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허유중

안녕하세요~ Global-K 4기 리포터 중앙아시아학과 허유중입니다. 저번 3기 리포터에 이어서 이번 4기 리포터로 여러분을 찾아뵙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6개월 동안 카자흐스탄 교환학생으로 알마티에 머무를 예정인데요.

 

3기 때 보여드리지 못했던 다양한 주제들을 이번 4기 활동을 통해 여러분에게 선보이려 합니다. 

 

광활한 영토와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카자흐스탄.이제 다시 한 번 길을 열어보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Title 네번째 칼럼 (2)
Writer 로컬리티센터 Date 17-09-25 14:01 Read 715

본문

1800년대 중반부터 농사지을 토지를 구하기 위해 서서히 국경을 넘어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해서 정착해 살았던 과거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소폭 증가세를 보이던 이주민들은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일제의 박해와 억압을 피하고 먹고 살기위해, 그리고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와 양성소의 역할로써 이주가 시작되자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소련과 일본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주 계획은 1937 8월에 일본 첩자의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의 침투를 막는다는 구체적인 목적과 함께 재개되었다. 1937 9월에서 10월까지, 구소련 당국은 극동 러시아로부터 소련의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수만 명의 고려인을 이주시켰다. 172,000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스탈린 계획적인 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 극동 국경으로부터 이주되었다. 법적 근거는 구소련 인민 위원회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공동 법령 #1428-326сс, 극동 러시아 국경 한민족 이주에 대한 것이었고("О выселении корей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из пограничных районов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края"),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서명하였다.이러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겐리프 류시코프가 로스토프로부터 전임되었다. 고려인들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고려인위키백과- 고려인의 강제이주에 대한 계획 인용

 

결국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 정책이 시행되었고, 최소 17만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낯선 땅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었다. 이주시키는 방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로 시베리아 횡단 철로를 타고 중앙아시아로 보내는 것이었는데, 일반 화물차에 꽉꽉 채워 넣은 것은 물론, 가축운반차에도 실어서 보냈다고 한다. 한달 남짓한 이동이었을테고 위생과 영양부족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 했다. 기록상으로는 2만명에서 3만명 정도가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사람 목숨은 질기다고 생각하는 나조차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되지 않는다.

 

이 우슈토베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정책을 시행한 소련이 처음으로 이주민들을 내린 곳이다자료를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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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이주민을 태운 열차는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와 크라스토야르크스를 지나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정차한 열차는 우슈토베에서 사람들을 내리게 한다. 내린 사람들은 당시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내리지 않은 살마들은 다시 남하해서 우즈벡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글자 그대로(속된 말로) 떨궈 놓았다.’ 정리하자면, 이 우슈토베는 고려인 이주에 있어서 처음 중앙아시아에 내려진 곳임과 동시에 중앙아시아 각지로 고려인을 흩어지게 하는 일종의 환승역이었던 셈이다.

 

 

 

차를 타고 6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우슈토베는 적막하고 먼지가 날리는 동네였다. 처음 간 곳은 우슈토베 기차역이었다. 과거 구소련 시기에 건설한 철로 중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부분은 현재까지도 유용하게 잘 쓰이고 있다. 기차역 건물은 그때 모습이 아니었을지라도 선로만큼은 그 당시 그대로 지금까지 쓰이고 있었다. 여기 기차역에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내려져서 각기 다른 열차를 탑승하거나 정착을 강요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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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많은 사람들이 올해 고려인 취재를 하러 와서인지 모르겠지만 사진 촬영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우슈토베는 화물 열차 정차역으로도 여객 열차 정차역으로도 쓰이고 있었다. 9월이면 슬슬 공기가 서늘해질 시기인데 햇빛이 뜨거워서 잠시 후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우슈토베에 내려진 조선인들은 두 부류로 다시 나뉘게 된다. 첫 번째 부류는 카자흐스탄 내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열차를 탑승하게 되었고, 두 번째 부류는 여기 우슈토베에 정착을 하게된다. (‘정착당하다.’ 가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우슈토베에 내려진 고려인들이 1년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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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머물렀던 곳이지 사실 토굴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초원지대의 척박한 땅에 나무가 풍부할리도 없고 곡식이 자라는 곳을 찾기도 어려웠을 터이다. 심지어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한 지령이 내려왔는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 고려인들이 여기 도착해서 생활 할 때 현지인들은 거의 접촉도 하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낯선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과 지역 당원들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여길 와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야말로 막막함 그 자체였다. 주변은 평지지만 농사가 가능한 땅도 아니었고, 집을 짓거나 몸을 따뜻하게 할 장작을 구할 만한 나무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하는 암울함과 이런 낯선 땅에서 내렸을 때 무슨 기분이었을까하는 막막함을 느꼈다. 아마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이 당시 고려인들의 느꼈던 감정의 종류였다고 감히 추측해본다. 정도는 그보다 더 심했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나는 돌아갈 집과 나라가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아니었다. 나라도 잃었고, 집과 터전도 잃었다. 내가 느낀 심정은 그들의 심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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