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남아시아 - 최원혁

안녕하십니까? 인도학과에 재학중인 인도지역 리포터 최원혁입니다.

 

최근 인도에 한국 기업의 진출과 한국과 인도간 CEPA(포괄적 경제파트너쉽)로 인해 양국간 교류, 협력, 사회,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도학을 전공하며 학교에서 배운 이론적인 전공 지식을 현지에서 활용해 보고 싶습니다.

또한, 인도지역에서 몸소 체험하게 될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특성화사업 국제화 부문을 수행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로컬리티 사업단의 리포터로서 생생한 현지 소식과 지역리포트를 성실히 수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Title 두번째 칼럼
Writer 로컬리티센터 Date 16-03-08 10:03 Read 790

본문

인도, 위대한 혹은 슬픈 나라

 

 

 

 

   신비한 혹은 야만의 나라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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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흔히 사람들이 미지의 세계 그리고 신비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집단 강간사건이 발생하는 위험한 나라로도 생각한다. 인도로 떠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인도에 대한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도를 정신과 명상이 발전한 신비한 나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면에는 인도는 현실적으로는 무능하고 발전가능성이 없는 후진국이라는 멸시가 깔려있다. 이러한 양면적인 생각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알아야 인도에 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인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 인도를 지배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우리는 왜 인도를 현실적으로 무능한 나라, 요가의 나라, 강간의 왕국이라는 둥 온갖 야만적인 것은 인도와 연관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서양의 제국주의적 정복욕과는 또 다른 인도에 대한 욕구가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인도를 열등한 ‘동양’으로 타자화하면서 우리 자신을 발전한 서양과 동일시한다. 이렇게 타자를 규정함으로써 곧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제에 의해 이류 민족으로 전락당한 경험이 있는 우리는, 이제 먹고 살 만해지니까 인도에게 동양을 전담시키고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자아상을 갖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잠재의식적으로 인도와 같은 동양으로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인도는 신비한 나라도, 야만적인 나라도 아니다. 신비함, 야만적이라는 생각은 선입견을 형성해 우리가 인도를 직관적으로 경험하는데 방해 할 뿐이다. 늘 꿈꾸지만 갈 수 없었던 인도를 떠나면서, 그들과의 만남, 그들이 먹는 것, 그리고 그들의 이동수단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 죽음과 삶, 그들의 신들의 공간에 관해 선입견 없이 직관적으로 경험해야한다.

 

 

 

 

 

인도인들과의 만남, 힌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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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도인과 만날 때 염두 해 두어야 할 점은 그들 대부분은 힌두교라는 점이다. 우리가 인도에 관하여 힌두교만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도 드물 것이다. 힌두교는 기독교처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딱 정해진 종교가 아니다. 신석기 사람들의 신앙부터 현대인의 신앙까지 모두 망라된 종교다. 힌두교에는 창시자가 없다. 또 가톨릭처럼 통일된 조직도 없다.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사상이 매우 발달해 있기도 하지만, 대단히 물질적이고 기복적이며 주술적인 성격도 뚜렷하다. 그러다 보니 그 체계가 단일적이지 않고 매우 복합적이다. 그 안에 상호 모순되는 면들이 수없이 많이 공존한다. 그 모두가 다 힌두교다.

 

 

 

 

인도인들과의 만남, 서양에 의해 만들어진 반쪽짜리 힌두교

 

힌두교가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은, 현실 세계를 인정하는 쪽과 부정하고 버리는 쪽의 두 가지 세계관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을 인정하는 쪽은 카스트의 전통을 지키면서 부모 아래 가정을 이루고, 돈을 벌면서 아옹다옹 산다. 반면 세상을 버리고 나가는 쪽은 카스트 전통도 버리고, 부모 자식도 버리고, 세상을 떠돌며 산다. 버리고 나간 자들은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고행하고 수행하면서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러한 수행자는 극히 일부분일 뿐이지만, 소수라 해서 그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무시하는 일은 결코 없다. 또한 그 두 세계관끼리 충돌하는 법도 없다. 힌두교는 그 공존의 원칙 안에서 고정된 종교가 아니라 대립하는 여러 성격을 흡수해 나가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종교다. 그래서 그 안에 근본도 없고, 원칙도 없다.

