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cality Summer School

해외학생 초청 Inbound 프로그램 ‘Locality Summer School’

‘Locality Summer School’은 광역특화전공의 각 지역별 외국인 학생들을 한국으로 초대해 광역특화전공생들과 함께 진행하는 문화교류의 장으로써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탐색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광역특화전공 학생들은 외국인 학생들을 통해 자신이 공부하는 지역의 특수성과 문화적 특징들을 몸소 체험할 수 있으며,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최대 8일간 합숙하면서 현지인을 미리 접하고 로컬리티 현지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게 됩니다.

외국인 학생 1인당 한국인 학생 3~4인이 이루어 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Title [활동보고서 - 유라시아 트랙] FBI 3
Writer 로컬리티센터 Date 17-03-22 15:01 Read 2,689

본문

In-depth investigation project III

 

저희 팀은 훈민정음과 키릴문자 그리고 표트르 대제와 흥선대원군을 비교함으로써 양국의 역사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이 주제를 선정한 첫 번째 이유로는 한국 학생들은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고 외국인 학생은 한국 역사를 전공으로 삼고 있지만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해 부족한 지식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4년간의 교과과정으로 어느 수준까지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음에도 러시아어 알파벳인 키릴문자가 어떻게 생겨난 것이며 탄생배경이 어땠는지, 같은 맥락에서 외국인 학생에게 훈민정음의 배경을 탐구해보는 주제가 언어 공부에 흥미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 탄생 과정과 창제 원리 및 목적, 창제 인물, 유포과정에 대해 중점적으로 탐구하고자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두 주제에 관련된 외국인 학생의 발표를 통해 키릴문자의 고안 목적이 종교 전파 즉, 선교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정교의 영향으로 인해 라틴어로부터 고안된 언어를 사용하는 타 유럽 국가들과 달리 그리스어 문자로부터 형성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발전과정에서 이전에 글라골리짜가 존재했지만 실용성이 낮다는 점에서 자연스레 변형과정을 거쳐 현재의 키릴문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외국인 학생의 발표를 듣고 조사를 이어간 결과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가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키릴문자의 역사로는 9세기 당시 그리스 땅의 주인이던 동로마 제국의 선교사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문자가 없던 슬라브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들은 슬라브족이 세웠던 체코를 중심으로, 폴란드, 독일, 발칸반도 일부를 포함하는 대 모라비아에 파견되었는데, 파찰음이 많은 슬라브어를 기록하기 위해 라틴 문자와 그리스어 문자를 변형시켜 키릴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문자를 만든 이의 이름을 따 키릴문자라고 명명합니다. 현재는 러시아, 동유럽 일대, 남유럽의 발칸반도 중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옛 소련에 포함되었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몽골 등지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포함한 많은 소수 민족들이 소련 시절 자신들의 문자를 정할 때 키릴 문자를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표트르 대제 치하와 소련 시절 문자 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이 문자 중 잘 쓰지 않는 문자는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탄생배경에 있어 키릴문자는 선교의 목적이 있었다는 점이 훈민정음과 차이가 존재하지만 보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지식을 보급하고자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한 훈민정음이 한국인에게 맞는 음성학에 따라 창제되었듯이 키릴문자 역시 슬라브인의 음성학적 특징에 맞게 고안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공통점을 기반으로 국립 한글 박물관과 세종대왕 박물관에 방문하여 서로가 공부하는 언어를 보다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저희는 훈민정음과 키릴문자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 후 보다 심층적인 역사탐구를 위해 인물을 중심으로 양국의 역사와 그것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우선 국가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 사회로 통합되어가고 있는 와중에 우리나라는 어떤 자세로 세계를 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문이 있었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대한민국이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냉전 시절의 심리적 거리감이 해소되지 않고 있음에 대해 모두 동의하였고, 안타까움이 가슴 한 편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심리적 거리감을 해소하기 위해 역사를 현재의 거울이자 반면교사로 삼아 그 혜안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역사 속 변화의 시기에 집권자의 선택이 국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의 선택과 결과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주된 주제로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러시아와 대한민국 역사 속 변화의 시기에, 개혁을 행동으로 옮긴 인물을 누구로 꼽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 저희는 표트르 대제와 흥선대원군을 비교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이 개혁 정치를 단행했던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필연성에 대해 고민해보았고, 그 선택이 과연 국가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탐구하였습니다. 주제에 대한 심층적 탐구를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Q. 2-1 흥선대원군은 누구인가? 

