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기사] 우즈베키스탄: 5. 두 거인의 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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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6-10-26 10:47 | Read | 4,955 |
본문
반대파에 대한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 높은 우즈베키스탄의 독재자 이슬람 카리모프. 헌법을 개정해 종신 집권이라는 영생을 꿈꿨던 독재자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2016년 9월 2일 뇌출혈로 사망한 카리모프. 그의 죽음 뒤에도 우즈베키스탄 민중의 삶은 계속됩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국가, 우즈베키스탄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과 정치, 사회와 경제를 다시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이 연재는 총 10회 이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편집자)
호자예프와 이크라모프는 각각 사마르칸트(호자예프)와 타슈켄트(이크라모프)라는 지역적 지지 기반을 두고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두 지역의 라이벌 관계는 지금 우즈베키스탄 정치를 설명할 때에 여전히 중요하며, 제가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대규모 농업 집단화
제1차 5個年 계획의 골자는 농업을 집단화하고, 농촌에서 뜯어내다시피 한 곡물을 수출하여 자본을 확보한 뒤 중공업에 들이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에는 사실 공업을 투자할 경제적 유인도, 정부 차원의 정치적 압력도 낮았습니다.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중심 공업지역이었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그리고 드네프르 지역과 우랄 지역이 집중적인 투자를 받았고, 이와 연계하여 볼가 지역도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기존의 농촌 지대에는 사실 별 혜택이 가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카자흐 유목민 정착은 이때 만들어진 비극이었죠.
저항으로 보존된 씨족 공동체
그러나 아까 말했지만 이러한 농업 집단화는 사실상 농촌 착취나 다름없었고, 이를 위해서 농촌은 엄청난 사회변동을 겪게 됩니다. 농민들을 이주시키고, 가축을 비롯한 소농 가구의 자본을 강제로 모으는 과정에서 엄청난 자본손실이 이어졌죠. 농민 저항도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집단화는 그 엄청난 피의 대가와 함께 어쨌든 달성이 되었습니다.
중앙의 통제력이 아직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던 우즈베키스탄에선 이러한 사회변동에 아래로부터 자기보호 기제가 발동되었는데, 바로 전통적인 씨족(clan) 사회의 상호부조였습니다. 앞서 계속 언급했듯이, 이 지역의 전통적인 자아 정체성은 국가의 시민 혹은 국민이 아니라 혈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맺어진 씨족의 후원과 피후원 관계였습니다. 국가를 중심으로 뭉치고 협력하기엔 적합하지 않을지라도, 농촌을 대규모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서로 죽지 않도록 협력을 하는 일은 오히려 이런 식의 강력한 상호부조 기제가 더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페르가나’를 나누며 분화한 씨족과 파벌
한편 혈연에 기반을 둔 느슨한 공동체였던 기존 씨족은 집단화를 통해서 지리적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기존엔 어느 정도 혈연에 기초한 후원 관계가 중심이었기에 우즈베크의 타슈켄트에 살든 부하라에 살든 아니면 카자흐의 알마티에 살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조상만 공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같은 씨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행정시스템과 씨족 질서가 함께 진화하면서, 혈연관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굳이 같은 핏줄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같은 지역에 살고, 지역적 정체성을 공유하면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는 사회적 대변동에 그들 나름의 적응하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두 거인의 충돌
호자예프와 이크라모프, 두 지도자의 경쟁 관계는 당연히 5個年 계획의 정책 노선을 두고도 의견 충돌을 빚었습니다. 이는 소련 중앙당의 노선과도 관계가 있었습니다. 모스크바는 당연히 페르가나를 중심으로 목화를 뜯어내어 소련 산업화에 투자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야로슬라블-이바노보와 같은 직물 산업 중심지의 명운이 걸려 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우즈베크인,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고려인을 뛰어넘는 호모 소비에티쿠스, 즉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창조하고자 했습니다. 피오네르(пионер; 소련 공산당 소년단, 피오네르는 ‘개척자’라는 뜻.)와 콤소몰(Комсомол; 전연방 레닌주의 청년 공산주의자 동맹의 약자.)로 이어지는 유소년-청년 조직은 이의 전위대가 되어 대중을 ‘지도’했습니다.
이크라모프는 당연하게도 중앙당이 추구하는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했습니다. 우선 5個年 계획에서 직접 수혜를 받는 페르가나 파벌은 그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타슈켄트와 지역 정치에서 동맹을 맺었습니다.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 목화를 다른 지역으로 수출할 때 타슈켄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기도 했겠지요.