그런 힌두교가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된 것은 영국의 인도 식민 통치와 관련하여 새로운 힌두교가 만들어졌는데, 그 새로 만들어진 힌두교만 한국에 널리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식민 통치시기에 식민주의자와 민족주의자는 서로 필요는 달랐지만 모두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하여 그 방대하고 복합적인힌두교를 영적이고 신비적인 종교로 해석하였다. 거기에서 세상을 버리고 떠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믿고 따르는 생활 속의 힌두교 신앙, 즉 물질적∙기복적∙현실적인 측면은 무시된 채 명상과 사색, 그리고 요가를 추구하는 신비한 종교로 짙게 채색되었다.

 

 

 

 

인도인들과의 만남, 정치 이데올로기가 된 힌두교

 

힌두교는 식민 지배 종식과 독립 후 국가 정체성 확립 방법을 고민하던 이들에게 해결책이 되어 주었다. 반(反)식민 투쟁을 거치면서 국가 건설의 주체로선 일부 민족주의 엘리트들이 힌두교라는 종교를 국가건설과 분단 과정에서 주요한 국가 이념으로 삼은 것이다. 민족 운동 엘리트들이 오랜 시간 반식민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식민 담론의 틀에서 스스로 사육당하고 아가 그 담론을 오히려 활용한 결과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 대치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국가 이데올로기로 힌두교가 유용했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집단 성원들의 정신, 또는 사회적 결합력을 확립하거나 상징화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고, 공동체와의 일치감을 통해‘민족’으로서 공동체를 표현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결국 실재가 아닌 상상으로 만들어진 그 힌두 공동체는 곧 왜곡된‘민족’이 되고, 그‘민족’은 내부에 실질적인 불평등과 착취를 무시한 채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 의식으로 단합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기이한 상상의 발명품을 위해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치는 코미디 같은 비극이 인도에서 쉽게 일어나고 있다.

그 안에는 홀로 된 부인을 죽은 남편과 함께 산 채로 화장을 시키는 사티도 있고, 그것을 힌두교의 근본이라 칭송하고 찬양하며 반드시 지켜야 할 고유문화라고 주장하는 보수 집단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을 증오하고, 모든 무슬림을 이 땅에서 몰아내 목숨으로 조국을 지키자는 힌두자살특공대의 ‘애국심’도 있다. 존재하지 않는 힌두교의 ‘근본’을 애써 만들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은 일부 정치꾼들의 놀음에 인민들이 편승한 결과다.

 

 

 

 

인도인들과의 만남,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은 그들의 전통

 

인도인은 역사적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왕조의 흥망이나 정치적 사건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리스가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를, 중국이 사마천이라는 뛰어난 역사가를 배출하는 동안 인도는 기록 생산에 무관심했다. 불경이 등장할 때까지 역사적 기록이 전무했고, ‘베다’ 등 방대한 힌두경전과 라‘ 마야나’ 같은 대서사시도 전부 구전되다가 훗날 문자화됐다. 기록을 즐겨 하는 이슬람 세력이 인도에 등장한 1200년대에야 초보적 역사 기록 움직임이 나타나지만, 그마저도 시간의 흐름을 적은 단순 연대기에 지나지 않았다. 인구의 다수인 힌두는 오래도록 역사인식에 바탕을 둔 기록에 침묵했다.