흥선대원군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로서 이름은 이하응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어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조선 25대 임금 철종이 뒤를 이을 세자 없이 35세에 세상을 떠나자, 왕족의 종친 가운데 임금을 물색하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12세였던 자신의 아들(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그 후 약 60년간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세력을 몰아내고, 대원군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손에 쥐게 됩니다. 

 

Q. 2-2 조선후기 상황은 어땠으며, 흥선대원군은 어떤 정책을 펼쳤으며 결과는 어떠했는가?

보통 표트르 대제와 비교를 할 때에는 조선의 정조를 꼽곤 합니다. 그러나 저희 팀은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두 개혁군주의 정책을 비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부정부패한 일부 세력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파벌과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자 합니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해 정부 기구를 대폭 개혁하고자 합니다. 왕권이 축소되고 비변사의 기능이 확대되어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변사를 축소 및 격하시키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설치합니다. 국가 정비를 위해 대전회통이라는 법전을 편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고, 당백전을 남발함으로써 경제적 혼란을 초래했고, 백성의 노동 착취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양반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하며(군포를 부담하는 호포제),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줍니다. 폐단이 가장 극심했던 환곡을 개혁하고 사창제를 실시합니다. 누락된 토지를 색출하여 국가재정을 확충했으며, 파벌의 토대였던 서원을 폐지했습니다. 뛰어난 인재를 양성했던 도산서원과 소수서원 등 47개만 남겨 두고 무려 600개가 넘는 서원을 폐지했기 때문에 지방 유생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조선은 4강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열강의 침입이 잦았습니다. 대원군은 본격적으로 쇄국정책을 펼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청은 1860년 아편전쟁에 패배함으로써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서구 열강에게 상당한 이익을 양도해준 상태였습니다. 이 서구 열강들은 청에서 조선으로 서서히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자신들이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조선에 건의했지만, 불신을 얻었습니다. 조선의 보수 세력이 천주교를 압박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프랑스 선교사 8000여명이 처형되는 병인박해가 발생합니다. 이에 프랑스가 군대를 끌고 와 병인양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는 병인양요 및 신미양요의 결과로 척화비를 건립하였고, 이는 양반과 유생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대내적으로는 세도정치로 인해 흐트러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열강의 접근에 대하여 쇄국 정책으로 대항하였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의 이러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은 우리나라 근대화 지연의 계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개혁을 단행했으나, 그 개혁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 에 없는 시대적 상황(왜구의 침입)과 더불어 통상수교거부 정책은 오히려 근대화 지연이라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를 우리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해서는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Q 2-3. 러시아의 대개혁군주로 평가받는 표트르 대제는 누구인가? 

다음으로 흥선대원군과 비교하여 볼 러시아의 개혁 군주는 표트르 대제입니다. 

 표트르 대제는 1672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와 두 번째 황후 나탈리아 카릴브로브나 나리쉬키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알렉세이 황제와 첫 번째 황후였던 마리아 밀로슬랍끼 사이에는 표도르와 이반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복 동생이었던 표도르와 이반은 모두 병약하였는데, 특히 표도르는 반불구였고 이반은 눈이 거의 멀었고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인 알렉세이가 죽고 첫 번째 황후의 첫째 아들이었던 표도르가 짜르로 즉위하였고, 표트르는 소년기와 청년기를 크렘린 밖에 있는 외인촌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유년시절에 찾아온 고난과 역경은 흥선대원군과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트르는 화려한 의식이나 불합리한 것들을 혐오했고, 실리적이고 과학적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인촌 생활을 함으로써 여러 외국 기술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다양한 기술들을 익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표도르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자 왕위 계승의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이반과 표트르 중 몸이 약했던 이반보다는 표트르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옳다는 궁중의 의견이 다분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반이 제1 짜르, 표트르가 제2 짜르가 되었고 1969년 이반이 29세의 나이로 죽자 표트르가 유일한 러시아의 황제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쥐게 됩니다. 

