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허유중

안녕하세요~ Global-K 4기 리포터 중앙아시아학과 허유중입니다. 저번 3기 리포터에 이어서 이번 4기 리포터로 여러분을 찾아뵙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6개월 동안 카자흐스탄 교환학생으로 알마티에 머무를 예정인데요.

 

3기 때 보여드리지 못했던 다양한 주제들을 이번 4기 활동을 통해 여러분에게 선보이려 합니다. 

 

광활한 영토와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카자흐스탄.이제 다시 한 번 길을 열어보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Title 열세 번째 칼럼 (2)
Writer 로컬리티센터 Date 18-01-02 11:15 Read 1,042

본문

 

(1편에 계속)



사원 주변에는 다른 묘지도 몇몇 보였다. 하지만 난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정말 문외한에 가까웠기 때문에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고 싶었다. 특별히 보고 싶었던 것은 오트라르의 고대 요새 터였다. 그런데 문제는 위치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택시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구글지도를 켰지만 데이터가 통하는 지역이 아니어서 없는 것만 못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길가는 마을사람들에게 길을 묻고 또 물어서 근처에 가니 성터로 보이는 요새의 문이 멀리에 보였다. 차에 탑승한 3명 모두 주차장이 있는 입구가 어딘지 몰라서 차로 그냥 무작정 비포장 도로로 달려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오트라르라는 과거 중앙아시아 고대 도시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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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트라르 고대 성터의 입구>

 

도시는 고대에 건설되기 시작해서 중세에 번영의 절정을 이루었다. 왜냐하면 사마르칸트, 부하라와 마찬가지로 실크로드 상에서 주요 거점 중 하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도를 보면 험난한 파미르고원을 지나 중동과 유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바로 서쪽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지만 우즈벡 지역을 거쳐 가는 전통적인 노선도 있었다. 그 주요 관문이자 휴게소(캬라반 싸라이) 중에 첫 번째가 바로 이 오트라르라는 도시였다.

 

이 도시에는 궁전과 카라반 싸라이(무역상들을 위한 휴게소) 등이 있었으며 요새는 물론 각종 무역이 이루어지는 거점 도시 특유의 기반 시설들이 모두 존재했었다고 한다. 또한 내가 다니는 알-파라비 카자흐스탄 국립대학교의 알-파라비가 출생한 곳도 바로 이 오트라르라고 하니 이슬람-투르크 권에서는 유명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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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라르 유적지의 모습>

 

 

중세까지 번성한 도시가 몰락하게 된 계기는 세월의 흐름이라는 단순한 흥망성쇄의 고리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계기는 오트라르 공방전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번성하던 오트라르라는 도시는 호라즘 왕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동방에서 서방-유럽으로 가기 위해선 주로 이 도시를 첫 관문으로 지나야 했다. 1216년 몽골이 금나라를 빈사에 가까운 상태까지 몰아넣은 뒤 서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징기스칸은 아직 호라즘을 침공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정보 수집만 무역상들을 통해 하고 있었고, 아직 남송과 금나라의 잔재가 남아있어서 정리가 덜 끝난 상태에서 호라즘을 무리해서 침공하면 뒤가 위험했기 때문이다.

 

원교근공’- 먼 나라와는 교류를 하며 친하게 지내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 는 다소 클리셰지만 정석 중에 정석의 외교-군사전략을 짠 몽골은 호라즘에게 경제 사절단을 보내 무역 교류를 제안한다. 호라즘의 샤() 모하메드 2세는 이를 수용하고 돌려보내는데, 사절단이 돌아가는 길에 머물렀던 오트라르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 곳의 성주이자 영주가 몽골상인들을 스파이로 몰아서 전부 살해하고 물품들을 압수해버린 것이었다. 징기스칸은 크게 분노하였고 다시 사절단을 보내 책임자 처벌과 사과를 요구하는데 호라즘의 왕은 영주가 자신의 외가 친족이며 군사력 또한 몽골이 자신의 왕국을 넘볼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고 되려 사절단 일부를 처형시키고 일부는 수염을 모두 뽑아서 되돌려 보내게 된다. 이야기만 들어보면 행간속에 무언가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없어서 아쉬웠다.

