체성을 굳건하게 한 작품세계

 

바르마가 활동하던 시기는 영국의 지배하에 놓여있던 인도인들이 독립운동을 벌이던 시기와 일치한다. 당시 영국 통치자들은 제국주의(Imperialism)의 속성에 따라 자신들을 일종의 계몽주의자들로 승격시켰다. 즉 식민지배를 당하는 것은 천박하고 미개한 그네들이 도태된 결과이며, 우리들은 식민지배를 통해 하찮기 그지없는 너희들을 일깨우리라- 라는 식의 자기합리화였다. 따라서 신문·예술품 등 어디에서나 인도인들은 그저 영국인들을 떠받치기 위해 태어난 노예쯤으로밖에 표현되지 않았다.

독립 운동가들은 이러한 작태(作態)에서 탈피하여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으며, 독보적인 수준의 문명과 화려함을 향유했던 고대 인도와 자신들을 결부시키고자 했다. 인도와 인도인을 깎아내리지 않고,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작품에 재현하는 바르마의 활동은 자연스레 독립운동과 결부될 수밖에 없었으며, 많은 인도인들이 바르마의 그림을 통해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을 기억하고 악의적인 세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 신을 정형화하고, 신전 밖으로 나오게 하다

 

바르마 이전까지 인도의 예술품에서 신들은 하나같이 초자연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왔다. 다르샨을 드러내고, 여러 뿌라나(Purana)에서 언급된 그대로를 표현하고자 한 탓이다. 하지만 바르마가 (1)번 문단의 활동을 지속함에 따라 인도국민회의(INC)의 요인 마다바 라오(T.M.Rao)에 의해 국가적 영웅으로 부상하면서, 그는 신적인 존재들을 그리기 시작했고 신의 다르샨을 표현하되 그 얼굴과 형체는 인간의 것처럼 묘사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 시바는 푸른색 피부를 가진 남성 등 은 이때에 기인하며, 이후 특정 신을 표현하는데 정해진 묘사와 기법들을 사용하는 게 암묵적으로 퍼진다.

또한 그는 수드라달리트들을 위한 전시회를 기획하여 열기도 했다. 당시 신을 표현한 예술작품들은 전부 신전에 있었는데, 하층민들은 신전 출입이 금지되었고 따라서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 어떤 모습을 가졌는지도 모르는 신을 믿고 있는 상태였다. 이를 모순되었다고 여긴 바르마는 하층민들도 자신들의 신을 접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전시회를 준비하는 도중 브라만들과 충돌이 있어도 멈추지 않았다. 바르마와 한 브라만이 벌인 논쟁의 일부를 보자.

 

누가 감히 너로 하여금 신에게 인간의 탈을 덧씌울 자격을 주었는가?”

신께서 사사하셨지.”

 

그렇게 적잖은 반대와 방해공작을 무릅쓰고 연 전시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생애 처음으로 신을 본 탓에, 바르마의 예술작품을 향해 기도와 절을 했다고 하니 그 전시회의 가치와 의의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층민들이 신을 마주하고 나서부터, 그들 또한 신을 적극적으로 모시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인 열망에 따라 바르마는 마다바 라오와 함께 하나의 사업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석판화(Lithography)를 통해 종교적 작품을 대량생산하고자 한 것인데, 바르마의 석판화 공장은 봄베이(오늘날의 콜카타) 지역에 자리를 잡고 생산 활동을 시작했다.

파급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리스 정교의 아이콘(Icon)처럼, 신도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저렴한 가격에 자신이 믿음을 보내는 신의 형상을 지척에 모셔놓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집안에서 뿌자(Puja)를 드리는 일이 흔해지게 된 시기도 이때부터다. 그러나 사업적인 부분에서, 바르마의 석판화 공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로써는 저작권의 개념이 전무하던 시절이었고, 초본이 팔린 직후 수많은 곳에서 복제품을 양산하여 정작 공장제 작품들은 전혀 팔리지 않았던 탓이다. 비록 사업적으로는 실패했으나, 바르마의 이러한 작품과 행위는 인도인의 종교 활동에 엄청난 변화를 줬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의를 가진다.

 

3. 마치며

 

라자 라비 바르마는 오늘날에도 예술과 관련된 주제에서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다. 인도인에게 있어 그는 대중적인 화가이며, ‘인도의 미술을 대표하는 자존심 중 하나인 셈이다. 분야는 다르지만 한국으로 빗댄다면 세종대왕과 같은 상징성을 지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인도에 대해 공부하고 탐색할 때, 서문에서 언급한 경제와 정치 등 실용적이라고 여겨지는 분야에 집중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예술과 음악 등을 어느 정도 알아두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도에 있으며 인도인들과 만날 때, 그들은 외국인인 필자가 힌디어를 말하고 인도 음악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굉장한 호감을 표현했다. 언어와 문화에 대한 관심은, 곧 그들에 대한 관심과도 직결하기 때문일 것이다. 차후 인도에서 활동할 생각이 있는 이라면, 이런 지식 몇 토막은 실용적이지 않을까.

 

사진출처:

https://www.wikiart.org/en/raja-ravi-varma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외대로 81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교양관 213-1호
031-330-4593~4 / localitycenter@hufs.ac.kr
Copyright (c) 2024 한국외국어대학교 로컬리티 사업단.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