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여덟 번째 칼럼 <브라질 역사 도시, 오우루 쁘레뚜 (A Cidade de história, Ouro Pret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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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8-05-21 13:02 | Read | 7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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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로벌K-Network 브라질-중남미 리포터 김찬희입니다. 이번 칼럼은 미나스 제라이스 시리즈의 두 번째 칼럼으로, 브라질의 역사 도시, Ouro Preto에 대한 소개를 준비해봤습니다. `Ouro Preto’는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와 같이 브라질의 옛날 건축물들을 만나 볼 수 있는 도시입니다. 이 곳에는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지어진 옛날 성당과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오우루 쁘레뚜의 생생한 여행기를 만나보기 이전에, 그럼 아름다운 시골 마을, 오우루 쁘레뚜로 역사 여행을 떠나볼까요?
1. 오우루 쁘레뚜란A Cidade de Ouro Preto?
Figure 1Ouro Preto 의 위치
오우루 쁘레뚜는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뛰어난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1980년에는 ‘역사 도시, 오우루 쁘레뚜(Cidade Histórica de Ouro Preto)’라는 이름 아래,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 유산이 되었습니다.
현재 이 도시의 경제는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예전부터 지금까지 광산과 금속 산업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금을 포함한 적철광, 백운석, 황옥(토파즈) 등등 다양한 광물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관광 도시인 이 곳에서는 성당 같은 역사 유적 이외에도 폭포를 둘러싼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많이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또한 오우루 쁘레뚜는 브라질 문화 활동의 상징적인 도시라고 합니다. 매년 두 차례의 ‘O Festival de Inverno de Ouro Preto e Mariana(오우루 쁘레뚜와 마리아나의 겨울 축제)’를 벌이는데요. 7월에는 ‘Fórum Arts(예술 포럼)’, 11월에는 ‘Fórum de Literatura(문학 포럼)’이 열린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일년 내내 브라질의 주요 문화 행사들이 이 도시에서 많이 열린다고 하니,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오우루 쁘레뚜 이름의 기원A origem do nome de Ouro Preto
그렇다면 이 도시는 왜 `Ouro Preto(검은 금)’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요? 이 이름은 1823년5월20일, 예전에는 ‘Vila Rica’라고 불리던 동네가 도시로 승급되면서 채택되었습니다. Ouro Preto는 ‘Ouro(금)’+`Preto(검은)’ 두 단어가 합쳐져 검은 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검은 금이 풍부하게 나는 도시’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브라질의 주요 수출품의 하나였던 금이 이 곳 오우루 쁘레뚜에서 많이 발견되었고, 이 도시 지질층 중 철 산화물 층의 검은 흙이 잔뜩 묻은 모습을 하고 있어, 검은 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금이라는 단어 때문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포르투갈 식민지로서의 옛 브라질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브라질(o Brasil)’이라는 나라 이름 또한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브라질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나무, ‘Pau-Brasil (브라질 나무) [빠우 브라지우]’에서 유래되었답니다.
3. 브라질 ‘금의 순환기’ Ciclo de ouro
오우루 쁘레뚜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브라질의Ciclo de ouro 시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 칼럼에서부터 ‘금’이라는 단어가 참 많이 등장했죠? 그만큼 금은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브라질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 중 하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금이 유럽으로 넘어 갔는지, 브라질 사람들이 포르투갈, 유럽에 있는 금들은 다 브라질에서 간 금이라고 진심이 담긴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금의 순환기 시대 이전에 브라질의 제1 수출품은 바로 ‘설탕’이었습니다. 하지만 17세기 말, 북동부의 제당소에서 생산되던 브라질 설탕 수출량이 점점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같은 시기에 네덜란드가 중미의 섬나라들에서 설탕 생산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브라질의 설탕보다 더 좋은 품질의 설탕을 더 낮은 가격을 받고 팔았으며, 유럽의 상인들은 그들의 우선 순위를 네덜란드의 설탕에 두게 되었습니다.
브라질 설탕 시장의 위기로 인해, 포르투갈은 새롭게 부를 창출할 방법을 찾았고, 그 결과 브라질 국민들에게 수많은 세금을 부과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브라질의 반데이란치스(Bandeirantes, 개척자들)들이 미나스 제라이스, 고이아스(Goiás) 그리고 마토 그로수(Mato Grosso)에서 금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를 새로운 부의 원천으로서 이용하게 됩니다.
브라질 금의 발견은 금 순환기의 절정이었던18세기 내내 금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키웠습니다. 따라서 포르투갈인과 모든 지역의 브라질인들은 빠른 부의 증식을 위해 금이 있는 지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하지만 금광 채굴은 아프리카 노예를 중심으로 한 노동력, 장비 그리고 토지에 대한 높은 투자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시골의 거대한 토지 소유자들 혹은 거상들만이 금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됐다시피, 포르투갈 왕실은 세금 부과를 통해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식민지에서 금을 발견한 사람은 그 가격의5분의1을 세금으로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이 세금은 금을 녹여 왕실 문양이 찍힌 ‘골드바’로 만드는 포르투갈 정부 기관 Casas de Fundição에 지불되었습니다. 이는 포르투갈 왕실에 의해 강제되는 법적인 절차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감옥에 가거나 귀양 보내질 수도 있음에도 자신들의 수익을 감추었다고 합니다.
그5분의1짜리 세금 이외에도, 포르투갈은 금이 나는 각각의 지역에 일년에 대략1000kg의 금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 세금이 거둬지지 않을 때면, 군인들이 해당 지역에 쳐들어와 칼부림을 하며 그 금액만큼의 물건들을 가져가버렸다고 합니다.
북동부 지역이 경제 위기에 들어서기 시작하는 동안 금 채광으로 인해 브라질의 남동부 지역이 많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포르투갈 왕실은 식민지 브라질의 수도를 살바도르(Salvador)에서 히우 지 자네이루로 옮기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금이 나는 지역들에서 다양한 도시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새로운 직업과 극장, 학교, 성당, 공공 기관등의 다양한 상업적, 사회적 활동들도 나타나게 됩니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이 발전한 도시들은 대표적으로 Vila Rica (현재의 오우루 쁘레뚜), Mariana, Tiradentes, São João Del Rei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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