 

Q 2-4 표트르 대제는 어떤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국가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표트르 대제는 어린 시절을 외인촌에서 보내면서 여러 외국 기술자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서방에 대해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표트르 대제는 왕위에 오르자 오토만 제국에 맞서기 위한 방편을 얻기 위해 서유럽으로 대사절단을 보냅니다. 이들을 통해 유용한 서구의 지식과 기술을 배워오게 합니다. 표트르는 러시아인들의 생활 관습을 서유럽화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표트르의 서유럽화 정책입니다. 또한 젊은이들의 교훈서를 발간하여 젊은 귀족들의 행실을 서유럽화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귀족들에게도 교육을 강요하며 글을 깨우치도록 하는 것은 물론 외국으로 보내 선진학문을 배우게 합니다. 1703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신문을 발간하였고 최초의 대학을 세우고, 역사와 지리에 대한 연구를 장려하여 최초의 자연, 역사  박물관을 설립합니다. 이를 통해 표트르 대제가 배움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왕권 개혁을 위해 노력한 것처럼 표트르 대제도 절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는데요. 1703년부터 네바강변에 서유럽식 새 도시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이 사업에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었습니다. 1712년 새 도시 건설이 끝나기 까지 약 100,000명의 노동자가 작업 도중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이 새 도시는 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으며, 새로운 수도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주목해야 할 점은 수도가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넘어왔다는 사실인데, 이는 표트르 대제 때 비로소 러시아가 모스크바 대공국의 틀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 현재 많은 러시아인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장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로 여기고 있으며, 자랑스러워한다고 합니다. 표트르 대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아름다운 도시를 후대에 자랑스러운 유산으로서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 정치는 새로운 관료 제도의 마련으로 이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상비군을 창설하고 자질에 바탕을 둔 새로운 관료 제도를 인출하는 등 구 귀족을 견제하기 위한 인재등용제도를 펼칩니다. 1711년 원로원을 창설하여 최고 국가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합니다. 지방 정부 개혁에 있어서는 세금징수를 촉진하고 도시를 재편하였습니다. 유럽식을 추종하였으나 지방의 타성과 무지로 실패하게 됩니다. 표트르는 종교에 있어서도 조직을 개혁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를 왕권 아래 예속 시키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처럼 표트르대제는 대내외 정책에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대다수의 인구를 차지하는 농민들에게는 어떤 혜택도 돌아가지 않아 크고 작은 농민반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농민들과 농노들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무거운 세금과 병역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표트르의 개혁 정치는 소수의 상층부와 일반 대중 사이의 깊은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도 많긴 했지만 표트르 대제의 개혁정치를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역사가들이 많습니다.

궁극적으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서 러시아를 근대화하는데 기여했고, 강성한 러시아를 만들었기 때문에 위대한 개혁가로 평가받습니다.


Q. 2-5 이들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이번 토론을 통해 역사를 진정성 있는 자세로 탐구하였고, 이를 통해 양국에 아직까지 만연한 심리적 거리감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교훈과 혜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열강의 침입에 대항하고, 대내적인 혼란을 잠재우고자 개항을 거부하고 쇄국 정책을 펼쳤습니다. 반대로 표트르 대제는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잠재우고자 서유럽식 국가로 재개편하고자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평가는 후대의 몫이지만, 외국과의 교류에 있어서 두 군주의 자세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계를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의 혜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과유불급이라고 무조건적인 거부와 맹목적인 수용은 국가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무조건적인 거부는 국가가 근대화되는 것을 지연시켰습니다. 반대로 표트르대제는 외국의 문물을 수용하여 국가를 근대화시키는데 수용했지만,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농민들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내부적인 국민 분열을 초래하였습니다.

 

양국의 역사 인물들을 탐구하면서 비록 시대적 상황이나 환경은 다르지만 역사적 맥락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양국의 학생들은 서로의 역사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심리적으로도 가까워 질 수 있었습니다. 