11세기에 인도를 17차례 침입한 가즈니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를 따라왔던 이슬람학자 알 비루니는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기록을 남겼다. “힌두들은 역사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왕들의 계승 관계를 연대에 따라 연결하는 데 부주의하다. 정보를 달라고 채근하면 당황해서 무엇을 말할지 몰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힌두들은 이런 기록을 남긴 알 비루니는 말할 것도 없고 600년간 인도를 지배한 이슬람 세력에 대해서도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종교 지식과 진리를 탐구할 때 반드시 스승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문자로 적거나 책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진리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었다. 고대 인도에서 지식의 원천인 경전은 슈르티(suriti)라고 불렸는데, 이는 ‘들었다’ 또는 ‘정보를 얻었다’는 뜻이다. 또 다른 경전 슈므리티(smuriti)는 ‘들어서 이해한다’는 의미다. 즉 진리는 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었다. 이런 전통에서 진리에 이르는 지식은 스승에서 제자에게 입을 통해 전해지기 마련이었다. “태양이 없으면 깜깜하듯 스승의 설명이 없으면 공부는 모호하다”고 여긴 학생들은 스승의 축복과 경험을 통해 진리에 도달한다고 여겼고, 진리를 ‘듣기 위해’ 집을 떠나 스승의 집에서 스승의 말을 통해 배우는 전통을 이어 갔다.

글을 아는 카스트 집단이 지식의 재생산을 독점하려 비밀스러운 성격을 강조한 것도 기록과 책이 없는 또 다른 원인이었다. 일부 지배자들도 자신의 권위를 침해할지 모를, 즉 누구나 볼 수 있는 기록과 책의 생산을 장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록이 드물었다.

기록이나 역사서가 없다는 것이 인도의 열등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록을 중시하는 문명과 다른 전통을 가졌을 뿐이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과 방향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서구처럼 시간을 역사의 동력으로 간주하거나 계량화하지 않았다.

 

 

 

 

인도인들과의 만남, 논쟁적인 인도인

 

오늘날 인도인이 수다스러운 것도 구비전통과 관련이 있다. 말을 잘하는 인도인은 혼자 있으면 독백하고 둘이 있으면 논쟁하며 셋이 있으면 정당을 만든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인도인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긴 영국인이 인도인은 이웃 사람과 수다를 떠는 것을 잘한다고 적은 걸 보면 인도의 구비전통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알 수 있다. 노벨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이 ‘논쟁적 인도인’을 썼고, 그의 고향 벵골 지방은 누가 ‘그렇다’라고 외치면 어디선가 곧바로 ‘아니다’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논쟁이 유명한 것도 이런 전통의 소산이다. 최근에는 인도인

이 IT(SW)산업에 두각을 보이는 이유를 구비전통에서 찾는 주장도 등장했다. 아마도 지식이 표준화된 문헌과 달리 전달자의 관점과 상상력이 더해지는 구전의 개방성이 말하는 모두를 창작자로 만들기 때문이리라. 구비전통에 수많은 버전이 존재하는 건 그래서다.

 

 

 

 

인도인들과의 만남, 유아기 때 치르는 의식

 

힌두교도는 출산 후 탯줄을 자르기 전, 아기의 아버지가 황금 숟가락이나 금반지를 꿀이나 요거트 혹은 정제 버터에 살짝 담갔다가 아기의 입에 댄다. 아기의 오른쪽 귀에 서으러운 단어를 세 번 말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힌두 경전에 따른 만트라(종교적 명상 및 기도시 외는 주문)를 외운다. 영아기에는 작명식, 첫 사원 방문, 첫 이유식, 첫 번째 귀 뚫기, 배냇머리 자르기 또는 삭발 의식이 있다. 이런 의례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어서 보통은 외국인 주재원을 초청하지 않는다.

이 중에서 작명식은 나마카란(Namakaran)이라 불리는데, 보통 태어난 지 12일째 또는 101일째, 돌 때 행한다. 지역에 따라 의식은 매우 다양하다. 작명식은 가정이나 사원에서 주로 행하고, 가족 행사를 맡고 있는 사제가 의례를 인도한다. 사제가 모든 신과 조상에게 아이의 안녕과 축복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아이 아버지는 아이를 자신의 무릎에 앉혀 놓고 아이 이름을 오른쪽 귀에 속삭인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를 세상에 있게 한 장본이로서 특별한 경배를 받는다. 의례 후 향연은 주로 성스러운 의식으로 여겨 채식으로 제공된다.

 

 

 

인도인들과의 만남, 새로 태어나는 의식

 

상위 카스트(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의 남자는 6~12세 사이에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했음을 알리고 성인으로서 종교적인 책임을 인지하는 의례를 한다. 이 의식에서는 사제가 소년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까지 내려오는 성스러운 실을 걸어주고, 산스크리트의 만트라를 구두로 가르친다. 성년식은 새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남인도에서는 초경을 시작한 소녀도 성년식을 행한다.

