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cality Challenge

해외탐사 프로그램 ‘Locality Challenge’

백문불여일견이라는 말, 알고 계십니까? ‘Locality Challenge’는 자신이 공부하는 지역을 직접 탐사하는 해외탐사 프로그램입니다.

참여하는 학생들은 탐사지역에 관해 인문·지역학적 탐구과정을 실시해 계획을 수립·발전시키고, 각 지역의 지역학적 효용가치를 재발견하며 도전정신을 배양하게 됩니다.

‘Locality Challenge’를 통해 학생들은 인터넷과 책에서만 보던 지역을 눈으로 직접 보고 피부로 느낄 수 있으며, 광역특화전공 내 4가지 트랙의 오지성 지역을 팀원들과 함께 구석구석 탐사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됩니다.

Title [2기] [인도 남아시아] - 인도탐정단 팀
Writer 로컬리티센터 Date 16-03-29 10:03 Read 2,922

본문

탐사테마

인도의 전통섬유, 카디

바야흐로 2015년 여름 한국은 린넨 스타일 옷이 유행했습니다. 사실, 매년 여름 한국에서 히트치는 스타일입니다. 얇은 면으로 된 옷들 말이죠. 같은 2015년, 거의 모든 대외적인 자리에서 면 옷을 고집한 이가 또 있으니, 바로 인도의 모디 총리입니다. 재작년 인도 총리로 당선된 나렌드라 모디는 당선 이후 각종 공식적인 자리에서 정장이 아닌 면 웃옷, 면바지, 면 조끼 등으로 완벽한 면 스타일을 소화해왔습니다. 그렇다고 모디 총리가 한국 스타일을 알았을 리는 만무합니다. 적어도 한국과 인도는 4,657km나 떨어진, 문화 사회 역사 등 아주 모든 면에서 다른 국가니까요.

인도는 면 옷감에 있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나라입니다. 인도의 섬유 사업은 인도 경제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핵심 주축 산업으로 총 산업 생산의 20%, 고용의 25% (제조업 고용 1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면입니다. 대외적으로도 면 수출 세계 2위로(약 20%) 면화 생산 대국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감안한다면 모디 총리의 면 사랑이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면 사업은 자국 경제의 주축이자 세계적 선도 분야이니까요.

그런데 면이라고 다 같은 면이 아닌 가 봅니다. 모디 총리가 입은 면 옷은 ‘카디(Khadi)’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카디 의상은 모디뿐만 아니라 총리를 비롯한 인도의 정치가 등 대내외적인 인물들 사이에서 이상하리만큼 고집되고 있습니다. 또한 섬유강국인 인도의 내수시장에서 아주 비중 있게 나타나며, 다른 직물에 비해 비싼 가격임에도 월등히 높은 매출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면화 대국 인도에서 과연 카디는 정확히 무엇이며, 다른 일반적인 면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특별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지, 인도의 정상급 사람들이 그토록 카디를 고집하는 이유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내수시장에서도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비중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지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또한 카디 그 자체와 더불어 카디의 역사적의미를 탐구한다면 인도의 사회문화와 인도 정신에 대한 연구로 확장되어 심도 있는 탐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저희 팀은 ‘인도의 전통섬유, 카디’라는 테마로 카디의 역사와 카디의 제작과정, 유통, 소비를 알아보고 인도인들에게 이 카디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 알아보고자, 그리고 이를 통해 인도사회, 인도 정신에 대한 연구까지 확장시킬 수 있기를 기대하며 위와 같은 테마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탐사목표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대외적으로 보여 지는 인물들, 특히 국가의 일에 참여하는 이들은 대부분 카디옷감을 사용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또한 영국 식민지배이래 그리고 그 후 부터 현대까지, 대부분의 인도 남성들은 서구식 복장을 착용했지만 특이하게 카디 옷감은 서구식 옷이 아닌 전통 옷에 훨씬 많은 비중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격도 매우 비싼 편으로 일반 대중이나 하층민들이 사기엔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을 자랑합니다. 또한 70년대 이후 실크나 나일론이 시장에서 강세였음에도 카디는 일반 면직물임에도 불구, 중상계급이상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이 옷감이 가진 남다른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과연 카디란 무엇인지, 카디의 역사적 의미를 밝힌 후 제작 유통 소비를 알아보고 인도의 사회문화 그리고 나아가 정신성까지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려 합니다.

카디는 독립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저희 팀은 카디와 인도 독립의 아버지 간디에 관련된 역사를 우선적으로 살핀 후 탐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지역 델리에서는 우선, 델리 대학교에서 카디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후 간디박물관을 견학하고, 카디란 무엇인지, 간디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역사적의미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지역 바라나시에서는 직접 일반 옷감 매장들과 카디 전문 매장들을 방문하고 카디와 다른 직물과의 질과 가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바라나시에서 일반 면과 카디의 비교 인식조사도 함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지역 라자스탄의 자이뿌르에서는 보다 깊이 있는 탐사를 위해 00대학교 패션학과 교수와의 카디에 대한 면담을 예정중입니다. 그리고 카디 생산지를 직접 방문하여 카디 제작 과정을 접해보고 인도에서 카디 산업을 주관 하고 있는 KVIC에서 어떤 기준으로 품질을 구분하고 있는지, 품질이 보증된 카디의 유통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폭 넓게 이해하려 합니다. 마지막 다시 델리로 돌아온 후에는 카디의 제작, 품질, 유통 이후 보증된 카디를 전문적으로 파는 매장과, 매장의 소비층을 조사하며 생산에서 소비까지의 전 과정을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전체적인 과정을 통해 저희는 카디와, 카디의 역사, 제작-유통-소비에 이르는 과정, 인도에서 카디의 의미를 심도 깊게 이해하고, 나아가 인도의 사회문화와 그들의 정신 또한 그 맥락 속에서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리라 기대합니다.

 

 

탐사내용​

 

# 여대생의 프롤로그

 

 

  눈을 감고, 각 국 정상들이 모인 회담을 생각해 봅시다. 날카로운 눈매의 보좌관과 쉴 새 없이 통역하고 있는 통역사들, 여유가 넘치는 회담이지만 회의장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자 계속 상상해봅시다. 각 국 정상들은 머리부터 발 끝 까지 아주 잘 차려입었습니다. 저토록 세련된 정장이라니요. 역시 대외적인 자리엔 모두가 정장...? 어 잠시만요, 인도 총리는 정장 안 입고 뭐하세요?!   

 

  

사진1,2,3)대외적 자리에서 혼자 면 옷을 입고 있는 현 인도 총리 나렌드라 모디

모디 총리는 재작년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 줄곧 면 스타일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왜 공식적인자리에서 혼자 정장 대신 구김 잘 가는 면 옷을 입을까요? 그가 입은 옷엔 특별한 이름이 있습니다. 대부분 단순한 면이 아니라 ‘카디’랍니다. 총리뿐만 아니라 연예인, 국회위원 등도, 또한 중상층 계급이상에서 굉장히 선호하는 이 카디는 사실 인도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요. 때문에 면화대국 인도에서도 비싼 값이지만 높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인도 경제의 주축 면 사업, 그중에서도 인도인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이 카디라는 옷감이 슬슬 궁금해지는걸요. 인도의 섬유, 카디를 찾으러 떠나볼까요?

 

 

1 일 차

탐사의 시작, 경유지 홍콩으로!

- INCHEON AIRPORT IN KOREA

여대생은 원래 아침잠이 많다. 평소 같으면 눈도 뜨지 않았을 새벽4시, 세 명의 여대생은 거대한 배낭 덩이를 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인천 국제공항. 사실 오늘은 약 2주간 이루어질 인도 탐사의 시작 날이다. 절친 지현이, 승희, 인혜는 혹시나 테러가 나지 않을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인천 국제공항에 모였다. 인도를 사랑하는 세 명의 여대생은 ‘카디’를 탐사하기 위해 바로 오늘, 출국한다. 공항에는 번쩍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하늘거리는 원피스에 또각 구두를 신고 다니는 여행객이 잔뜩이었다. 정말 소개팅 날이 따로 없었다. 커다란 배낭, 무채색 옷에 끈을 동여맨 낡은 운동화, 꾀죄죄한 배낭과 겉옷으로 무장한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청춘! 얼굴은 사과마냥 발그스레 상기되어 있었고, 심장은 힘차게 펌프질하고 있었다. 차림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예쁘니까 청춘이다.

