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 권유정

현재 저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수 중입니다. 러시아학과 학생이라면 정말 많이 들어보고 또 다녀와 본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궁금증이란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살면서 부딪히고 느낀 점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들과 사뭇 달랐습니다. 또한 몇 개월을 살면서 '미리 알았더라면, ~을 했더라면' 이라는 아쉬움도 남는 터라 후배들이 제 경험을 참고하여 더 성공적인 연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글을 쓰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 러시아의 차갑고 추운 면만 생각하는 학생들을 위해 저만의 관점과 경험을 토대로 따뜻하고 밝은 러시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제 글을 통해 학우들에게 연수, 여행 그리고 해외생활 면에서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선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조사하고 성실히 글을 쓰겠습니다.  

 

Title 두번째 칼럼
Writer 로컬리티센터 Date 17-03-13 13:08 Read 428

본문

- 대한제국의 외교관, 이범

 

 

시아보단 유럽을 닮은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러나 곳은 107여년 대한제국에서 남자가 독립을 위해 싸우다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남성은 바로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 지사 이범진 선생이다. 1852 왕실의 후손으로 태어나 초대 주러 공사로서, 그리고 독립 운동가로서 삶과 자결에 이르기 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이범진 선생. 이번 시간엔 107 당시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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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선생은 사실 오래 전부터 러시아와 깊은 관련을 맺어 왔었다. 우선 선생은 대한제국 정치가들 중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했다. 일제에 의해 민비가 살해(을미사변, 1895) 직후 1896 고종의 아관파천을 직접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비 살해 직후 스스로를 포로라고 느낀 고종은 미국과 러시아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고 특히 이범진 선생이 러시아 측과 고종의 중간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같은 (1896) 선생은 주미 공사로 임명되어 9 9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3 선생은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겸임 공사로 임명되었으나 190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방문하여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신임장을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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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대한제국의 기울어가는 국력을 회복시키고자 외교 방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05 11 17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에도 고종의 서한을 불어로 대필한 서한과 함께 니콜라이 2 황제에게 전달할 정도였다. 또한 친러파 정치인이지만 대한제국의 이권에 반하는 러시아의 정책(: 삼림 채벌권 사업) 대해 당당히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1904~5년에 걸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함과 동시에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은 줄어들어 갔고 반면 일본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선생을 대한제국으로 불러내라는 일제의 지시가 있었으나 고종은 비밀 친서를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공사 업무를 지속할 것을 부탁했다. 공식적으론 1906 공사의 지위를 박탈당하였으나 고종과 니콜라이 2, 그리고 러시아 정부의 지원으로 남아 있을 있었다. 선생은 항일 독립 운동가로서 변신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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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마지막 수단으로서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를 주목했다. 그리고 러시아에 있던 이범진 선생도 일을 돕기로 결정하였다. 자신의 둘째 아들 이위종을 특사 한사람으로서 보냈다.(헤이그 특사 파견, отправление в Гаагу корейских делегатов) 그러나 특사를 보내기 위한 사전의 러시아 측에 대한 도움 요청은 러시아 측이 거절함으로써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선생은 대한제국의 국제 사회적 위치에 대해 뼈저리게 통감하게 되었고 항일 독립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1910 8 29 대한 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경술국치) 마지막 저항으로서 1911 1 13 자결을 택했다. 1911 1 19일자 러시아 신문에는 'самоубийство бывшего корейского посланника принца ли-пом-чина'( 조선 공사 이범진 왕자의 자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또한 힘없는 나라의 공사의 죽음이었지만 러시아 황실은 최고의 예우를 갖춰 선생의 장례식을 치뤄 주었다. 안타까운 점은 선생의 시신이 매장된 뒤에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한때 신원불명자로 분류 되었었고 따라서 현재 정확한 묘지의 위치를 없다는 것이다. 사진의 묘비는 2002 정부가 선생의 시신이 매장되었을 거라 추정되는 장소에 새로 새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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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의 흔적은 пестеля 5 거리의 현판에서 찾을 있다. 거리는 당시 해외 공관들이 몰려 있어 흔히 외교 거리라 불렸다. 현판엔 ' 건물에는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이범진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초대 상주 공사가 집무하셨습니다' 라고 쓰여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건물에서 1833년부터 1834년까지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이 살았으며, 1905 혁명 이후 레닌이 부인 크룹스카야와 함께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 건물엔 오직 이범진 선생의 역사적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 건물은 현재 아파트로 사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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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을 통해 상트라는 도시가 관광도시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 있어 역사적인 장소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네덜란드 헤이그엔 실제 교민 부부가 운영하는 헤이그 특사 박물관이 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상트엔 아직까지도 그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복원할 프로그램이나 장소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인 바램은 영사관의 주도로 당시의 자료들을 전시한 작은 박물관이라도 열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현재 러시아 정부에서 계속해서 선생과 관련한 자료, 문헌들을 공개하고 있고 이는 앞으로의 학술적 교류에 있어서 긍정적인 신호로 보여진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이범진 선생의 삶이 더욱 널리 알려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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