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아홉번째 칼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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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7-05-16 13:16 | Read | 665 |
본문
아홉 번째 칼럼: 지워낼 수 없는 아픔
I. 서론: 인도를 직접 본다는 것
필자는 인도에 네 달째 살고 있다.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인도의 델리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인도 시내를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인도를 느끼려고 노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 인도에 간다고 말을 하면, 우선 위험하지 않겠냐고 많이들 물어본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인들에게는 인도라는 나라가 치안적인 면에서 많이 위험하다고들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선진국인 유럽국가 혹은 미국을 간다고 할 때의 주변의 걱정은 후진국인 인도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 경우보다 확연히 적다. 여행을 갈 나라의 경제적인 지위가 그 걱정의 정도를 결정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유럽을 갔을 때의 거리에서 느끼는 어떤 위압감 혹은 걱정이 인도 거리에서는 배로 느껴졌다.
각 나라간의 경제적 지위 차이에 따른 치안의 정도가 다른 것처럼 한 나라 안에서도 각 지역별 경제 성장 정도에 따라 치안의 정도가 달라진다. 인도에서 비교적 경제가 발달되어 있는 곳은 여러 곳이 있는데, 인도의 수도인 델리가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수도인 델리는 다른 지역에 비해 도시화되어 있고 현대화 되어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델리에는 빈민 지역 또한 굉장히 많다. 놀라웠던 부분인데, 그 이유는 수도는 보통 다른 지역에 비해 가장 도시화 되어있을 터인데 이렇게 빈민 지역이 많다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수도인 서울에도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지역이 있긴 하지만 델리에서 느끼는 비율의 정도는 그 이상이었다. 델리의 경우 그러한 빈민 지역이 다른 나라의 수도들 내의 빈민 지역 비중보다 많게 느껴졌다. 다수의 여행객들은 빈민 지역을 간접적으로 체감할 뿐 고의로 피해 다녀 도시화, 현대화 된 장소들만 다닐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아직 남아 있는 빈민 지역을 둘러봐야 인도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 가야 외국 문물이 많이 섞이지 않은 순수 인도의 문화, 생활 방식, 힌디어 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위험을 감수하고 주변에 가까운 빈민촌들을 혼자 돌아다녔다. 골목들이 너무 좁아 수 많은 인도인들을 매우 가까이서 지나쳐야 했고, 수 많은 남자 인도인들이 필자가 외국인이라서 신기한 탓인지 아니면 나를 해치려는 건지 계속 필자를 쳐다보곤 했다. 또한 굉장히 많은 동물들을 보았다. 소, 개, 염소 등이 무차별적으로 돌아다니고 거리 모든 곳이 그들의 화장실이었다. 그리고 길에서 샤워하는 남성, 빨래하는 사람 등도 굉장히 많이 보였다. 그들은 길에서 노상방뇨도 서슴지 않았다. 거리에 나앉아 있는 거지들도 굉장히 많았는데, 외국인인 필자만 보면 달려들어 돈을 구걸했다. 그리고 사기꾼의 호객행위 역시 끝없이 이어진다. 그들은 처음엔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는 척을 하다 결국엔 자신들의 가게로 인도하려 했다.
이렇게 묘사를 하면 인도는 매우 더럽고, 구걸하고 사기를 치는, 하루하루가 전쟁인 사람들의 삶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 면이 있는가 하면 긍정적인 면도 많이 볼 수 있었다. 물론 경제적인 부족함이 늘 옆에 있지만 상대적으로 그런 부족함이 없는 우리 나라 사람들보다 얼굴에 웃음꽃이 더 많았다는 것을 말이다. 어디를 가도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갇혀 오프라인 소통이 단절된 듯한 모습을 보이고,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연령대 별로 학업, 학점, 스팩, 취업, 가정, 자산관리, 노후 준비 등의 걱정이 얼굴 한 가득 쓰여 있는 것이 한국 거리의 모습이라 한다면, 인도는 그 반대였다. 그들은 서로 힘든 상황을 알아서인지, 항상 모르는 사람, 아는 사람 구분 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부터 시작해서 대화하기를 즐긴다. 인터넷 소통보다 현실 대화가 많이 이루어지는 모습이었다. 또한 그들의 옷 역시 개성이 한 가득하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항상 유행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유행에 뒤쳐지거나 거리가 먼 사람들은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곤 한다. 하지만 인도인 그들은 패션은 자신의 개성이자 가치관을 주장하듯 다양하고 독특한 옷차림들을 선보인다. 모두 다른 옷들을 입고 있어서인지 각자의 개성에 대한 존중이 알게 모르게 느껴졌다.