우리의 비행기는 오전 10시 출발, 약 4시간을 날아 경유지인 홍콩에 떨어지는 OZ732호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인천공항에 새하얀 눈이 조용히 흩날리고 있었다. 밤까지 새워가며 열띤 계획을 세우던 일들이 눈발과 함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탐사를 무사히 진행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반, 친구들과 함께한다는 설렘 반으로 4간여의 시간 끝에 무사히 홍콩 공항에 도착했다. 예쁜 승무원 언니들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 게이트를 나서는 순간, 중국과는 다른 묘한 대륙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홍콩의 티머니 Octopus Card

홍콩에서는 ‘옥토퍼스 카드(Octopus Card)’라는 카드를 교통카드로 사용한다. 우리나라의 티머니 카드와 비슷한 개념의 이 카드는 공항을 포함한 역 내에 설치된 기계로 충전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뿐만 아니라 제휴된 여러 상점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카드였다. 물론 어벙한 외국인인 우리는 이 카드를 그렇게 다양하게 활용해 보지는 못했다. 카드를 발급받으러 갔을 땐, 벌써 상당히 많은 여행객들이 뱀 마냥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해당 직원인 것 같은, 아주 인자하게 생긴 할아버지가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건네셨다. “What kind of card do you want to make?” 홍콩식 영어와 함께 우리에게 보여 주신 작은 종이에는 여행자들이 어떤 카드를 만들 수 있는지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옥토퍼스 카드’가 쓰여 있지 않아서 매우 당황스러웠다. 다메, 우리는 자랑스러운 외대인이니까! “We just want to make Octopus Card.” 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할아버지께서는 맨 아래 항목을 짚어 주셨다. “How many?” “Three cards.” “Got it”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순식간에 우리 뒷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러 넘어가셨다. 혀를 좀 굴리니까 점점 외국에 떨어진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공항 밖을 나서자 피곤이 잔뜩 묻어 꼬질꼬질해진 서로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친구들, 한국에서는 참 예쁘고 깔끔한 여대생이었는데……(웃음). 세 명의 친구들은 그대로 첫 숙소로 직행했다. 졸음엔 장사 없다더니, 홍콩을 즐길 새도 없이 센터에 상황보고 후 숙소에서 그대로 꿈나라에 빠져버린 우리였다.

2 일 차

경유지, 그 찰나의 즐거움

- IN HONGKONG (2016년 1월 16일 ~ 2016년 1월 17일)

내일 인도로 출발하기 때문에 힘을 아낄 겸 우리는 오후가 되어서야 숙소 밖으로 나왔다. 홍콩은 길거리는 열대 지방에서나 자랄 것 같은 야자수 나무들로 이국적이고, 하늘은 흐린 듯 파랬다. 여행의 묘미는 그 지역의 음식을 맛보는 데에 있다. 그리고 사실 ‘음식’은 여행에 있어서, 특히 여대생들의 여행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 숙소는 그 모든 먹거리와 근접해 있었다.

홍콩 딤섬 가게가 처음인 우리는 맛있어 보이는 딤섬을 몽땅 주문해 버렸다. 직원이 뭔가 수상한 눈빛으로 우릴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메뉴가 하나 둘 나올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하며 순식간에 먹어 치우기를 여러 번,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시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가게의 그 누구도 우리만큼 많은 메뉴를 시켜서 먹지는 않았던 것이다. 배가 부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문한 메뉴가 반밖에 나오지 않음을 깨달은 우리는 고작 한 접시에 두세 개 나오는 딤섬이 생각보다 배가 부른 음식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뭐, 먹긴 다 먹었다. 여대생은 원래 식사량이 많다. 이후 우리는 홍콩의 명물이라는 에그 타르트도 찾을 겸 번쩍거리는 거리를 즐기러 나섰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콩의 명물은 생각보다 매우 별로였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맛을 가진 에그 타르트를 한 입씩 물고 우리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서로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계란 맛이 나지만 굳이 홍콩에서 찾아 먹을 만한 맛은 아니다. 에그 타르트를 드시려거든 파X 바게트 에그 타르트를 드세요.

밤거리를 구경하는 낭만파 여대생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알록달록 다양한 무늬의 트램(tram)이었다. 기차도 아니고, 버스도 아니고, 지하철은 더더욱 아닌 것이 정해진 선로 위를 달리는데 알록달록, 심지어 몽땅 2층짜리다. 목적지도 명확히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마음에 드는 트램에 올라탔다. 내일은 진짜 인도로 가는 날이니까, 이 순간만큼은 홍콩을 날 것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안개비가 방울이 되어 맺힌 창문을 통해 색색들이 불빛이 번지듯이 비춰졌다. 트램은 번화가를 떠나 또 다시 번화가로, 간간히 정해진 정류소에 멈추면서 사람들을 배웅하고 또 맞이했다. 홍콩의 움직이는 야경은 정말 최고였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다시 방전이 되어 그대로 뻗어 버렸다. 그리고 딤섬이 잘못된 것인지, 단순히 물이 안 맞아서 그랬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혜는 밤새 배탈을 앓았다. 인도에서 겪을 모든 아픔의 징조였을까.. 경유지에서의 파란만장하다면 파란만장했던 길고 긴 하루가 꼴딱 저물어갔다.

3 일 차

인도와의 첫 만남

- IN DELHI (델리, 2016년 1월 18일 ~ 2016년 1월 21일)

아침이 다 지나가기 전에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무작정 돌아다녔던 전날의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힘내라 우리 존재, 이제 정말로 인도로 갈 시간이 되었다. 운동화 끈 바짝 조이고 홍콩국제공항으로 출발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공항에서 홍콩식 샌드위치에 도전했고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세계인의 공통입맛 맥도날드 햄버거를 털어 넣고 인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시크교 아저씨들과 이마에 빨간 점을 찍은 언니들이 힌디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인도 승무원들은 우리나라와 달리 남성이 대부분이었는데, 친절하면서도 굉장히 딱딱한 선생님 같았다. 오렌지 쥬스가 생각보다 너무 달아 남기자 승무원 아저씨가 혼냈다. 기내식으로는 커리가 나왔고 꾸릿한 냄새를 맡자마자 진짜 인도임을 실감한 우리였다. 7시간의 비행 후 드디어 착륙하나 했더니 기체가 쿠쿠쿵쾅왕콰앙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아직 안돼요. 다행히 몇 번의 굉음 끝에 무사히 착륙했다. 아직도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탁한 냄새, 꾸릿한 냄새가 강렬하게 전해왔다. (설렘)

인크레더블 인디아!