이크라모프는 기본적으로 소련 중앙당의 관점을 대변했기에, 아마 실질적으로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지역에 투자가 가지 않는 것에 별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페르가나를 중심으로 중앙당의 투자를 받아내고 타슈켄트를 중심으로 우즈베크인들을 새로이 재창조하는 일이었겠지요. 5個年 계획 때 제시된 페르가나 관개사업이라던가 타슈켄트 도시건설 사업에서 활약한 콤소몰 단원들이, 지역 파벌들의 비호 아래에서 공산당으로 대거 입당합니다.
한편 사마르칸트의 호자예프는 전에도 말했지만, 우즈베키스탄이 하나의 독립적인 지역으로서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기를 원했습니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공화국 간의 분업체계, 즉 우즈베키스탄은 목화 농사만 짓게 하고 실질적인 제조업들은 다 러시아에 몰아주고자 했던 당의 지배적 노선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투르케스탄-시베리아 철도가 입안될 당시 중앙정부 휘하의 교통인민위원회는 단순히 철도 노선만 깔고 목화만 실어나르기를 원했습니다만, 호자예프와 전에 말한 카자흐의 르스쿨로프는 철도 노선이 지나는 곳마다 막대한 지역개발 사업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지역주의적 압력은 공사비와 완공까지 걸리는 시간을 늘려주었죠.
거기에 호자예프는 이슬람 전통에도 어느 정도 호의적이었고, 근대와 이슬람이 양립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소련의 창조적 파괴(혹은 파괴적 창조)는 그가 걸어온 경력과 지지 집단을 생각했을 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1차 5個年 계획을 통해 당 조직과 정부 조직에 필요한 인력이 급증하였기에, 어떤 인적 자원을 양성할 것인가에 대한 노선의 차이, 그리고 어떤 개발사업을 지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 차이는 궁극적으로 우즈베키스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비전의 차이였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정치적 게임은 비전을 제시하고 지지집단을 동원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이들은 타슈켄트와 우즈베크 공산당, 그리고 사마르칸트와 우즈베크 행정부라는 기반을 동원해서 자신들의 비전을 관철시키고자 하였지요.
‘대숙청’으로 끝난 라이벌 관계
이런 정치적 역학을 고려했을 때 호자예프가 숙청당하는 건 사실상 필연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대숙청의 폭풍은 이크라모프라고 비껴가지는 않았습니다. 스탈린은 어떤 종류가 되었던 파벌정치를 허용할 의사도 없었고, 파벌이 중심이 되어 서로 해먹는 정치는 그 파벌에 속하지 않은(혹은 못했던) 대중의 반감을 사고 있었습니다.
제2차 5個年 계획이 끝나가면서 급속한 경제적 팽창으로 인한 혼란상도 정리가 되어야 했고, 하부당원들이 갖고 있던 지역당 중견 간부들의 과두정치에 대한 반감도 끓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당원들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영도하는 통일된 노선으로 일치시키고, 전국적 기율을 확립하고자 했던 스탈린의 노력이 맞물리자 트로츠키주의자 그룹이 외국 파시스트들과 연계해 나라를 뒤흔들려고 한다는 편집증적 공포가 나라를 휘몰아쳤습니다.
스탈린은 이슬람에 우호적인 호자예프뿐만 아니라 당에 충성했던 이크라모프의 ‘파벌정치’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풀려나온 괴물은 상호 기소의 폭풍을 몰고 와 모두를 KGB가 있는 루뱐카의 고문실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이 괴물은 1938년 말 스탈린이 상황을 가까스로 정리하고자 했을 때 간신히 다시 우리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만, 이미 우즈베크 공산당을 비롯해 전국의 당 조직을 한바탕 휩쓸고 간 뒤였습니다.
결국, 타슈켄트 파벌은 식량 배급 관리에 실패했다는 이유와 도로 관리를 비롯한 도시 미관을 신경 쓰는 데 소홀했다는 점, 트램(tram; 노면전차) 시스템을 확장하는 데서 의도적 사보타주를 했다는 점 등등 온갖 혐의로 숙청당했습니다. 지역 정치는 그렇게 스탈린의 강력한 철권 하에 역사 속으로 퇴장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5個年 계획을 통해 만들어진 역설적 상황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즉, 전통적 사회구조가 근대화 프로젝트와 맞물려서, 근대적 기반을 갖춘 전통질서의 연장선이 되어버린 우즈베키스탄의 상황은 이러한 파벌정치의 종식을 순순히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대숙청 이후의 혼란이 어느 정도 지나가고, 다시 파벌정치의 여파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계속)
임명묵 기자 know@yeongnam.com
2016/10/26 10:46 슬로우뉴스 '우즈베키스탄: 5. 두 거인의 시대' 원문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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