인도 빈민 거리를 걸으면서 느꼈던 점들이다. 필자는 집에 돌아와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인도는 과연 어떤 과거를 지나왔는지에 대해 말이다. 조사를 해보니 인도는 매우 큰 아픔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도가 식민지대로서 살아온 기간이다. 많은 개발 도상국들과 최근에 선진국이 된 나라들은 과거 식민지 시대 때 근대화를 경험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역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일본의 강압적이고 무차별적인 지휘아래 많은 경제적인 성장 및 근대화를 경험하였다. 인도 역시 식민지시대를 통해 어떤 발전을 했는지, 어떻게 발전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희생과 아픔을 겪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졌다.
II. 본론: 아픔으로 일궈낸 경제 성장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압 정치 아래 수 많은 인명적 피해가 많았음은 우리 나라 국민이라면 모두 잘 아는 사실이며, 아직도 그 얘기들 들으면 가슴이 아프고 치가 떨려 목이 메일 정도이다. 그런대 인도 역시 영국의 식민 정치 아래 수 많은 인명적 희생이 있었다고 한다. 영국에 의해 인도는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대략 2~3천만이 사망했다고 한다. 역사가 David Stannard가 쓴 'American Holocaust : The Conquest of the New World, Oxford University Press, 1993’(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 따르면 "약 2천만 명의 인도 주민들이 19세기 후반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혹정, 불평등 무역, 책임 유기로 인한 대량 아사 사태로 희생되었다." 라고 나와 있다
이 뿐 아니라 인도인들은 영국 식민 통치 당시 여러 생채 실험에도 끌려갔다. 가령, 영국 군사과학자들은 인도 식민지배 때 인도인들에게 독가스 실험을 하는 등 했다.
많은 실험 대상자들은 생식기를 비롯하여 피부에 심한 화상을 입었으며, 여러 날, 심지어 수주일 동안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실험들은 두 번째 사진에 나와 있듯이 기밀 사항이라고 쓰여 있다. 이러한 실험뿐만 아니라 식량, 기근 문제에 대해서도 영국은 인도시민들에게 막대한 아픔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1943년 12월 미국의 신문에 인도의 벵골 대기근으로 인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소년과 강아지가 굶어 죽은 사진의 모습(왼쪽)과 벵골 대기근으로 인해 굶어 죽기 직전의 인도인에게 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물을 주고 있는 모습(오른쪽)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영국 수상은 충격적인 대처를 했다. 인도에 기근이 들자 마지막 영국인 인도 총독 Louis Mountbatten이 처칠에게 식량 원조를 요청하자 "아직도 굶고 있는 간디(당시 비폭력 단식투쟁 중)가 안 죽었느냐?" 라고 답변했다. 또, "나는 인도인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추잡한 종교를 가진 추잡한 족속들이다."라고 처칠이 인도의 외무장관에게 말했다. 또한 "현 상황에서 그들은 여분의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도의 현 생활수준에서 그나마 덜 나빠지는 것은 굶고 있는 인도인들이 서서히 죽는 것을 의미한다."며 영국 수장이 인도인들에 대한 연설을 영국의 하원에서 한 바가 있다. 이에 대한 비난이 굉장히 많이 뒤따랐다. “히틀러만큼이나 처칠도 비난 받아야 한다." - Nicholson Baker, "처칠의 벵골 홀로 코스트는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홀로 코스트보다 규모가 더 큰 학살이다."- Gideon Polya 등이 있었다. 또,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아일랜드와 인도의 대기근을 수수방관한 영국의 처사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사성일 등 외에도 수 많은 지식인들의 비난이 난무했다. 그런대 정말 놀라운 사실은, 르네 뤼힝거 학자는 센의 연구에 따르면 벵골의 대기근이 발생했던 1943년의 전체 식량 공급량은 1941년에 비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런데 1941년에는 기근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1943년의 문제는 인플레이션과 이로 인한 식량의 가격상승이었다. 그러나 농부들의 임금은 이에 상응하게 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근이 발생한 지역의 식량은 구매력이 더 강한 도시 쪽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영국의 임금 정책에 대한 무관심과 미동으로 인해 식량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규모의 기근이 발생했던 것이다.