지현이는 인도에 두 번째 와 보는 것이지만, 인혜와 승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홍콩보다 배로 무섭고 까다로운 입국 심사를 거쳤다. 이국적이게 생긴 사람들이 온 공항에 가득했다. 밖으로 나서자, 꿈인 줄 알았다. 일단 인도 공기는 좋지 않다. 정말, 정말로 좋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나 미세먼지 걱정을 하지, 인도는 미세먼지가 문제인 나라가 아니다. 왜냐고? 먼지가 눈에 보이니까! 미세하지 않은 먼지부터가 너무 많다. 뿌연 먼지 사이로 수많은 시선들이 우리에게 꽂혔다. 머리털 나고 처음 받는 스포트라이트다. 어쩌지 당황하면서도 최대한 얼굴에 힘을 주고 예쁜 표정을 짓는 우리였다. “여기 사람들은 원래 외국인을 보면 이렇게 대놓고 쳐다봐. 아마 내일이면 익숙해질걸?” 먼저 인도에 다녀왔던 지현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모든 눈동자가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검은 피부에 하얀 눈동자가 유독 도드라져보였다. 이상하게도 눈이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점점 연예인 병에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눈 마주치면 웃어 줄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지만, 여기서 낯선 사람, 특히 남자에게 함부로 웃어 주지 말라는 조언대로 꾹 참았다. 한쪽에선 택시 기사들이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잠시만, 상황을 보니 우리도 타겟인 듯 싶다. 첫날부터 사기를 당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돈을 주고 택시 중개소를 통해 택시를 잡았는데,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기사들 사이에 다시 데려가더니 기사에게 돈을 받고 우리를 넘겨주었다. 여러분은 지금 중간상인이 폭리를 취하는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숙소를 향해 출발한 시각은 대략 6시 퇴근 러시아워와 맞물렸다. 한국 못지않게 차가 밀렸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인도에는 도로에 차가 막히는 것이 아니라 소가 막힌다. 거리에 소가 차만큼이나 있다니. 소 뿐 아니라 차창 너머로는 말, 염소 등의 동물들이 심심치 않게 지나갔다. 떠돌이 개들은 사람만큼 많았다. 듬성듬성 털이 빠진 못난이 병쟁이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똥개를 보았을 때처럼 ‘저 멍멍이 귀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동물들이 모두 비쩍 말라 있어서 안쓰러웠지만, 길에서 사람 손 타지 않고 자란 야생동물이 분명하기에 가까이 다가 갈 순 없었다. 우리의 기사아저씨는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달팽이 마냥 느릿느릿, 그러다가도 경적이 빵!! 우리는 반어법을 중학교 때 배웠다. 그런데 아저씨, 당최 중앙선이 어디인가요.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손에 들고 있는 가방 끈을 안전벨트 대신 꼭 잡았다. 비행기서부터 이 한 몸 건사하는 것이 꽤 어렵구나를 깨닫게 된 세 명의 여대생이었다.

다행히 사고 없이 첫 숙소에 도착했다. 아직 인도에 적응하지 못한 인혜와 승희는 이제야 굳은 어깨를 내리고 편하게 숨쉬기 시작했다. 공항을 나온 지 대략 두시간만이었다. 너무 어두워져 기본적 물품 구입은 내일로 미뤘다. 온 마음을 다하여 전합니다. 로컬리티 사업단은 인도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학생끼리 인도를 보내시면 안 됩니다. 지금이야 담담하게 써내려가지만, 인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인도와의 강렬했던 첫 만남을 잊을 수 없다. 숙소 주인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를 예약한 방으로 안내했다. 간단히 옷을 갈아입고 바로 앞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는데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아직은 인도가 불편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아저씨가 인도 여행 중 지역이동이 있다면 기차나 택시를 예약해 주겠다며 필요하냐고 물어왔다.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간단한 짐정리 후 개운하게 몸을 씻고 코를 푸는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까매도 너무 까만 콧물이라니요. 그렇다. 인도의 어마어마한 먼지들이 다 우리 셋의 콧속으로 들어온 것이겠다.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무사하다며 사업단에 보고하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탐사일정을 다시 한 번 점검하며 인도에서의 첫날밤을 마무리했다. 

          

4 일 차

본격적인 탐사의 시작!

- IN DELHI (델리, 2016년 1월 18일 ~ 2016년 1월 21일)

NO PROBLEM ? NO, PROBLEM!

인도 시각은 한국보다 3시간이 느렸기 때문에 왜인지 3시간을 번 느낌이었다. 실컷 잤는데도 아직 오전 7시, 모두 꾸물꾸물 일어나 오전 9시에 숙소를 나섰다. 먼저 유심과 기차, 숙소 예매를 하고 우리의 첫 목적지 Delhi University로 향하기로 했다. 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릭샤 (인도의 주요 교통수단, 오토바이를 개조한 오토릭샤와 자전거 뒤에 수레를 실은 사이클릭샤가 있다)왈라 들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외국인임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우리를 발견하고 4-5미터 떨어진 오토 릭샤와 사이클 릭샤 십 여 개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기사는 목청껏 “마담! 웨얼 알류 고잉!!!”을 외쳐대고 있었다. 빵빵 왁자지껄 우당탕탕 삐-익 도로는 아수라장 무법천지였다. 전공시간에 수도 없이 배우고, 공부했지만 도착한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인도는 여전히 낯설었다. 이 나라에서 탐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역시나 첫 계획이었던 유심가게에서 바로 퇴짜를 맞았다. 유심 물량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인도 여행사에서는 유심이 없으면 기차도 숙소도 예약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몇 번이나 확인하고 no problem! (문제없어)라는 말만 믿고 갔다가 이런 불상사가 생기고 말했다. 여대생의 인도 여행 팁! 인도에서 노프라블럼은 no problem이 아니다. 인도 여행 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no, problem (안 돼, 문제야)로 알아듣길 바란다. (제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난항을 겪은 우리는 인도의 매연과 자동차, 사람, 동물들이 한데 섞여 혼을 쏙 빼 놓는 복잡한 거리 속에서 순식간에 지쳐 버렸다. 아무래도 뱃속에 뭘 좀 넣을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지현이가 맛있는 힘을 내자며 탄두리 치킨 집으로 안내했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그 탄두리 치킨 집이 문을 열지 않았다. 결국 그 옆에 있는 로컬 푸드 음식점으로 들어가 버터치킨 커리와 난, 치킨, 감자튀김을 시켰다. 걸신이라도 들린 양 서로 대화도 하지 않고 음식들을 흡입했다.

DELHI UNIVERSITY INTERVIEW

몸과 마음을 재정비한 우리는 탐사의 첫 단추를 꿸 Delhi University로 향했다. 큰 규모의 종합 대학인 델리 대학교는 단과대별로 캠퍼스가 분리되어 있었고, 분리된 캠퍼스들이 거리를 따라 쭉 늘어서 있는 형태여서 모든 캠퍼스를 다 돌아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현이가 잘 아는 예술 대학 캠퍼스(Kala College. 릭샤를 타고서는 Kala college가 아니라 경영 대학 캠퍼스인 Shriram college 라고 했는데, 릭샤왈라들이 예술 대학 캠퍼스로 가 달라고 하면 못 알아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카디에 대한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지나가는 학생들은 같은 나이 또래 들인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었고 우리는 웃으면서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카디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틀었다. 관심을 갖고 다가온 이들에 정 없이 뜬금없게 카디만 물어보고 헤어지긴 싫었다. 찌니(중국인)? 재빤? 네힝 꼬리아!로 이어지는 대화는 한국이라는 나라, 인도 대학생, 인도 대학생의 패션 스타일로 이어졌다. 그리고 전통 옷과 서양식 옷 그리고 혹시 카디라는 옷감을 알고 있는지 까지 마치 오래 알았던 친구인 냥 재밌게 이야기를 나눴다. 서툴지만 영어와 힌디를 섞어서 말이다. 델리 대학교 친구들은 하나같이 근처에 카디로 유명한 매장이 있다고 말하며 꼭 한번 가보라고 했다. 같이 가주겠다는 잘생긴 남자 무리들이 있었지만, 남자는 다 늑대가 아니던가? 여자만 세 명인 우리는 정중히 거절하고 내일 가보겠다며 헤어졌다.

**남자 7명 여자 6명 총 13명의 델리대학교 학생과의 인터뷰

Q. 카디에 대해 알고 있는지

Q. 카디는 간단히 무엇인지

Q. 델리 안에서 카디와 관련된 장소로 추천해줄 곳이 있는지

13명 모두 카디를 알고 있었으며, 카디는 기본적으로 손으로 직접 짠 옷감으로,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직물이라는 비슷한 답변을 하였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계로 공장에서 엄청난 양을 찍어내는 자본주의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 델리 근처 코넛 플레이스라는 곳에 위치한 카디 매장을 꼭 가보라며 추천해줌.

물갈이냐 알루버거냐 그것이 문제로다!

