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활동보고서 - 인도남아시아트랙] 러르끼양팀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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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7-07-13 11:55 | Read | 3,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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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pth Research Project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던가. 한국과 인도의 인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가야시대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 공주의 결혼으로 사돈지간의 연 맺음이 첫 시작이었다. 하지만 사돈지간간의 무슨 연이라도 있었던지 식민지배라는 아픈 기억을 공유하게 되고, 나아가 같은 날 독립기념일을 맞이했다. 아픈 경험을 함께 한 지금, 우리는 식민지 잔재문화들에 골머리를 썩고 있기도 하다. 한국은 식민지 잔재 중 하나인 일본어 단어사용을 줄이기 위해 여러 노력을 쏟고 있다. 그렇지만 식민지를 통해 식민국가에게만 문화가 남겨진 것은 아니었다. 지배국 또한 자신에게 맞는 문화를 피지배국으로부터 차용해 자신들의 국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현재 자신들의 문화인 마냥 향유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와 같은 경험을 한 인도도 다르지 않다. 지금은 인도의 국민스포츠로 굳어진 크리켓은 사실 영국이 전파한 스포츠였다. 그리고 영국의 커리를 향한 사랑은 인도의 커리를 차용해 간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에 영감을 얻어 좀 더 깊숙이 그 내면을 파헤치고자 한다.
그렇게 우리의 주제는 서로의 식민지시절을 통해 파생된 문화 혹은 잔재들로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나아가 식민지 잔재에 대한 각국의 인식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식민시대,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반감과 같은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도는 식민시대와 영국에 대해 많은 인도인들이 한국인들만큼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신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 이유와 인도, 한국인들의 사상과 인식에 대한 차이점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어 보겠다. 주요 토픽으로는 인도의 짜이, 카디, 크리켓, 교육, 영어 그리고 영국의 커리, 티타임 외에도 한국의 일본어 사용, 일본의 전범기, 벚꽃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토픽을 선정했다. 그리고 각각의 토픽에 관련된 사람들의 인식에 관해 토론하려 한다.
1. 식민지 배경 및 인물&주요사상
(1) 식민지 배경
일본은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본격화했다. 1905년 11월에는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으며, 조선 왕조 519년, 대한 제국 성립 14년 만에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10년 일본에게 나라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뒤, 우리 민족은 가혹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인도는 1526년 성립된 무굴제국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1857년 멸망하였다. 이후 동인도회사로 인도에 진출해있던 영국은 콜카타(캘커타), 뭄바이(봄베이) 등에 거점을 두고 본격적으로 인도의 식민지화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이와 같이 한국과 인도는 각각 일본과 영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권력 아래 식민지 시대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은 무단통치라는 철저한 정책 아래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본권을 철저히 제한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했으며, 19세기 중반 영국은 인도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며 영국우월주의 아래에 완전한 식민지 작업에 착수하며 영국의 지배가 노골화될수록 반영항쟁은 격해졌다. 이에 맞서 두 나라의 국민들은 독립을 향한 목소리를 키워나갔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며 모든 계층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독립 운동이었으며 독립에 대한 우리 민족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인도 또한 세포이 항쟁 등으로 영국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표출했다. 하지만 인도는 무굴제국의 황제는 이미 황제로서 역할을 상실한 상태였고 민중항쟁을 하나의 힘으로 결집시킬 힘이 없었다. 또한 여러 종교와 신분, 그리고 지역적 차이 때문에 통일된 항쟁의 효과를 이루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지속적 저항을 전제로 하는 최종적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인도의 세포이항쟁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종교적 자유의 보장과 함께 비인격적인 식민지 정책은 부분적으로 완화되었지만 영국정부에 의한 인도의 직접통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3·1운동은 일본의 통치형태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을 달래려는 문화통치를 실시했으며 회사령을 폐지하고 헌병 경찰제에서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다. 교육의 기회를 확대한다고 발표했고, 한글로 된 신문의 간행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는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더 교묘한 방법으로 탄압하려는 속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인도와 한국은 독립을 향한 목소리를 높이는 시도가 있어왔지만 결국 더욱 치밀해지고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어버린 아픈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2) 중심인물
한국과 인도의 독립을 위한 움직임은 계속되어갔으며 특히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정치가들이 앞장서서 독립을 이끌어나갔다. 그중에서도 대표적 인물은 백범 김구 선생과 마하트마 간디는 조국의 독립운동의 중심에 선 인물이며 국민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로서 존재했다. 두 위인은 나라의 독립운동을 앞장서서 실행했다는 점 이외에도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1. 마하트마 간디
우선 일반적으로 간디를 가리켜, 흔히 마하트마 간디라고 부른다. 남아프리카에서 20년 동안이나 인도 사람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운 간디는, 인도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을 이끌어 나간다. 독립운동의 중심을 이루었던 간디의 사상은 ‘실천·비폭력·불복종’으로 집약된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진리파악), 브라흐마차랴(자기정화), 아힌사(무상해)의 3가지를 내세우고, 나아가 이것에 스와라지(swaraj:자치)를 결부시켜 비폭력·비협력의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베옷을 입고 염소젖을 마시며, 직접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천을 짜면서 민중을 지도한 간디의 모습은 이와 같은 독특한 사상의 실천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비폭력주의는 부정·압제·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저항하는 사상으로 평화주의의 한 형태이다. 간디는 이 사상에 깊이 공명하여 아힌사를 바탕으로 하는 사티아그라하 운동(비폭력저항투쟁)을 전개하였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독립하지만, 간디가 그토록 열망하던 종교를 뛰어넘는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키스탄이 이슬람 국가로 분리 독립한 것이다. 간디의 나이는 78세였으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동이 가장 격화되어 있던 벵갈에서 힌두·이슬람의 융화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카스트를 부정하고 이슬람교를 인정하는 간디가 힌두교 극우주의자들에게는 적의 대상이었으며, 1월 30일 반 이슬람 극우파인 한 청년의 흉탄에 쓰러졌다.