요컨대 영국의 식민 통치 아래 인도가 엄청난 고통과 착취를 당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속에서 고통과 함께 경제의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듯이 인도에서도 그런 경제적 변화가 있었다. 영국의 통치는 18세기 이래 분열 와중에 있던 인도에 통일과 안정을 가져왔다고 한다. 인도 내에 여러 소 국가들이 분열을 멈추자 전쟁 탓에 황폐화되어 있던 농촌이 차차 부흥하여, 과중한 지세나 기근에 괴로움을 당했지만 경지가 확대되고 인구가 증가하였다. 19세기 중엽부터는 영국도 붕괴 직전에 놓여 있던 오래된 관개용 저수지와 운하 등의 복구에 착수하였으며, 나아가 새로운 관개 시설의 건설에도 손을 댔다.
기근의 참화는 사라지지 않았고,
기생 지주층의 지대에 그 농작 수확물의 대부분을 빼앗겼다고 할 수 있으나, 농업의 부흥과
개발은 일반적으로 말해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그것과 함께 국내 관세의 폐지, 내륙 통상으로의 상태 유지, 법률에 의한 생명과 재산의 안전 보장
등 일련의 정책에 도움을 받아 인도의 국내 상업은 순식간에 발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은 서로 독립된
요소로 분열해 있던 인도 경제에 어느 정도의 유동성을 주어 하나의 경제로 통일해 가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이 교통과 통신의 수단을 개혁한 것 역시 인도 경제의
통합에 이바지 했다. 물론 군사적 조치가 우선되어 많은 노동력의 희생이 뒤따랐지만, 포장된 도로로 차차 정리가 되었고, 하천 교통에 증기선이 도입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철도 건설이 착수되었다. 또한, 1850년에는 근대적 우편 제도가 시작되었고, 전화기도 실용화 단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인도인들이 대중적으로 사용을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한편, 그와
동시에 인도의 해외 접촉도 영국인들의 손을 통하여 조금씩 활발해지고 있었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 유럽과의 전신 연락의 개시는 모두 60년대에 가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으나, 무역의 빈번함은 영국 통치 이래 매우 크게 상승하고 있었다.
원래 영국의 식민지 통치는 인도 경제를 국제 시장과
밀접하게 연결하려고 했다. 영국이 식민지에게 요구하는 여러 가지 명목의 송금을 지장 없이 해내기 위해서는
인도는 항상 그만큼의 수출 초과를 유지해야만 했다. 더불어, 18세기
말부터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진행되자, 식민지 인도는 본국의 산업을 위해 될 수 있는 한 큰 시장을
만들어야 했다. 즉, 인도는 영국 근대 산업이 공급하는 소비재인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지역인 랭커셔(Lancashire)의
무명을 차츰 대량으로 매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큰 시장을 만들기 위해 이 무명에 대한 지속적인 수입의
팽창과 이에 대한 지불이 요구되었고, 동시에 영국으로의 송금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보다 큰 수출량의
유지도 요구되었다. 이것이 산업 혁명 이후 식민지 지배에 있어서의 하나의 기본적 정책이었던 것이다. 즉 수입이 팽창하는 정도보다 수출의 팽창을 더욱 크게 했던 난제에 계속 부딪쳤던 것이다.
그런대 이 난제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 방안을 찾기도 전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18세기까지 무명은 인도의 최대 수출 상품이었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생산되는 무명은 능률을 향상시키는 근대적 공장의 산물이었지만, 인도의 무명은 전래의 기술인 수작업을 통하여 생산되는 것이었기에 경쟁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다. 인도 무명은 그런 이유로 유럽 시장에서 배척되었고, 이어 아시아의 여러 시장, 나아가서는 자국 내의 시장도 잃게 되었다. 인도 내의 조업 지대는 순식간에 쇠퇴해 갔고, 직공들은 사라졌으며, 융성을 크게 했던 도시가 기아의 도시로 변해 인구가 격감했다.