델리대 캠퍼스 입구에는 가난한 대학생들을 위한 소위 ‘길거리 음식’ 판매 노점이 있었다. 물론 인도에서 그런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저는 물갈이와 장염에 걸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세균님들 제 뱃속으로 들어오세요.”와 같다는 것,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인도에 다녀온 수많은 인도학과 선배들, 동기들이 학교 정문 앞 ‘알루버거’가 정말 맛있다고, 그렇게 추천했는데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알루(Aloo)’는 힌디로 감자를 뜻하고, 알루버거는 빵 사이에 고기 패티 대신 넓적한 감자튀김 패티를 넣은 햄버거다. 이미 예전에 알루버거 맛을 본 지현이는 상인을 찾아 저만치에서 두리번거렸다. 물갈이도 물갈이지만 먹어 보라고 한 것은 먹어 줘야 예의니까. 득달같이 달려가 통 크게 한 사람당 한 개씩 주문했다. 2주 이상 머무를 거 어차피할 물갈이는 빨리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욕망의 여대생들이었다. 이상한 것이, 노점 옆에서 건장한 사내가 흙먼지가 가뜩 낀 보도블럭에 쇳덩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어쨌든, 알루버거 할아버지는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긴 커다란 팬에 기름을 붓고, 버거를 만들 감자 패티를 튀기기 시작하셨다. 튀김옷이 바삭바삭 튀겨지는 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기름기 가득한 빵 사이에 감자 패티, 양파, 토마토, 인도식 향신료 몇 가지가 들어가자 순식간에 알루버거가 완성되었다. 물갈이 까짓 거 먹으리라 다짐했으면서도 인도 향신료가 조금 센 것 같고 색깔도 시커먼 초록색이라 망설여졌다. 용기를 내어 알루버거를 크게 한 입 물었는데, 어머나 판타스틱.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있던 가? 진짜, 정말, 매우 맛있었다. 맵고 자극적이긴 했지만 그 맛이 단연 일품이었다. 너무 맛있다며 웃으며 뒤를 도는 순간 건장한 사내가 흙바닥에 문지르던 쇳덩이를 휴지로 쓱 닦고 감자에 갖다 대고 있었다. 그건 조리용 칼이었고, 칼을 땅바닥에 갈고 있던 것이다. 알루버거만 먹은 것이 아니라 병균까지 같이 먹었구나. 속이 참 든든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지화 되고 있었다. 진정한 인도 여행자가 된 기분으로 오늘 내내 수소문해 알게 된 한국인 가게에 유심을 구입하러 갔다. 몇 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드디어 유심을 살 수 있었다. 내일부터는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며 편하게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한층 더 스마트해진 우리는 큰길로 나가 숙소로 가기위해 릭샤를 잡았다. 분명히 20루피면 가는 걸 알고 있는데 릭샤 아저씨들이 자꾸 40루피를 불렀다. 다른 릭샤 아저씨들도 마찬가지였다. 약 스무 대의 릭샤왈라들이 담합해서 같은 가격을 부르는데, 그래도 우리는 굴하지 않고 네힝, 비쓰!(아냐 20!)를 연신 외쳐댔다. 경매의 열기가 더해갈 쯤 저 멀리서 비쓰!(20!)라는 소리가 들렸다. 한 아저씨가 릭샤 연맹을 배신하고 20루피를 챙겼다. 우리는 의기양양한 미소로 그 릭샤에 입성했다. 그렇다, 여대생들은 4일 차에 인도에 완벽히 적응했다. 숙소에 들어가 센터에 보고하고 오늘의 영수증을 정리한 후, 내일 탐사에 대한 짤막한 회의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5 일 차

카디를 만나다

- IN DELHI (델리, 2016년 1월 18일 ~ 2016년 1월 21일)

유쾌 상쾌 합승객 아저씨

아침 일찍 일어나 늘어지는 몸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카디를 직접 보러가는 날이다. 어제 델리대학교 친구들이 추천해 준 Khadi Gramodyog Bhavan가 오늘의 행선지다. 여전히 먼지와 소음 가득한 거리를 걸어 우리는 오늘도 릭샤를 잡았다. 우선 Khadi Gramodyog Bhavan 탐사 이전에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고 지역이동 기차를 예매해야 했다. “빠하르 간즈 메인 바자르요!”하자 얌전한 얼굴의 릭샤왈라 아저씨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덜컹거리며 순조롭게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누군가 릭샤 안으로 뛰어들 듯이 합승했다. 당황한 우리가 멀뚱히 쳐다보자 세상만사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합승객이 생기발랄하게 이것저것 말을 붙인다. (인도에서는 릭샤 남는 자리에 합승하는 일이 종종 있다) 흔들리는 릭샤 안에서 영어와 힌디를 섞어가며 대화하던 우리는 그 사람이 자이뿌르 출신이라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어서, 자이뿌르는 우리 카디 탐사지역이기도 하겠다, 내친 김에 카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간단하게 물어보았다. 카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카디가 유명한가, 종류는 많은가, 옷의 품질은 어떠한 가 등등 짧고 간단하게 질문을 했다. 합승객 아저씨도 유쾌하게 하나하나 다 대답을 해 주었는데, 카메라 영상으로 남겨도 되냐고 묻자 언제든 오케이라며 이런 관심과 질문이 나쁘지 않은 듯 농담까지 섞어가면서 신나고 성실하게 답변해 주었다. 정말 유쾌한 아저씨였다. 인터뷰를 따는 동안 릭샤 기사 아저씨는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게 웃는다. 카메라에 작게나마 나오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든 것이 확실했다. 유쾌 상쾌 아저씨는 카디는 간디가 처음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지금은 인도 공화국의 날 주간이니 각별히 조심하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마지막으로 인도에 왔으니 우리는 인도인인 자신의 손님과 다름없다며, 인도를 충분히 즐기고 좋은 기억만 남겨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에 감동받은 우리는 유쾌 상쾌 아저씨와 헤어질 때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이 따뜻해진 순간이었다.

-인터뷰 요약

“카디는 간디지 (인도에서는 존경을 표할 때 이름 뒤에 ~지를 붙인다.)가 처음 만든 옷으로 인도인이라면 모두 카디에 대해 알고 있다. 어느 지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 여러 지역에서 생산된다. (중략) 종류는 직물에 따라 다양하다. 카디라는 직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100%수공업으로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직물에 상관없이 카디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내 고향 라자스탄에는 실크가 많이 생산되고 때문에 실크로 된 카디가 유명하다.”

빠하르 간즈 메인 바자르에 내려 쭉 걸어 들어가면 장신구와 헤나 상인이 밀집된 골목 안쪽에 ‘Sam’s Cafe’ 식당이 있다. 여기는 물소 스테이크를 파는데, 식당을 알려 준 선배가 루프 탑에 올라가서 먹으라고 강력 추천했기 때문에 계단을 올라 하늘이 보이는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뽀모도로 스파게티(Pomodoro)와 물소 스테이크 두 종류를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즈떡볶이 맛이 나는 뽀모도로 파스타가 나오고, 그 뒤를 이어 물소 스테이크가 나타났는데, 불이라도 지른 양 연기가 폭발하는 달구어진 판에 올려 진 상태였다. 진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와 시야를 다 가려버리는 탓에 우리는 잠시 갈 곳 잃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시야가 트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고기는 실패할 수 없기 때문에 꽤 맛있게 잘 먹었다. 식당에서 만난 외국인 여행자로부터 뉴델리 기차역에서 외국인 쿼터로 바로 표 예매가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그길로 바로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 방법은 정부에서 운영되는 방식이라 여행사에서 예매하면 발생하는 수수료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뉴델리 역에는 기차를 타는 플랫폼이 1층에 늘어서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각종 사무실로 추정되는 방들이 교실처럼 정렬되어 있었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니 외국인 전용 예약 사무소(Foreign Tourist Quota) 간판이 눈에 띈다. 은행처럼 번호표를 뽑고 차례를 한참 기다려서 동글동글하게 생긴 사무실 창구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다. 창구 아저씨는 참새를 닮았다. 요리 보나 저리 보나 참새 같아서, 느닷없이 터지는 웃음보를 애써 감추며 예매를 시작했다. 자랑스러운 외대인! 영어 회화 실력과 생활 힌디 실력을 뽐내며 라자스탄까지 23시간 기차, 자이뿌르까지 30시간 기차를 예매했다. 급한 불인 기차표를 해결하고 나니 앞날이 창창히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기차표를 예매하는 데에만 꽤 많은 시간을 소비했기 때문에 지체할 틈도 없이 바쁘게 탐사일정을 소화하러 달려야 했다.

