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활동보고서 - 인도남아시아트랙] 러르끼양팀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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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7-07-13 11:56 | Read | 3,928 |
본문
In-depth Research Project(2)
(이어서)
(2) 남한과 북한
1945년 8월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여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은 항복하였고, 한반도는 독립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독립의 기쁨도 잠시,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미국은 38도선 이남에 미군정에 의한 직접 통치를 실시한 반면 소련은 한국인 대표자와 협의하여 정책을 추진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취하였다. 직접 통치이든 간접 통치든, 미국과 소련 모두 한국인의 의사보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한 점은 동일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소련을 비롯한 공산 여러 나라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하여 분단을 공식화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그어 놓은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이제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어버렸다. 미·소의 분할 점령은 국가 건설 방향을 둘러싼 한국인 사이의 분열을 확대시켰고, 분단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3. 인도 내 식민시대 흔적
다음은 라훌과 한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된 내용들이다.
(1) 식민지를 통해 인도가 얻은 것들 PROS
1. 사회 제도적으로 사띠, 조혼제도 등과 같은 사회적 악습을 근절하고 과부 재혼 제도를 도입했다.
2. 학교, 컬리지, 대학, 병원, 우편 시스템 등과 같은 사회적 기반 시설을 발전시켰다.
3. 기차레일, 도로 인프라와 같은 도로 운송 시스템을 성장 시켰다.
4.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인도 내 문맹률이 증가했다.
5. 교육 시스템을 개선하여 영어를 주로 가르쳤고, 이는 현재 인도 내 영어 보급률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 인도의 공용어로 지정되었을 만큼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배우고, 학기 커리큘럼에 영어 정규 과목이 있어 학교를 졸업한 대부분들의 인도인들은 영어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영어는 광범위한 인도 국가의 통합의 수단으로서
6. 전 국민을 하나로 결속하는 크리켓이 이 때 인도 내 전파되었다. 현재는 인도의 스포츠라 불릴 만큼 세계 우승 트로피를 인도가 2번 모두 차지했다. 반면 영국은 한 번도 우승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영국에서 영향을 받아 시작된 크리켓은 인도 사회 내 온 국민들의 애정을 받는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7. 영국이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다른 유럽 국가들의 인도 내 근대적 조약을 통한 교역 확장을 막았다. 8.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문화적 관계 형성에 기여 하였다. 예를 들어 인도의 코튼, 실크, 베틀과 같은 것들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9. 델리, 첸나이, 뭄바이, 콜카타 같이 메트로 시티(주요 도시)와 같은 대도시 형성에 기여했다.
10. 정부, 의회, 민주주의, 헌법 관련하여 틀을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식민지를 통해 인도가 잃은 것들 CONS>
1. 식민통치 기간 수많은 학살이 있었다. 'Jallianwala Bagh' 같은 사건
2. 식민 통치 기간 26년 동안 심한 기근이 있었다. 하지만 인도 내 영국계 회사, 왕비 품위유지를 위해 국민들에게 과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영화 ‘라간’ - 과도한 세금 부과에 불만을 가진 주인공 아미르 칸이 주지사와 크리켓으로 세금 폐지에 대한 내기를 거는 내용의 볼리우드 영화)
3. 영국의 대인도 식민통치 이전 인도의 GDP는 세계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부를 누리던 나라였다. 하지만 영국 식민 통치 지배 기간 이후 5%보다 더 적은 수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4. 과한 세금 부가는 가난, 기근으로까지 이어졌다.
5. 영국의 식민 통치기간 인도는 1,2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때 약 십 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영국 식민지에 대한 인도의 인식>
-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영국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조그마한 주들의 통합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도 안에서의 분쟁들 가운데 하나의 통합을 이룬 부분은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통합 정책은 단순히 그들의 식민통치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역, 인도 내부 통합 정책이었다.
- 인도 내 젊은 층들은 인도 사람들의 조상들의 헌신, 그리고 영국의 식민 통치 기간의 잔인한 폭력, 잘못들에 대해 영국을 배척해야할 나라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사과를 원하기도 한다.
- 인도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크리켓에 대해서는 영국이 전해준 스포츠 문화라는 부정적이고 배척해야 한다는 시각은 없다. 오히려 영국이 전해준 문화인데 정작 영국인들은 우승을 하지 못하고 매번 인도가 우승컵을 가져가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 영국의 에티켓(예절)의 영향을 받은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식사예절과 같은 에티켓들을 영국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
- 인도의 군사력 증진에 도움이 됐다. 이 당시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인도 군인들은 현재까지 이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으며 인도 군사력은 세계 4위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 인도 사람들은 영문 문학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세익스피어와 같은 작가들은 고등 정규 교육 코스에 들어가 있을 정도로 인도인들 사이에서 유명하고 중요한 작가이다.
- 코먼웰스 (영연방) 의 영향을 받은 제도들이나 대학, 컬리지 학위 제도는 인도 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다.
- 인도 내 의학 관련 종사자들은 영국의 의료 체제 배우기 위해 대부분 영국으로 유학을 간다.
- 인도는 국제적 인식에서 ‘가난한 나라’로 인식이 된다. (예.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인도 빈곤층을 묘사한 부분, 뉴스 기사에서 인도를 가난의 굶주리고 있는 국가로 묘사하는 부분) 이와 같은 인식은 영국 식민지배 이후 자리 잡게 되었다.