이렇게 무명에 대한 수출량이 격감된 이 때 무명 대신 인도의 수출량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 상품은 19세기 초에는 주로 영국으로 수출된 염료 아이(Indigo), 중국으로 수출된 아편, 생사, 면화, 설탕 등이었다. 이 산물들은 인도의 여러 지역에서 생산이 장려되었는데, 모두 수출용 농업 생산물이었다. 이렇게 수출 산업으로 수공업을 잃은 인도는 국제적 상품 작물의 생산 확대가 강요되었고, 따라서 그 생산에 종사하는 개개의 농민은 불안정한 상품 경제에 내던져져, 국제 시장의 움직임에 따라 그들의 성쇠가 좌우되는 전형적 식민지 농업을 자신들의 수출 산업으로서 육성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III. 결론: 눈 감을 때 생각나는 순간들
본론에서 영국의 식민 정치 아래 인도의 노동력과 인명이 얼마나 착취당했는지, 인도 산업의 어느 분야가 발달되었는지, 마지막으로 어떤 방향의 정책을 통해 어떻게 인도인들의 경제 활동이 변화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식민 정치를 통해 인도에게 일어났던 변화들이 과연 긍정적이었을까 혹은 부정적이었을까?
앞서 서술했듯이, 식민 통치국은 자신 본국의 이득을 식민지대로부터 이용 가능한 모든 것들을 통해 성취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식민지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외부경제의 효과로 인해 경제적인 이득이 남을 수 밖에 없다. 즉 식민 통치로 인해 인도 경제가 성장한 것은 맞다. 하지만 필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 죽기 전에 어떤 표정으로 죽는 지를 보면 인생 전체를 가늠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죽기 전에 그 짧은 순간 동안 인생의 수많은 장면들이 회상되고, 이 장면들이 죽기 전 사람의 표정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를 흔히 주마등이라도 한다. 웃으며 죽는 사람이 결국 인생의 승자이다. 그렇다면 누가 웃으면서 삶을 마감할까? 돈을 많이 버는 사람? 일을 많이 하는 사람? 답은 간단하다. 웃으면서 죽는 사람은 평소에도 자주 웃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사람이 죽어서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은 단 한 개도 없다. 좋은 집 혹은 허름한 집 또는 좋은 차 혹은 낡은 차 등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말이다. 모두 내려 놓고 떠나야 할 뿐이다. 즉 영원한 자기 것은 없다. 그런대 딱 한 가지 죽어서도 내 것인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억이다. 죽어서도 자신이 기억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는 없는 이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소유 아닌가 싶다.
기억은 좋은 기억 혹은 나쁜 기억 등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무조건 자신이 가지고 다녀야 할 것들이다. 좋고 나쁜 것의 차이는 크게 보았을 때 하나로서 같이 움직인다. 때문에 자기 것이 아닐 경우, 좋고 나쁜 차이는 작게 느껴지지만 자기 것일 경우 그 차이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즉 물적 재산은 많고 적고를 떠나 죽으면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고 적음이 무의미하다. 하지만 기억의 경우 영원한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의 차이는 유의미하다. 결국 좋은 기억이 많은 것이 나쁜 기억을 많이 소유한 것보다 좋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인도인들을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아마 경제적인 부족함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본다면 역시 불쌍하게 생각할 것이다. 왜? 우리는 그들보다 웃지 않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해 인도인들보다 더 웃을 수 없으니까. 그들은 어떻게 우리보다 웃을 수 있을까? 심지어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욕심에 쫓기는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쫓기는 삶이다.
식민지를 통한 경제 성장? 다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다. 아픔이 있다면 그깟 경제 성장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한다. 이를 반박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이다. 식민 통치를 주도한 국가의 사람들 혹은 식민지대에서 앞잡이 역할로 배를 채운 사람들. 만약 자신의 가족이 희생을 당했다면 반박할 수 있을까?
참고 문헌
wavell:The Viceroy's Journal(웨벨 : 총독의 일기)>
guardian.co.uk의 한 뉴스 보도 자료 中
American Holocaust : The Conquest of the New World, David Stannard
'Churchill's Secret War(처칠의 비밀 전쟁)'
인도 경제사(B.R. 톰린슨)
식민지의 경제 변동: 한국과 인도(박섭)
kotra 국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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