카디 매장 방문기 (Khadi Gramodyog Bhavan)

릭샤를 타고 탐사를 하기 위해 도착한 곳은 코넛 플레이스(Connaught Place)의 커다란 카디 전문 판매 매장(Khadi Gramodyog Bhavan)이었다. 릭샤왈라에게 코넛 플레이스의 카디 숍에 데려다 달라고 하자 단번에 알아듣고 정확한 곳에 데려다 주었다. 생각보다 매장의 규모가 커서 한 번, 그리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또 한 번 놀랐다. 코넛 플레이스 자체가 워낙 각종 매장이 많은 쇼핑 단지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3층짜리의 결코 작지 않은 카디 매장 안에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카디 제품을 둘러보고 있었고, 심지어 계산대는 2개의 층에 각각 4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물건 하나를 사려면 20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놀라고 신기했던 것은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있던 간디 동상이었다. 청동으로 된 간디 동상 주위에는 뿌자(인도식 제사 혹은 예배)를 드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홀에는 물레 사진과 독립은 연상하는 그림이 여러 개 붙여져 있었다. 카디와 간디에는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직감했다. 오늘 만났던 유쾌한 합승객 아저씨가 말해 준 것처럼 진짜 간디가 카디를 처음 만들었나? 궁금증을 뒤로하고 가게를 둘러보니 1층에는 비누, 로션, 팩, 오일, 크림 등과 같은 다양한 기초 화장품들과 바디 용품들, 그리고 식자재와 향신료들을 진열해 놓고 있었다. 솔직히 매우 놀랐다. 지금까지 카디는 옷감을 지칭하는 줄만 알았는데, 지금 보니 카디는 수공예 제품을 통틀어 말하는 명칭 같았다. 카디는 간디가 만들었고, 지금은 수공예품을 지칭하나? 혼란스러웠다. 비누, 로션, 팩 등 모든 것에 카디라고 적혀있었다. 곧 생각을 멈추고 우리는 조용히 장바구니를 들었다. 여대생은 화장품 욕심이 많다. 이건 한국에 가져가서 누구한테 선물할 거, 이건 한국에서 내가 쓸 거, 이건 인도에 있는 동안 쓸 거……. 선물용으로는 천연비누를 많이 샀는데, 색깔이 알록달록하고 들어간 재료마다 향이 다 달라서 색도 예쁘고 향도 좋은 비누를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참 1층을 돌아다니다가 올라간 2층에서 드디어 의류 상품을 만날 수 있었다. 아마 이게 카디의 대표 상품이겠지 라고 생각한 우리는 걸려있는 옷부터 슬쩍 만져 봤다. 모시나 삼베처럼 살짝 까슬까슬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옷의 종류에 따라 까슬까슬한 정도가 달랐다. 옷의 생김새는 다른 흔한 옷가게에서 파는 것과 비슷했는데, 마감처리가 덜 되어있거나 울퉁불퉁했다. 우리가 의아하게 여기고 있자 눈치 챈 직원이 다가와 모든 것은 수공업으로 만들어서 그렇다고 귀띔해준다. 매장 안의 옷은 예쁜 옷이다, 아니다를 떠나 굉장히 전통적인 다시 말해 ‘인도’스러운 옷이 대부분이었다. 가격은 진짜 헉 소리가 다 나왔다. 대부분의 옷이 5000루피 이상이었다. 비교를 위해 말하자면 한 끼 식사로 서민들이 간단히 먹는 빵은 50-100루피 정도이다. 좀 부드럽거나, 디테일이 살아 있는 옷, 혹은 사이즈가 좀 크다 싶은, 그러니까 5000루피 정도의 옷들과 좀 차별화 된 무언가를 가진 옷은 그 가격을 훨씬 넘기도 했다. 5000루피면 한국 원화로 대략 10만 원 상당의 금액이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낮은 물가를 고려했을 때 옷 한 벌에 10만 원의 가격이면 인도 현지인들에게는 체감 금액이 어떨까. 이렇게 옷이 비싼데 여기서 옷을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신기했다. 기나 긴 줄을 서서 계산한 후 카디를 처음 접해본 우리는 이런 옷에 5000루피가 넘는 금액이 너무하다며, 그러나 두 손은 각종 카디 제품으로 무겁게 숙소로 돌아왔다.

**매장 입구에 간디 동상과 물레, 그리고 독립문구가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카디와 인도독립 그리고 간디는 확실히 연관이 있음.

**카디는 기본적으로, 직접 물레를 자아 만든 실을 손으로 엮어서 저마다 다른 굵기와 짜임을 가진 옷이나 현재는 그 외에 수공예로 만든 다양한 제품(샴푸 비누 로션)까지 를 포괄하여 지칭함.

**매장에 있던 카디제품은 대부분 서양식 옷보다 인도 전통 옷이었음. 마감처리가 제대 로 되지 않고 기계로 만든 직물보다 수준이 떨어지나 그만의 매력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가격이 매우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잘 팔림.

6 일 차

간디와 카디

- IN DELHI (델리, 2016년 1월 18일 ~ 2016년 1월 21일)

오전 8시 비비적거리며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하니 외교부에서 인도 공화국의 날 주간이니 테러를 조심하는 문자가 와있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싸했지만 우리의 탐사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어제 간디와 카디와의 관계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낸 우리의 오늘 첫 행선지는 간디 박물관(Gandhi National Museum)이다. 박물관에 들린 후 인도의 백화점 사켓의 시티워크(City walk)를 방문할 예정이라 아침부터 잔뜩 서둘러 지하철을 탔다. 마음이 급해 아침을 챙기지 못했기 때문에 카페에 들러 그나마 배가 부를 것 같은 음료로 당을 채웠다. 환승까지 해 가면서 도착한 역은 프레가티 메단(Pragati Maidan) 역이었다. 간디 박물관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 중 하나였는데 그래도 걸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릭샤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걱정 마시라 이제 릭샤 흥정정도는 껌이다. 짧은 시간 사이 흥정의 대가가 된 느낌이었다. 문제는 간디 박물관이 어디인지 모르는 릭샤 왈라들이 너무 많았다. 열이면 열 모른다고 하니 정말 난감했다. 결국 구글 지도를 킨 우리가 길을 안내하며 겨우 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관리인 할아버지와 함께한 물레 돌리기 체험