세계를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국가를 무조건 낯설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열린 자세로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와 러시아 설문조사 기관 프치옴이 공동 주관한 ‘한·러 양국 국민 상호인식 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과 러시아인은 상대국의 실제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특히 역사나 지리에 관한 지식이 매우 일반적인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과 러시아인은 상대국에 대한 정보를 대부분 대중매체를 통해 얻기 때문에 상대국에 관한 지식수준이 낮은 편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지만 ‘한-러 관계가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긍정적으로 대답한 러시아인은 53%, 한국인은 69%로, 양국 국민의 상대국에 관한 지식 확장에 대한 수요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설문 조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과 러시아인의 사회의식에 있어서 상대국의 이미지가 더 익숙한 국가들에 의해 가려져 있는 상황이 설문 조사를 통해 도출되었습니다. 아직까지 과거 냉전구도에 대한 선입견이 해소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저희가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인 ‘양국 국민의 심리적 거리감과 상대국가에 대한 이해 부족’에 대한 충분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 투어로 양국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심화하고, 이로 말미암아 심리적 거리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토론, 사전조사, 그리고 Local spots 견학을 통해 “한글과 끼릴 문자”, “흥선대원군과 표트르대제”에 대한 설명을 보충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양국 언어와 지역학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었던 기존 지식을 더 심화할 수 있었고, 우여곡절을 통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시간을 통해 “역사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과 혜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한글과 키릴문자를 비교함으로써 도출한 교훈과 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로, 양국 학생 모두가 전공언어에 대한 배경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고, 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전공 언어의 배경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언어와 문화 차이를 극복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외국인 학생의 경우 국립한글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세종대왕과 한글 창제과정에 대한 큰 흥미를 보였습니다. 게다가 한국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함께 선정한 주제에 대한 큰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반대로 저희도 이번 시간을 통해 한글에 대한 자긍심을 더욱 고취할 수 있었습니다. 키릴 문자의 경우 러시아 학생이 발표 준비를 위해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외국인 학생에게도 자국 언어의 기원을 찾아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반대로 발표를 들은 한국인 학생도 러시아어의 기원에 대해 정확하고 흥미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양국 언어의 유사점을 발견했을 때는 서로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막연히 서로의 언어를 어렵고 낯선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언어를 배울 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깨달았습니다. 

 

언어에 대한 이질감을 해소함으로써 서로의 문화를 이해할 근간을 마련하는 것이 상호 이해와 협력의 첫 번째 혜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흥선대원군과 표트르 대제 비교를 통해 무조건적인 거부와 맹목적 수용은 국가 발전에 저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무조건적인 거부는 국가의 근대화를 지연하였습니다. 반대로 표트르 대제는 외국의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근대화에는 성공하였지만 국가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탐구함으로써 타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습니다. Local spots의 한 장소로서 저희는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근대사를 탐구하기 위해 국립고궁박물관에 방문하였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외국 학생에게 흥선대원군을 포함한 근대사를 직접 설명해주었습니다. 글로만 배우던 역사를 실제로 보고 느끼는 과정에서 외국인 학생이 평소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심화된 지식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한 예로, 관람하는 와중에 표트르대제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과 경복궁 중건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었습니다. 외국인 학생은 이를 후대를 위한 선조들의 노력으로서 받아들이고 계승해야한다는 입장을 전했고, 한국인 학생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경복궁 건설에 투입된 노동자들의 희생에 대한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한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고 나와 다른 시각을 받아들일 때 세계를 바라보는 식견이 넓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역사의 생생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과정은 양국 학생들의 심리적 거리감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되었습니다.  

 

열린 자세로 다른 나라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되 한 쪽으로 치우친 선입견은 피하자는 것을 두 번째 혜안으로 삼았습니다. 

 

 세계는 유럽, 미주, 아시아 3대 광역 성장 축을 중심으로 발전해왔지만 최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유라시아’, 미주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아태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재 균형화,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러시아의 동방정책, 중국의 유라시아 신 실크로드 구축 노력은 이에 대한 무게감을 더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동아시아가 유라시아와 아태지역의 교집합으로서 21세기 핵심 지역으로 부상할 것입니다. 한반도를 핵으로 하는 대칭적 세력 구조가 형성되었고, 이로써 과거 소련과 미국을 축으로 하는 냉전 구도보다 훨씬 복잡한 대립과 균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지역정치 구도와 변화는 한국과 러시아 양국에게 미래지향적인 전략적 파트너로서의 기대감을 더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과 러시아가 이런 흐름을 따르기 위해서는 상호에 대한 이해가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비단 전공자뿐만이 아니라 양국민이 언어, 역사에 그치지 않고 여러 분야에 있어서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양국상호협력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에 모두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심 제고를 위해서는 전공자들의 노력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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