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조현우

델리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교류학생으로 파견된 조현우라고 합니다.

객관적인 주제들 - 정치, 시사, 문화, 유명장소 등 - 을 다루지만, 독자 분들과 보다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주관적인 형식을 다소 띄게 될 예정입니다.

교감하고 공감될 수 있는 칼럼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Title 아홉 번째 칼럼 <힌두스타니(Hindustani)에 대하여>
Writer 로컬리티센터 Date 18-05-23 10:41 Read 1,027

본문

 

필자가 인도학과를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은 항상 이런 질문을 한다. ‘인도어도 배워요?’ 그럴 때마다 예예, 하면서 힌디어 한두 마디를 쓰고 말하긴 하는데··· 이런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인도어라는 건 없다고.

하나의 국가에 여러 개의 언어가 존재하는 건 흔한 일이다. 중국엔 공용어인 보통화(普通話)를 비롯한 수십 개의 언어가 산재해 있고, 캐나다의 퀘벡(Quebec) 등지는 프랑스어를 모어(母語)로 삼는 이들이 대다수이며 심지어 영토가 작은 스위스의 경우에도 래토-로만어(Räto-romanische)라는 사멸(死滅) 위기의 언어가 버젓이 존재한다. 인도 또한 22개의 공식 언어를 가진, 앞에서 언급된 사례 중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델리대학교에서 수학하는 도중, 한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힌두스타니라는 인도 언어의 존재를 알게 됐고, 관심을 가졌다. 이번 칼럼에서는 힌두스타니의 개념과 역사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뤄볼 예정이다.

 

1. 힌두스타니의 간략한 정의

 

힌두스타니란 과거 북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에서 사용되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의 일종이다. 힌두스타니의 탄생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암리트 라이(A.Rai)와 같은 저명한 언어학자들은 무갈 제국의 개국을 본격적인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당시 북인도에서 가장 많이 쓰이던 언어는 힌디(Hindi), 그 중에서 카리볼리(Khariboli)였다. 반면 술탄을 위시한 현 파키스탄 인근의 이슬람 세력은 우르두(Urdu)를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점령 이후 지배층-피지배층 간의 의사소통에 장애가 생겼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힌두스타니가 자연스레 발전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힌두스타니의 원시적인 개념은 존재했다. 인도의 목소리라고도 불리는 시인이자 음악가 아미르 쿠스로(A.Khusrow)는 인도의 토착민을 힌디스(Hindis)라고 지칭하며 그 안에 힌두교도와 무슬림들을 포함시켰고, 그가 활동하던 13~14세기엔 힌디라는 용어가 힌디스의 사용언어를 지칭했기 때문에, 현재의 펀자브어(Punjabi)벵갈어(Bengali)신디어(Sindhis) 등이 모두 힌디로 명명되었다. 때문에 무갈 제국의 치하 당시 나는 힌디어를 구사한다’, 혹은 나는 우르두어를 구사한다는 개념이 매우 희박했고, 그 시절의 인도인들에게 언어란 그저 일상에서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무렵, 인도 전역을 식민지로 두던 영국의 공작으로 인해 힌두스타니라는 하나의 개념은 여러 갈래로 찢어지고 만다. 때문에 현재에 와서 힌두스타니란 그저 과거의 유물로 전락해버렸다.

 

2. 힌두스타니의 분리

 

180054, 콜카타에 포트 윌리엄 대학(Fort William College)라는 교육기관이 설립된다. 인도에 장기간 머무르며 일하게 될 영국인 공무원들의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지의 언어를 가르친다는 목표 하에 세워진 대학이었다. 그러나 이 기관에서 영국의 효율적인 인도 지배를 위해 언어의 분할이라는 계획을 수립하는 학자가 있었다. 인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베트 누아르(Bête noire: 증오의 대상)라고 불리는 존 길크리스트(J.B.Gilchrist)가 그의 이름이다.