2. 백범 김구
김구는 평생 동안 민족과 나라를 위해 살았다. 청년 시절에는 동학 농민 운동, 장년 시절에는 독립운동, 말년에는 통일 운동에 힘을 쏟았다. 이 때문에 그를 ‘영원한 민족 지도자’ 또는 ‘민족의 스승’이라고 부른다. 3 · 1 운동 직후에는 중국의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주로 임시 정부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9년에는 임시 정부의 우두머리인 주석으로 취임했고, 해방이 될 때까지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1900년부터는 일제에 맞설 힘을 키우기 위한 애국 계몽 운동에 뛰어들었다. 아동과 청소년들을 가르치다 비밀 조직인 신민회의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했고, 일제의 신민회 탄압 때 붙잡혀 다시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김구는 소련과 미국이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합의한 신탁 통치 결정에 반대하며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김구는 남한 단독 정부를 세우는 것에 반대해 남북통일 정부를 세우도록 남북 협상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통일 정부를 세우려는 그의 노력은 끝내 실패했고, 남북한에는 각각 단독 정부가 들어서고 말았다. 하지만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말았고, 1948년에는 남한에서 선거가 치러져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 뒤 계속 통일 운동을 펼치던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한국의 김구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죽음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불복종운동, 비폭력저항운동, 계몽운동 등 다양한 노력들을 시도했다. 그리고 나라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힘썼지만 결국에 두 나라는 각각 인도와 파키스탄,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렇게 인도와 조선의 식민지시대 속 민족운동의 성격, 정치가로서의 간디와 김구의 위치 등이 과연 동일하였는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지만, 피식민지로서 같은 처지에 놓여있던 두 나라가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싸워왔으며 그 과정 속 수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2. 분리 독립 배경
(1) 인도 분리 독립
11세기 초부터 시작된 이슬람의 인도 침입과 통치는 약 800년가량 지속되었지만 이슬람 지배층들은 다수 힌두들과 큰 갈등 없이 함께 살았다. 힌두와 이슬람 간에 틈이 생긴 것은 영국이 나타난 이후였다. 19세기 후반 인도 독립을 위해 많은 정치단체가 생겨났으며 그 가운데 1885년 결성된 ‘인도국민회의’가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영국에 대항하여 불매운동 및 스와데시(Swadeshi:국산품 사용을 뜻하는 운동으로, 힌디어로는 모국을 의미한다) 운동이 전 인도로 파급되었다. 영국은 강도를 더해가는 국민회의의 대항카드로 이슬람 연맹을 선택했다. 무슬림과 힌두 간 인도의 분열은 영국에게 이익으로 작용했기에 이에 대해 영국은 분할 통치 정책을 취해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간 대립을 조장하였으며 편향된 지원정책을 폈다. 그리고 1906년에는 인도국민회의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영국의 배후 지원을 받은 무슬림연맹(Muslim league)이 발족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국민회의는 마하트마 간디의 지도하에 영국이 제시한 자치령 지위를 거부하는 등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많은 인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비폭력·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반해 회교도연맹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은 인도의 독립과 권력이양을 약속하였다지만 결국 반영운동을 주도하던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간의 합의가 실패로 끝나고 대규모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키기로 결정하고,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인도국민회의가 이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영국연방 자치령으로 독립하였다.
독립 전부터 파키스탄과는 종교적, 영토적 분쟁 등으로 3차례 전쟁을 치르고, 이제는 완전한 각각의 독립국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힌두와 무슬림 간의 분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카슈미르 지역을 두고 대립에 계속되고 있으며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도 파키스탄도 아닌 하나의 독립국으로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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