간디 박물관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정겹고 아기자기한 느낌이었다. 정문 옆으로 화단으로 꾸며진 오솔길이 눈에 띈다. 사실 그 길 말고 큰 길도 옆으로 나 있었는데 여대생은 원래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들을 좋아하니까 본능적으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오솔길의 끝에는 마하트마 간디의 생가를 복원해 놓은 공간이 있었다. 간디의 방, 그의 아내의 방, 서재, 부엌 등을 묘사한 것이라고, 어느 샌가 우리의 곁에 나타난 매우 인자하게 생긴 관리인 할아버지가 설명해주신다. 방 하나하나에 다 들어가 보면서 구경을 했는데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떤 방에 무심코 들어가자 웬 비둘기 떼가 푸드덕거리면서 방을 나가려고 요동을 쳤다. 온 방 안을 휘젓는 통에 소리를 지르며 발광을 하니 관리인 아저씨가 웃는다. 이런 일이 있었던 방이 한 개가 아니었기 때문에 관리인 할아버지는 매번 우리를 쫓아다니시면서 괜찮다고 안심시켜 주셨다. 그 건물 지붕 언저리에는 새 둥지가 있었는데, 지현이는 둥지 안의 알을 보고 저 계란 맛있겠다고 했다. 배가 많이 고픈 여대생이었다. 관리인 할아버지께서 이것저것 안내 팸플릿을 챙겨 주시는 틈을 타 옆에 붙어 서서 몇 가지 질문을 드렸다. 간디에 대해서, 그리고 카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간디가 카디를 ‘만든’ 것인지, 카디가 다른 상품(이때는 카디를 특별히 옷에 한정지어서 여쭤 보았다.)과 차별화되는 것은 어느 부분인지 등을 여쭈었는데, 할아버지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본인의 생각과 질문에 대한 답을 친절하게 해 주셨다. 그리고는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고는 서랍에서 열쇠를 하나 꺼내서 얼른 방 한 쪽 구석에 있던 장롱을 여셨다. 우리가 졸졸 쫓아가서 보니 옛날 방식 그대로의 물레를 꺼내는 중이셨다. 원래는 이걸 직접 보여 주는 요일이 따로 있는데 오늘은 박물관도 한산하고 우리가 관심이 많은 것 같으니 지금 보여 주시겠다며 바닥 한 편에 돗자리를 깔고 앉으셔서 물레를 돌리시기 시작했다. 솜과 물레를 돌려 실을 뽑는 것은 모두 처음이어서 우리는 물레가 돌아가는 것을 정말 입을 떡 벌리고 쳐다봤다. 서울 가시내들이 물레를 알 턱이 있나. 물레는 달달달 소리를 내며 돌아갔고, 물레바늘 끝에서는 뭉쳐진 솜이 약간은 거칠고 굵기도 일정치는 않지만, 어쨌든 실이 되어 뽑혀 나오고 있었다. “Can we try?” 하고 여쭤 보자 당연히 괜찮다며 물레를 돌리는 모든 과정과 방법을 알려주셨다. 한 명씩 번갈아가며 솜과 물레를 직접 잡고 실을 만들어 보았는데 목화솜 뭉텅이가 손에서 실이 되어나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할아버지는 신기해하는 우리가 더 신기한 모양이셨다. 저 깊숙한 곳에서 방명록을 꺼내더니 우리에게 소감과 싸인, 그리고 기념사진까지 먼저 부탁하셨다.

**인도독립의 아버지 간디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전개한 운동 중 하나가 스와데시 (우리의 물건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자)이며 이것이 바로 물레 돌리기 운동, 즉 실을 직접 뽑아서 옷을 만든 것이며, 카디의 시초. 그리고 이 운동은 사실상 인도가 독립을 이루어 내는 데에 가장 중요하고도 큰 부분이었다고 한다.

간디 박물관 Gandhi National Museum

내부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작으면서도 알찼다. 조심조심 들어가 사진을 찍으며 둘러보고 있자, 어디선가 안내인이 나타나 우리 옆에 서서 이것저것 알려주기 시작했다. 간디의 고향 집, 아프리카에 있다는 간디 아슈람, 간디의 유품, 간디의 일기 등을 설명해 주는 안내인을 붙잡고 또다시 간디와 카디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간디와 카디의 관계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간디가 카디의 기원이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간디는 벵골분할령 (인도독립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한 사건 : 힌두와 무슬림을 분리대립시킴으로서 민족주의세력을 약화시키려한 영국의 책략) 이후 영국제 물건을 보이콧했고, 자국에서 난 물건을 사용하자는 스와데시 운동을 전개, 애국운동을 민중들 사이로 퍼트리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불러왔다고 했다. 맨 처음 간디가 물레로 직접 실을 뽑고 무명옷을 만들던 행위에 수많은 인도인들이 동참하기 시작했고, 자치와 민족계몽으로 이어지는 운동은 인도의 독립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 과정에서 탄생한 제품들이 바로 현재 수공예 카디 제품들이라고 했다.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던 내용을 간디박물관 안에서 안내인에게 힌디어로 다시 들으니 새로웠다. 승희와 인혜가 위층으로 올라가 다른 전시물을 보고 듣는 동안 지현이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 안내인과 한참을 더 이야기했다.

2층에는 물레 발전의 역사를 보여 주려는 듯, 아주 오래 전의 물레부터 점점 간편해지고 기능적으로 변화된 물레까지 수많은, 다양한 형태의 물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솔길 바닥에서 우리가 돌려 실을 뽑아 본 물레는 아주 초기의 물레였고, 후기로 갈수록 어딘가가 자동화된다거나, 크기가 커지기도 하였고, 무언가가 추가되기도 했다. 심지어 알록달록해지기까지 했다. 전시관 한 편에 놓인 옛날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면 간디의 녹음된 실제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귀여워 보이는 전화기랍시고 사진을 찍으려고 수화기를 건드렸다가 사람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다. 나중에 그게 실제 간디의 목소리라는 설명을 듣고 녹음을 했다. 구석진 곳에는 간디 도서관이라고 하여 책 읽는 공간이 있었는데 아주 나이가 많으신 할아버지들께서 산스크리트어(고대 인도어)로 된 서적을 읽고 계셨다. 도서관 문을 열고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무거운 공기가 온몸을 짓눌렀다. 너무나 정적이라 민폐일 것 같은 생각에 차마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외에도 간디에 관련된 수많은 방을 들어가 보고, 박물관 건물을 한 바퀴 둘러본 후 각종 언어로 된 팸플릿을 잔뜩 받아 나왔다. 델리에서 영어와 힌디어 밖에 보지 못했는데, 이 박물관 팸플릿은 인도의 18개 공용어 중 9개의 언어로 각기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있었다. 더 이상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사켓으로 향했다.

아이스크림 사기 당했다

박물관 일정 후 사켓에 맛있는 음식점이 많다는 지현이의 말을 믿고 숙소로 가기 전 다시 지하철에 올랐다. 그동안은 기껏해야 10분, 15분 정도밖에 지하철을 타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거의 한 시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지하철에, 그것도 서서 이동해야 했다. 인도 지하철은 한국과 달리 보안이 철저해서 지하철역에 들어갈 때마다 수화물 검사를 한다. 마치 비행기 탈 때처럼 수화물검사와 몸수색을 마치고 나면 드디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생각보다 매우 쾌적한 시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하철 맨 끝 칸 두 개는 여성전용 칸으로 우리는 항상 여성 전용 칸을 이용했다. 한참을 달려서 말비야 나가르 역에 도착했다. 지금껏 가 보았던 곳들 중 제일 깔끔하고 환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분수대가 있어! 조각상이 있어! 풍선이 있어! 사진 찍자!” 인혜와 승희는 신이 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확실히 구경할 거리도 많고 먹어볼 거리도 많았다. 다 둘러보고 나서는 길에 지현이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며 아이스크림가게로 향했다. 메뉴판에는 아이스크림 맛과 컵 사이즈에 따른 가격들이 적혀 있었다. 지현이는 작은 콘 하나만 사려던 생각으로, 아주머니의 “Cup or corn?”이라는 질문에 “ Corn, please.”라고 말하며 입맛을 다셨다. 아주머니는 콘을 꺼내 아이스크림을 몇 스푼 뜨더니 900루피를 달라셨다. 원화로 대략 15000원에 달하는 금액에 놀라 벙 찌자 아주머니가 어깨를 으쓱한다. 아이스크림 하나가 15000원이라고? 길거리 떡볶이 1인분을 10만원에 사기 맞은 기분이었다. 따지고 싶었지만, 내일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탐사 일정을 점검하고 짐도 챙겨야하니 더 이상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역시 인도는 호락호락 하지 않다. 아이스크림 생각으로 꼬박 지새운 밤이었다.

