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열한번째 칼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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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7-06-26 20:33 | Read | 7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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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의 산책의 큰 의미 : 걷고 또 걷고
벌써 러시아에서 생활한 지 4달이 다 되어가는 이 때, 노보시비르스크에 와서 처음으로 러시아 친구를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아는 선배가 노보 유학 시절 친해진 친구를 미리 소개시켜 준지라 한국에서부터 미리 연락을 주고받은 뒤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 얼굴을 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을 때, 친구는 걷자!(Давай гуляем!) 라고 말했다. 이를 시작으로 나는 지난 네 달 동안 러시아 친구들과 수없이, 아주 많은 시간 동안 거리를 걸어 다녔다.
러시아인들은 산책(Гулять[굴랴찌])을 참 좋아한다.
이는 날씨가 좋고 나쁘고와 관계가 없다. 비나 눈이 와도 괜찮고, 해가 떠 있으면 더욱 굴랴찌 하기 좋은 날이 된다. 보통 한국에서는 맛있는 것을 함께 먹으며 친해지는 경향이 있어 함께 카페나 분위기 좋은 식당에 가는 반면, 러시아인들은 만남에 있어 목적지가 없다.
유럽 대부분의 사람들도 걷기를 좋아하지만 러시아인이, 그 중 특히나 학생들이 더 굴랴찌를 선호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산책을 하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학생들과 다를 바 없이 러시아의 대학생들도 대부분 부모님으로부터 등록금을 받아서 공부한다. 특히나 엔게우는 러시아 내 10위권에 손꼽히는 명문 대학인만큼 과제도 많고, 등록금도 모스크바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대학에 비해 비싼 편이라고 했다. (엔게우의 어문학부에서 공부하는 내 친구의 등록금은 한 학기에 47000루블, 1년에 94000루블. 대략 한 학기에 약 90만원 정도이다.) 물론 등록금이나 물가가 한국만큼 비싸지는 않지만 러시아의 최저시급이 약 2천원인 것을 고려하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또 대학원생의 경우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지만, 지갑이 넉넉지 않은 학부생들에게는 최소 150루블이 넘는(약 3천원)이 넘는 밥 한 끼, 커피 한 잔도 절약의 대상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시베리아의 날씨가 시시각각 변한다는 데 있다.
내가 겪은 시베리아는 아침에 해가 쨍쨍하다가도 저녁에 번개가 치고, 비가 폭풍처럼 오다가도 순식간에 하늘이 맑아지는 곳이다. 매일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선생님의 첫 질문이 ‘오늘 날씨가 어떻냐~?’는 것일 정도로 그들에게 좋은 날씨의 의미는 생각보다 큰 듯 했다. 겨울이 길고 추운 만큼 비교적 날씨가 좋은 여름날에는 자주 거리 나가 해를 보고 자외선을 쐬어주는 것이 그들의 불문율과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직 이해하기 힘든 러시아어를 거리의 소음 속에서 걷고 듣고 대화하자니 벅차게 느껴지기도 했고, 목적 없이 그리고 언제 끝난다는 기약 없이 걷는 것이 낯설기도 했다. 커피를 마셔도 С собой(테이크 아웃)가 익숙한 그들을 따라가기에 내 다리는 너무 자주 그리고 빨리 아파왔다. 햇볕이 쨍쨍한 날, 쉬지 않고 아카뎀 근처를 3시간동안 이야기하며 걸은 날에는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생활 속 작은 습관으로 건강을 지키고 있었고,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걷다가 마주쳐오는 나비 떼에 함께 웃고, 갑자기 흩날려 오는 눈을 함께 맞으며 정을 나눴다. 한편으로 나는 그제서야 러시아의 거리에 왜 벤치와 쓰레기통이 많은지를 알게 되었다.
아쉽게도 내가 공부하는 엔게우 근처의 아카뎀고로독에는 굴랴찌에 적합한 공원이 딱히 없다. 대신 걸어서 30분 거리에 Обское море(압스꼬예 바다) 라는 호수가 있다. 사실은 호수지만 바다라는 호칭을 쓸 만큼 넓고 파도치는 곳이어서 겨울이든 여름이든 아카뎀고로독의 사람들이 자주 가서 해변을 거니는 곳이다. 육교도 건너야 해서 생각보다 힘들 수는 있지만 특히 여름에는 산책도 자주 가고, 자외선을 받으며 수영도 하고, 샤슬릭도 구워먹을 수 있는 아주 여러모로 유익한 공간이니 아카뎀고로독에 온다면 꼭 들러보기를 추천한다.
2월의 Обское море
5월의 Обское море
한국 유학생들과의 Обское море에서의 추억
보통 한국인들은 여름에는 더워서 빨리 볕을 피해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로 들어가고, 겨울에는 추워서 빨리 난방이 빵빵한 실내로 들어가기 바쁘다. 하지만 러시아에 온 뒤로는 날씨를 이기는 법을 배운 듯하다. 산책으로 지갑과 건강을 동시에 지키는 러시아인들을 보며, 아마 나도 한국에 돌아가서 굴랴찌 전도사가 될 것도 같은데, 무더위를 뚫고 과연 친구들이 함께 걸어줄 지가 의문이다.
작성일 2017.6.25일 기준 환율 19.10루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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