 

 

 

인도인들과의 만남, 그들의 결혼식

 

서구와 현대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는 정혼이 자유연애혼보다 일반적이다. 보통은 종교와 카스트 내에서 혼처를 구하고, 씨족 범위에서는 외혼 성향을 띤다. 즉 같은 세부 카스트 내의 남녀가 정혼을 하며 같은 조상을 가진 씨족 내 결혼은 터부시 된다. 청혼은 신랑이나 신부 양측에서 모두 가능한 것이 일반적이나, 지역에 따라 신랑측만 혼인을 청할 수도 있다. 보통 혼인 제안은 친척이나 친지, 양가를 잘 아는 지인이 하게 되며 가족 사제가 중매를 하기도 한다.

결혼 날짜는 점술가에게 부탁하여 힌두 달력에 따라 결정한다. 신랑은 화려한 혼례복을 입고 친지나 악대 또는 장식된 램프를 든 사람들과 함께 장식된 말이나 리무진을 타고 혼례 식장을 돈다. 본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신이나 여신, 왕비를 상징하는 화려한 의자에 앉는다. 신부는 아주 화려한 사리를 입고 금, 다이아몬드 등의 보석으로 장식하며 손과 손바닥 그리고 발에 성스러움을 나타내는 해나 문신을 한다. 결혼식 장소는 주로 신부의 집 또는 예식장, 공원, 지역의 공공장소 등이고, 주로 밤에 치른다. 만트라가 읊어지는 가운데 신부가 신랑의 인도에 따라 신성한 불을 7번 돌고, 신랑은 신부의 가리마와 머리카락 빈 틈에 붉은색 진사를 바른다. 신부는 이때부터 한사람의 아내라는 징표로 진사를 평생 발라야 한다. 결혼식 기간에 신랑이 만갈수트라라는 신성한 목걸이를 걸어주면 둘은 평생 동반자가 되는데, 힌두 전통에서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지만 법으로는 허용된다.

 

 

 

 

인도인들과의 만남, 그들의 장례식

 

장례식은 지역, 카스트, 또는 망자의 지위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는 임종 직전에 침상에 눕히는 의식, 망자의 유품을 소각하는 의식, 영혼 전환 의식, 조상 숭배 의식으로 구성된다.

가족이 사망하면 친지들은 ‘신은 진실하다’는 장례 성가를 부르며 화장터로 시신을 옮긴다. 화장터는 보통 강둑에 있으나 최근에는 도시 근처에 전기 화장터가 있다. 화장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일부에서는 매장하기도 한다. 특히 유아가 사망했을 때 매장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장례식에서는 장자가 상주가 되며, 상주가 화장 시 점화를 한다. 화장 후에는 재를 모아 갠지스강과 같은 성스러운 강에 뿌린다. 화장 절차가 끝나면 참여한 사람들은 정결 의식으로 목욕을 한다. 4촌 이내의 가까운 가족들은 장례 후 10~13일 동안에는 부정해져 있다고 믿고, 정결 의식으로 삭발하기도 한다. 이 기간이 끝나면, 가까운 친지들은 모여 식사를 같이 하거나 생필품과 옷을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한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흰 옷을 입는다. 여성은 머리카락을 풀고 뒤로 묶지 않는다. 또 장례식에서는 선물을 가지고 가지 않고 개인 소지품도 가능하면 소지하지 않는다.

망자의 가족과 서로 안부를 물어서는 안 된다. 애도의 표시로 목례나 포옹 정도는 할 수 있으나 ‘나아지길 바란다’는 정도를 넘어 앞으로 안녕과 행복을 바란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망자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열린 관에 꽃을 봉헌하거나 쌀을 뿌리기도 한다.

망자 또는 죽음과 관련되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화장터를 뜨기 전에 손과 발을 씻고 머리에 물을 뿌린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샤워를 하고 입었던 옷도 세탁한다. 목욕 등 정결의식을 치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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