7 일 차

설국열차 꼬리 칸

- IN VARANASI (바라나시, 2016년 1월 19일 ~ 2016년 1월 21일)

숙소를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오늘은 다음 탐사지 바라나시로 가는 날이고, 여기 델리에서 바라나시로 이동하려면 기차로 12시간을 가야한다. 밤기차로 이동하기 때문에 한인 식당인 쉼터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 동안 몰아쳤던 바쁜 일정에 지친 탓인지, 아니면 어제 사기당한 아이스크림 생각에 배가 아픈 것인지 점심부터 승희가 아프기 시작했다. 쉼터는 반 정도가 야외식당이었는데, 종일 야외에 있기는 쌀쌀한 날씨였다. 지현이는 한나절 찬바람을 맞고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돈을 더 주고서라도 1박을 더 해야 했다는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깜깜한 식당 골목에서는 릭샤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3일 동안 배로 늘어나버린 짐을 들고 걸어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쉽게 찾은 플랫폼 안에는 떠돌이 개들이 돌아다녔고, 아무렇게나 누워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구걸하는 사람들, 심지어 선로에 볼일을 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기차를 타면 모든 것이 좋아질 줄 알았다. 침대칸이니 기대를 걸어볼만 하다. 기차에 붙여진 하얀 종이를 보니 힘이 샘솟았다. 인도 기차는 칸마다 창문에 탑승객들의 정보를 붙여놓는다. 한국 같아서는 개인정보 노출이라며 항의가 들어올 것이 뻔하지만 인도에서 그런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칸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에 가로로 삼층 침대 2개가 마주보고 있고 통로 쪽으로 1개의 삼층 침대가 더 있었다. 물론 1인 1침대다. 빽빽하게 총 21개의 삼층 침대가 열차 한 칸에 자리하고 있는데, 처음보고는 숨이 턱 막힐 뻔했다. 천장은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졌고 먼지와 거미줄은 기본, 침대 옆으로는 바퀴벌레가 기어 다녔다. 침대도 말이 침대이지 쇠판 위에 다 떨어져가는 판자를 올려놓은 것에 불과했다. “설국열차 꼬리 칸이다..”라고 승희가 말했다. 우리 좌석이 위치한 지점에 멈춰서니 인도 대가족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표 하나로 여러 명이 같이 탄 것이 분명했다. 불법인 걸 자신들도 아는 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밤10시에 비켜주겠단다. 컨디션 난조인 우리는 별말 하지 않고 옆 좌석에 앉았다. 판자위에서 보내는 밤은 너무나 길다. 기차가 달릴수록 차가운 바깥공기가 들이치고 좁디 좁은 통로는 입석으로 탄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12시간짜리 밤기차는 11시간 연착으로 총 23시간, 꼬박 하루가 걸려서야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8 일 차

증발해버린 하루

- IN VARANASI (바라나시, 2016년 1월 19일 ~ 2016년 1월 21일)

11시간 연착으로 인해 꼬박 하루가 걸려 도착한 바라나시는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가 증발해 버린 셈이다. 연착 때문에 끼니도 못 챙기고, 심지어는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기차에 누워있기만 하다 보니 몸에 아무런 힘이 없었다. 어렸을 때 많이 읽었던 서바이벌 만화책이 자꾸 떠올랐다. 작가였다면 ‘정글에서 살아남기’, ‘사막에서 살아남기’, 이런 거 말고 ‘인도 기차에서 살아남기’ 같은 책을 썼을 텐데. 기차역에 있던 릭샤 왈라가 평상시의 두 배 가격을 불렀지만 못 이기는 척 릭샤에 올라탔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골골대며 룸서비스로 음식 몇 가지를 주문했지만 힘이 없어 얼마 먹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마법처럼 사라져버린 하루가 야속했다.

9 일 차

바라나시 카디 투어

- IN VARANASI (바라나시, 2016년 1월 18일 ~ 2016년 1월 21일)

이른 시간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인도의 상징, 바라나시에 와보지 않고는 인도를 와보았다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기에 굳이 탐사일정에 끼워 넣었던 지역인데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 어제 그렇게 고생해서 도착했는데 내일 다시 이 지역을 떠난 다니 믿을 수 없다. 더 무서운 것은 내일 다시 스무 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차에서 보낸다는 것이었다. 일정을 이렇게 짠 과거의 나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오늘이 아니면 바라나시를 둘러볼 수 없다는 생각에 흐물거리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숙소에서 간단히 조식을 먹고 서둘러 바라나시 강가로 향했다. 바라나시는 인도인들의 성지며 인도인들은 이 강물을 매우 신성시하기 때문에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릭샤에서 내려 한참 걸어 강물이 있는 가트 쪽으로 가니 탁 트인 전경을 보니 마음속부터 시원해진다. 보트를 타는 이들 강물에 목욕을 하는 이들, 연을 날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한강이 떠올랐다. 비록 위생이 나쁘고 썩은 내가 진동을 하지만 경치 하나는 끝내주는 걸이라고 생각하며 방향을 트는 찰나, 기분 나쁘게 생긴 아저씨가 어깨를 치고 간다. 뭐라고 중얼중얼 거려서 자세히 들어보니 마리화나 마리화나 미라화나....라고 하고 있었다. 마약상인을 직접 목격한 여대생은 온몸의 털이 쭈뼜섰다.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며 반대쪽으로 방향을 트니 이번엔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인도여자아이가 “언니 헤나하실래요?”한다. 꼭 한국인처럼 말해서 순간적으로 한국인 줄 착각 할 뻔했다. “언니 지금 바빠 나중에 할게 미안”이라고 하니 “칫! 맨날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는 안 올 거잖아요.” 한다. 한국어로 대화가 되다니 충격적이다. 가트를 더 둘러보다가 한낮 열기를 피해 바라나시 골목길로 들어왔다. 골목길에는 각종 옷감이며 장신구들을 팔고 있었는데, 좀 큰 골목길에는 어김없이 카디매장이 있었다. 바라나시에 있는 카디 매장은 여느 카디 매장과 마찬가지로 가지런히 정돈 되어 있으며 물건을 사면 꼭 영수증을 줬다. 가게 크기가 큰 카디매장은 바코드가 옷에 부착되고 출입문에 도난방지 센서도 달아져 있었다. 몇 개의 카디 매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모으는 와중에 신기한 걸 발견했다. 매장은 각기 달랐지만 같은 영수증에 같은 로고가 찍혀 있었다!! 그 로고에는 힌디와 영어로 KHADI AUR GRAMODYOG AAYOG (खादी और ग्रामोद्योग आयोग), 한국어로 카디와 마을 산업 위원회라고 적혀져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왜 같은 로고가 찍혀있는지 너무나 궁금했지만 당장 알아볼 수가 없어 의문을 품은 채 매장 탐방을 계속했다. 바라나시에서 카디 매장 말고 일반 옷가게도 들어가 보았는데, 일반가게는 옷을 쌓거나 천장에 매달에서 팔고 있었다. 카디 매장보다 확실히 화려한 색과 무늬를 가진 옷들이 많았지만 가격은 카디와 비교해 매우 저렴한 편이었다. 매장탐사에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해가 넘어가려하고 있었고, 바라나시 뿌자(인도식 예배, 제사)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진풍경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강가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있자니 북소리가 울리고 불길이 올랐다. 한 손에 부채를 들고 힌두 신들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며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한 편의 예술을 보는 것 같았다. 밤늦은 시간까지 뿌자는 계속 되었고 어두워진 강가를 바라보며 세 명의 여대생은 각자 생각에 잠겼다. 쌀쌀한 강바람이 얼굴에 스친다.

10 일 차

낭만의 도시 자이뿌르로!