- 인도 국가적 성과나 발전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 예를 들어 인도가 얼마 전 나사 달 탐사선 미션을 74million 달러를 들어 성공 시켰다. 이것은 미국 달 탐사 관련 영화 ‘그레비티’보다 적은 비용으로 이루어낸 성과이며, 미국이 달 탐사선을 보낼 때 들었던 비용보다 약 9분의 1이 덜 들었다. 하지만 영국 외신에서는 "Country with huge poverty and economic slowdown, was this necessary?" 가난과 빈곤이 심각한 상황에서 굳이 필요했던 성과일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부정적인 측면으로 인도 달 탐사 성공을 언론에서 내비쳤다. 다소 인도를 무시하는 듯 한 영국 외신의 태도는 아직도 제국주의적 시각, 권위적인 시각, 그리고 인도를 ‘타자’의 나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온 태도이다.
- 현재 영국의 부는 모두 인도에게서 착취한 것들로 인한 것이다.
- 파키스탄과 분리 독립한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존재한다. 식민통치 기간이 아니었으면 한 나라였을 인도의 역사에 대해 아쉬움을 가지는 사람도 많다.
- 영국이 교통 인프라, 철도 등을 발전시켰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자금은 인도 국민들에게서 착취한 세금으로 이루어진 발전이다.
<문화적 영향>
- 크리켓 : 인도인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는 크리켓. 인도의 크고 작은 골목에서는 언제나 크리켓 경기를 벌이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볼 수 있다. 크리켓 경기장을 찾는 사람들과 중계방송을 시청하는 인구도 엄청나다. 크리켓은 19세기 후반에 인도를 통치하는 영국 지배자들에 의해 인도에 도입되었다. 이는 인도에서 영국 통치 영속을 추구하고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그 중 인도에서 가장 강조된 스포츠는 ‘신사들의 게임’이었던 크리켓이다. 18세기 초 영국 지배자들은 피지배자인 인도인에게 크리켓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크리켓은 오직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우수한 인종들(영국인)만 즐길 수 있는 스포츠라고 생각했긴 때문이다. 이후 식민통치가 확고해지고 본인들의 문화를 전파하는 전략을 펼치던 영국은 인도 상류층에게 이 게임을 개방하였다. 크리켓을 통해 페어플레이 정신, 스포츠맨십, 심판에 대한 복종을 가르치면서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확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의 한 예로 봄베이의 주지사 해리스는 나약하고 게으르고 무능한 인도인들을 크리켓을 통해 발전시키고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크리켓을 전파했다. 더불어 인도의 상류층들도 크리켓을 상류문화, 근대성의 표본이라 생각하며 크리켓을 적극적으로 배웠다. 재산가들의 지원을 받아 힌두교 크리켓 클럽을 창설하고 이후 크리켓 팀은 카스트와 지역, 종교를 따라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소규모 집단들도 팀을 창설하기 시작했다. 종교 집단들은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과시하기 위해 ‘파르시 클럽’과 같은 크리켓 팀을 만들었다.
1947년 영국이 물러난 이후에도 크리켓은 계속 남아 여전히 인도인들의 애정을 받고 있다. 이는 인도 정부가 다원사회의 분파적 요소와 국내의 다양한 집단을 결집하기 위한 수단으로 크리켓 경기를 장려한 덕분이기도 하다. 크리켓은 단순히 즐기는 스포츠의 의미를 넘어서 인도인들의 동질성과 연대감을 만드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는 영국보다 인도에서 크리켓 우승이 더 많으며 “영국이 우연히 발견한 인도의 게임”이라고 불리고 있다.
- 인도 차 : 18세기 중반 영국의 식민 통치 이후 홍차의 수요가 많았던 영국인들은 1820년대부터 동인도회사를 아쌈 지방 홍차 플랜테이션에서 시작했다. 1826년 동인도 회사는 당시까지 아쌈을 통치하던 아홈 왕조로부터 아쌈 통치권을 인수 받는다. 인도의 고전 문헌에 나타나는 차에 관련된 전통으로는 라마야나에 나와 있지만, 차를 약용으로 이용한 것 말고는 전통적으로 인도 사람들이 차를 즐겨 마시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아쌈 지역에 부족민들은 차를 즐겨마셨으며, 최초의 플랜테이션 형식으로 시작된 차 재배 지역 또한 아쌈의 ‘씽포’부족이 키워 마시던 품종이었다. 당시 영국이 아쌈 지역에서 홍차 플랜테이션을 했던 것은 중국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점차 플랜테이션 규모가 확대 되고 생산량이 늘어나자 본국과 다양한 서방국가의 백인들의 수요를 맞추기 힘들어졌다. 따라서 식민지에 사는 인도인(유색인)들에게도 차의 음용 즉 차 문화를 전파시킨 것이다. 식민 지배 초기에는 유럽인들 특히 영국인들과 상류계층에게만 국한된 사치품이었지만 점차 차가 대중화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차를 마시게 되었다. 차중에 상급품은 대부분 영국으로 반출되고, 질이 떨어지고 안 좋은 차 (브로큰 티 : 온전한 찻잎이 아니라 찻잎이 부서진 것)이 주로 인도인들이 마시는 차가 되었다. 마시는 방법 또한 영국식 밀크티의 영향을 받았지만 인도에서는 우유와 설탕을 듬뿍 넣고 향신료까지 첨가하는 토착화가 이루어졌다. 이것이 ‘짜이’라고 하는 대중적이고 인도적인 차로 지금까지 국민들과 세계인에게도 사랑을 받는 차로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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