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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기사] 책소개 - 식민지·가부장제에 갇힌 알제리 여성들의 고통과 열망
Writer 관리자 Date 15-09-23 09:50 Read 2,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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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을 자처하는 마을의 아버지와 오빠들이 많은 탓에 여자들은 남몰래 손에 쥔 편지 때문에, 덧창 뒤에서 속삭인 말 한마디에, 누군가의 비방 때문에 피를 흘리곤 했다. 그럼에도 알제리의 아랍 처녀들은 대담하게 남자들과 펜팔을 즐겼다. “내가 편지를 쓰는 것은 ‘나쁜 짓’도, ‘정숙하지 못한 짓’도 아니라고요! 그저 내가 살아 있음에 가슴 뛴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동시에 프랑스의 침략전장에서 알제리 여자는 아이를 적군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자식의 머리를 돌로 내리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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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출신 작가 아시아 제바르(1936~2015)의 장편소설 <사랑, 판타지아>는 1830년 알제리가 프랑스 침략을 받은 때부터 1962년 독립하기까지 알제리 현대사의 질곡과 피식민지배자 중에서도 약자인 여성들의 증언을 담고 있다. 책에는 여러 인물의 목소리가 번갈아 나오며 서술 방식 또한 역사서, 자서전, 상징시, 소설이 두루 섞인 듯하다.

역사가, 다큐멘터리 연출가이기도 했던 작가는 지난 2월 타계하기 전까지 해마다 노벨문학상 유력 수상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국내에 소개된 책은 10년 전 출간된 <알제의 여인들> 이후 <사랑, 판타지아>가 두번째다.

작가는 침략군의 교전 보고서, 전장에서 프랑스 군인들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종군 작가나 군의관의 회고록 등 식민 지배자의 기록에 담긴 지배 욕망을 포착해 피식민자의 시각으로 역사를 재구성했다. “(…)군사 침공은 약탈의 기획으로 변한다. 군대가 들어오자 상인들이 따라오고, 파산과 집행을 실행하기 위한 그들의 기계가 설치된다. 웃옷에 카네이션을 달듯 장교들이 내세우는 말이라는 장식품은 훌륭한 무기가 될 것이다. 통역관, 지리학자, 민속학자, 언어학자, 식물학자, 다양한 분야의 박사와 직업 작가들도 새로운 먹잇감에 달려들게 된다. 불필요하게 덧붙은 골단처럼 덧쌓인 글의 피라미드가 애초의 폭력을 은폐할 것이다.”

프랑스군의 약탈과 학살 사이로 이를 겪은 여성들의 증언, 작가의 자전적 경험에 바탕한 목소리들이 울린다. 소설 첫머리에는 ‘프랑스 학교에 가는 아랍 소녀’가 등장하고, 가족의 눈을 피해 남자들과 프랑스어로 편지를 나누는 소녀들의 싱그러운 열망이 묘사된다. 부부 사이에도 편지를 쓰는 게 예외적이고 낯선 사건이 되는 곳이었지만, 제바르는 부친이 프랑스 학교 교사였던 덕분에 유년기에 프랑스 학교와 사설 코란 학교를 함께 경험했고 혁명적인 특권을 누렸다. 그만큼 가부장적 관습에 대한 문제의식이 컸다.

3부에 이르러서는 이전까지 번갈아 나오던 여성들의 목소리와 역사적 서술의 경계가 사라진다. 오빠들을 따라 빨치산이 된 소녀 셰리파는 눈앞에서 오빠를 잃고 프랑스군에 잡혀서 고문을 당했던 고통스러운 기억에 더해, 당시 여성 투사들이 감내했던 이슬람 전통사회의 여성혐오주의까지 증언한다. 셰리파는 남자 동지들에게 잡부 취급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적인 탐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공식적인 역사에서 제외된 여성들의 목소리가 서술자의 목소리와 겹치면서, 한 아랍 소녀로부터 시작된 <사랑, 판타지아>는 모든 알제리 여성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해당 원문의 저작권 및 모든 권한은 경향신문 에 있음을 밝힙니다.

원작자 및 출처

원문: 김여란 기자, 2015년 9월 18일 기사 '식민지·가부장제에 갇힌 알제리 여성들의 고통과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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