 

말도 안되는 상상력을 더해보면, 어쩌면 1차 사절단의 죽음이 몽골의 자작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면 처형당할 만한 짓을 했다던가 말이다. 이어서 든 생각은, 몽골이 통합되기 이전인 과거에 우연인 것처럼 딱 맞아떨어졌던 적이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징기스칸의 라이벌 챠무화의 친척이 말 도둑질(말 도둑질은 몽골에서 상당히 중한 범죄)을 하다 징기스칸의 부하에게 살해당한다. 챠무화는 이를 빌미로 징기스칸을 공격하게 된다. 이 같은 일종의 몽골식(?) 명분 만들기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글을 쓰며 더 생각해보니 고려의 대몽항쟁도 시작된 계기가 고려와 몽골 국경지대에서 몽골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빌미로 침공을 한 전적을 봤을 때, 의심쩍긴 하다. 뭔가 타이밍이 묘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고 진실은 모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정복을 원하는 한쪽이나 양쪽이 존재한다면 이런 명분과 빌미를 만드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지니, 무릇 몽골만의 명분 만드는 방법만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신중하게 혹은 과감하게 대응해야 함은 물론이겠다.

 

1219년 징기스칸이 주변 정세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출병했고, 이는 호라즘 왕국의 멸망의 시작이자 동유럽으로까지 밀고가는 진격의 시작이었다. 징기스칸과 그의 아들들이 참전했고, 호라즘 왕국 역시 왕자들이 지원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중국 대륙에서의 숱한 공성전을 겪은 몽골군이었기에 5개월에 걸친 양측 군대의 공방전은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부하라에 있던 징기스칸은 체포되어 끌려온 오트라르의 영주를 잡아 능지처참 이상으로 처형했다고 한다. 또한 지어진 건물들은 말 그대로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고 도시의 주민 학살과 범죄가 들끓어서 번성했던 도시는 초토화가 되었다고 한다. 도시가 파괴된 이후에 시간이 흘러 상업도시로써 일부 복구가 되었지만 예전만큼의 영광을 되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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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오트라르의 성터>

 

사진 속의 내가 있는 자리가 현재 발굴작업과 복원작업이 진행중인 그곳이다. 우물 터, 요새, 궁전 터를 비롯하여 각종 기반시설의 터가 남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황량한 터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구름이 많은 흐린 날씨여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런 폐허와 같은 유적지를 보면 아무리 강대하고 부유한들 오만함과 방심 한번에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감이 되는 교훈적인 요소를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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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라르를 떠나 투르키스탄에 돌아와 시내구경과 야싸위 영묘를 보고 쉼켄트를 이동해서 나머지 관람을 하다 왔다. 쉼켄트에서 하루를 호텔에서 자고 나머지 숙박은 모두 기차에서 해결하는 것이 썩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시간을 아껴야 하기도 했고 횡단열차 예비체험도 해볼 겸 계획을 짜야 했다. 하지만 알마티에서 벗어나 다른 도시로 이동해서 둘러보는 것도 한국으로 돌아가기 이전에 좋은 경험이 되었다. 비록 카스피해를 보지 못해서 무척 아쉽지만 미래에 언젠가 한번쯤은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미리 여러분께 공지 드릴 것은 다음 달에 찾아뵙게 될 칼럼이 이번 기수의 마지막 달 칼럼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달에 알마티를 떠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2월 초이다. 그래서 다음 달 칼럼은 중앙아시아와 관련된 칼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 미리 양해드린다. 아마 필자의 생각으로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주제로 소개해보는 칼럼이 나오리라 생각한다. 벌써 4기 리포터 활동도 종료된다고 생각하니 무척 아쉽고 알마티를 떠날 생각을 하니 무척이나 섭섭하다. 도착할 때는 낯설었지만 떠날 때는 어느새 정이 들어버린 것 같다. 떠나기 전날까지 잘 정리하고 시내를 다시한번 거닐어 보는 것으로 교환학생 생활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다음 칼럼도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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