길크리스트는 인도학자(Indologist)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당시의 인도학이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오리엔탈리즘을 부각시켜 식민지의 존재를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러디어드 키플링(R.Kipling)처럼 그의 언어학적 연구도 유사한 용도로 사용됐다. 한반도를 식민지화했던 일본과 동일하게, 언어가 뒤틀려야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들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가장 효과가 탁월했던 길크리스트의 공작은 다시금 힌디어와 우르두어를 분할시킨 것이었다. 먼저, 그는 힌두스타니를 크게 세 가지- 단어 부분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만 고수하는 하이-페르시안(High-Persian) 스타일, 아랍페르시아어와 산스크리트프라크리트(Prakrit)를 섞은 힌두스타니 그리고 천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천박한 힌두위(Hinduwee)로 나눴다. 거기에 더불어 우르두어와 힌디어를 각각 HindoostaneeBhakha라는 이름으로 명명한 뒤, 언어에 우열을 매겼다. 물론 당시 지배계층의 언어였던 우르두어가 우월하다는 인식을 퍼뜨렸다. 최대 세력이었던 힌두와 이슬람 간의 분열을 야기하기 위함이었는데, 서구 열강들의 침탈로 인해 휘청거리던 무갈 제국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의 형세에 몰리며 붕괴가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힌두스타니가 사라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였다. 언어적인 부분에서 큰 문제가 없었을 뿐, 인도 아대륙에서 종교분쟁은 수백 년을 넘게 이어져왔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독립할 인도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파키스탄이라는 존재를 자극했다. 사실 파키스탄 건국 계획은 이미 1906년 창설된 전인도무슬림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의 수장 무하마드 알리 진나(M.A.Junnah)가 휘하 지지자들과 함께 1936년부터 설계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를 은밀하게 부추겼을 뿐이다. 분리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은 각각 공식어를 힌디어와 우르두어로 지정하며 모든 공공기관과 교육기관에서 적국의 언어를 금지시켰다. 아마 당시 경계선 지역에서는 마지막 수업과 유사한 장면들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각국 정부의 민족주의 고양(高揚)을 위한 언어 정책과 뿌리 깊게 내려온 종교적 반목으로 인해 기백(幾百)의 세월동안 이어져 오던 힌두스타니는 소수의 언어학자들이나 아는 구시대의 개념으로 전락해 버렸다.

 

3. 마치며

 

우르두어의 권위자 기얀 찬드(G.Chand)인도 헌법에서 우르두와 힌디를 상이한 두 개의 언어로 열거한 것은, 언어학적인 사실이 아닌 정치적인 편의가 이유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힌두스타니는 정치적인 분쟁으로 소멸된 언어의 대표적인 사례다. 언어 구사자의 감소에 따른 자연스러운 사멸이 아닌, 이와 같은 인력(人力)에 의한 강제적인 파괴는 자못 씁쓸함을 자아낸다. 물질의 영역에서 벗어난 개념인 언어조차 인간의 이해관계와 투쟁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 생생히 다가오는 탓이다. 비록 잊혀져가는 이름이지만, 흔하지 않고 흥미로운 주제이기에 칼럼의 주제로 다루고 소개했다.

 

참고자료 출처:

Cultural Diversity Linguistic Plurality & Literary Traditions in India(S.P.Kumar, Oxford, 2015)

Urdu Hindi ya Hindustani(G.Chand, Hindustani Zaban, 1974)

Linguistic Survey of India, Part 1(G.Grierson, Delhi LSI, 1968)

Genealogies of Orientalism : History, Theory, Politics(E.Burke and D.Prochaska, Univ. of Nebraska Press, 2008)

http://mhrd.gov.in/sites/upload_files/mhrd/files/upload_document/languagebr.pdf

http://shodhganga.inflibnet.ac.in/bitstream/10603/17636/11/11_chapter%203.pdf

https://ipfs.io/ipfs/QmXoypizjW3WknFiJnKLwHCnL72vedxjQkDDP1mXWo6uco/wiki/John_Gilchrist_(linguist).html

 

 

오늘의 추천: Louis Banks’ Sangam City Bank

 

Louis Banks는 인도의 유명한 영화 OST 작곡가이자 프로듀서, 재즈 피아니스트와 키보디스트입니다. 21세기에 들어 영화 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지만, 최근까지도 그는 인도에는 재즈 장르를 위한 자리가 없다라는 등의 발언을 하며 인도에서 재즈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1980년대 그를 필두로 한 Jazz Yatra Sextett의 유일한 앨범 <Sangam>은 유럽에 인도 음악과 재즈의 퓨전이라는 생소한 장르를 최초로 소개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도에 돌아온 이후, 친근감을 주기 위해 이들은 그룹명을 Louis Banks’ Sangam으로 바꾼 뒤 <City Bank>를 내게 되죠.

앨범은 총 다섯 곡으로 구성되어있고, 총 러닝타임은 고작해야 30분을 웃도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여러분들은 서양의 악기와 인도의 전통 악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발리우드 음악과는 전혀 다른 진한 재즈를 느끼게 되실 겁니다. 제가 인도에서 입수한 바이닐들 중에서도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앨범명과 동일한 City LifeDawn이라는 두 트랙을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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