- IN VARANASI (바라나시, 2016년 1월 18일 ~ 2016년 1월 21일)

바라나시의 마지막 날 아침, 그 날도 어김없이 조식을 먹으러 내려오는 것이 어떻겠냐는 관리인의 전화에 잠에서 깨었다. 실눈을 뜬 채로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던 우리는 체크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했다. 급히 숙소를 나온 우리가 굶주린 배를 잡고 찾아 떠난 곳은 어제 다녀왔던 레바 카페. 어제 얼굴을 익힌 탓에 주인 부부 분께서 반갑게 마주해주셨다. 음식 몇 가지를 시키고 우리는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자이뿌르로 가는 기차 시간까지 무려 6시간이나 남은 것. 김치 수제비와 오므라이스를 먹으며 우리는 진지하게 회의를 진행했다. 긴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남은 시간동안 주인 부부에게 양해를 구하고 레바 카페에 계속 머무는 것이 낫다는 것 이였다. 물갈이로 인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지현이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는 자칫 상태가 더욱 악화될 수 있기 때문. 결국 6시간 동안 우리는 점심, 저녁을 레바 카페에서 해결하며 기차 시간을 기다렸다. 덕분에 환한 햇살을 받으며 제대로 피로 회복을 한 우리는 한껏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여정을 시작 할 수 있었다. 기차에서 먹을 도시락까지 든든하게 챙긴 우리는 씩씩하게 기차역에 도착해 플랫폼을 찾기 시작했다. 칸의 등급마다 다른 모습을 한 기차 칸들을 지나치며 우리가 탈 기차 칸을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좌석 칸을 찾던 우리는 2A 칸을 보고 크게 환호했다. 델리에서 탔던 슬리퍼 칸에 비해 굉장히 안락했기 때문. 한 칸에 여섯 베드에다 여섯 베드보다 더 많은 현지인들로 북적이는 슬리퍼 칸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모두 경험했던 우리에게 한 칸에 네 개의 베드란 굉장히 충격적 이였다. 더군다나 이불 커버와 베게는 물론이요 커튼까지 달려있는 2A는 우리로부터 연신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우리는 한 자리씩 자리 잡고 누워 기차가 떠나갈 새라 웃기 시작했다. 플랫폼을 찾으며 혹여나 2A가 슬리퍼 칸과 별반 다르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걱정들을 하나둘씩 내려놓고 잠을 청하는 우리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가지 않았다. 탐사 동안 쌓였던 피로가 이 기차 칸에서 모두 풀어지는 기분. 우리는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기분 좋게 잠에서 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 사내가 꼼꼼히 닫아놓은 커튼을 확 걷어버리더니 우리 칸 여기저기를 눈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듯 그는 웅얼거리는 영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남는 베게 없어? (Extra pillow?). 아마도 그는 표 검사를 하지 않는 역에서 무임승차로 2A을 탄 듯하다. 베게가 있으면 표 검사원이 들이닥치더라도 정당하게 기차를 탄 척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베게를 찾는 것. 우리는 남는 베게가 없다며 그 앞에서 커튼을 닫아버렸지만 그 후로 우리는 내심 불안에 떨었다. 칸에 여자 승객만 있다는 것을 알고 혹여나 다시 찾아올까봐 우리는 그가 갈 때까지 커튼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가 간 것을 확인하고 커튼을 테이프로 아주 꼼꼼히 고정 시킨 후 우리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다행이 별다른 사고는 없었지만 그 때문에 아주 깊이는 잠들지 못했던 날 이였다.

11 일 차

자이뿌르에서의 첫날

- IN JAIPUR (자이뿌르, 2016년 1월 18일 ~ 2016년 1월 21일)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예약해 둔 숙소에서 택시를 보내주어 바로 숙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여기는 라자스탄 주 안의 자이뿌르라는 동네다. 택시 안에서 처음 만나는 자이뿌르는 그간 보던 인도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사람들은 순박했다. 도심에 붉고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도심에 들어서자마자 라자스탄에 온 것을 환영하는 간판이 보인다. 간판에 카디를 입은 모디 총리의 사진이 눈에 띈다. 곧 도착할 것 같은 숙소가 한참을 달려도 도착할 것 같지 않자 인혜와 승희는 기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근처에 멈춰 기본물품과 간단한 먹을거리를 샀다. 숙소에 들어가면 이 도심까지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였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거의 한 시간이 걸려 도착한 숙소는 무굴 궁정 같았다. 겉은 그냥 예쁜 건물이었지만 내부는 온통 황금색 장신구들도 도배가 되어있었다. 여대생은 원래 화려한 걸 좋아한다. 알고 보니 진짜로 옛 자이뿌르 궁전 안을 본 땄다고 한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셋 다 실실 웃었다. 평생에 처음 누려보는 호사다. 숙소에 일하시는 분들은 너무나도 친절했고 심지어 얼굴을 보고 뽑는 건지 잘생기기까지 했다! 까르르 신나하는 여대생들이었다. 밖에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인도에 와서는 해가 진 이후 한 번도 밖으로 돌아다녀 본 적이 없는데 자이뿌르가 얼마나 안심이 되었던지 숙소 바로 앞으로 산책을 나갔다. 나간 김에 인도에서 처음으로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과 인도 불량식품도 사먹었는데 초등학교 때 학교에 앞에서 사먹던 추억의 맛이 났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밤하늘의 별과 적당히 선선한 바람, 경치는 분명 이국적인데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낭만적이다. 자이뿌르의 밤은 아름다웠다. 쉬이 잠들기 아쉬운 밤이다.

12 일 차

카디 공장 방문기

- IN JAIPUR (자이뿌르, 2016년 1월 18일 ~ 2016년 1월 21일)

카디 공장 방문을 위한 택시 시티 투어를 위해 일찍 눈을 떴다. 호텔을 통해서 시티투어를 부탁했는데, 숙소가 너무나 구석진 곳에 위치해서 택시가 없으면 아무 데에도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카디공장이 구글 지도에 뜨지 않지만 현지 사람들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숙소 직원들은 카디 공장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시티투어 가이드 기사에게 물었더니 그런 곳에 가는 걸 의아해 하면서도 자신이 위치를 안다고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택시에 올라탔다. 시티 투어를 하는 내내 택시 가이드는 우리 또래의 젊은 남자였는데 외모가 꽤나 준수했다(매우 설렘!). 이름은 꾸마르라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철수’ 정도로 흔한 이름이라 우리는 그를 철수씨로 부르기로 했다. 그는 주변의 경치와 자이뿌르에 대해 짧은 영어로 끊임없이 말을 해주었다. 중간에 유명관광지를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창밖에 알록달록 색을 칠한 낙타와 코끼리 행렬이 지나가고 자동차는 속력을 내어 7개의 붉은 게이트를 통과해 도심에 도착했다. 델리와 바라나시가 대도시라는 느낌은 못 받았었는데, 자이뿌르에 오니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자이뿌르는 기본적으로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다. 깨끗하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 느낌이랄까? 상인들과 릭사왈라들이 소리치며 흥정하는 모습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도 순박해서 우리를 몰래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워 숨는다. 도심에서 꽤 떨어진 카디 공장에 내려서 출입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반대편 거리에 학생들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사진기를 꺼내며 웃어 보이니 오케이라고 해놓고 막상 사진을 찍으니 표정 속에 수줍음이 묻어난다. “잠깐만 공장이 사진촬영 금지 일수도 있으니 들어가기 전에 한 컷만 찍자”라고 지현이가 말했다. 사진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눈치를 보다가 공장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외부에서 실을 짜고 있던 사람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역시나 공장안은 사진촬영은 금지! 왜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는지 사진기를 다른 곳에 보관한 후 조용히 핸드폰 녹음버튼을 눌렀다. 사실 말이 공장이지 기계는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기계로 봐줄 수 있는 건 실을 짜는 베틀정도다. 아주머니들이 물레를 돌려서 직접 실을 뽑고 그 실을 베틀에 짜서 옷감을 만들고 있었다. 체계적이진 않았고 마을회관 같은 곳에 모여 계 중인 아주머니들 같았다. 옆에서 가이드을 자처한 아저씨가 100% 수공업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델리에서도 물레를 보았고 직접 돌려보기도 하였지만 숙련된 아주머니들의 손놀림에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다음 섹션은 염료 염색 구간, 염색물에 천을 물들이고 한쪽에서는 작은 물감으로 천에 있는 그림을 색칠하고 있다. 천에 있는 아주 자그마한 그림에 색을 채워 넣고 있는 아저씨가 우리를 보더니 씩 웃으시며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했다. 인도에서 한국인임으로 바로 맞추는 사람은 이 아저씨가 처음이었다. 인도에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바로 뒤따라 나오는 질문이 있는데, 바로 “북한? 남한?”이다. 사실 인도는 독립이후 사회주의적인 노선을 걸었던 나라이기 때문에 남한보다 북한이 더 친근한 모양새다. 아저씨도 마찬가지셨다. 남한이라고 하니 북한이 위험한 나라라고 생각하냐며 자신은 과거에 북한에서 살았다고 하셨다.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갑자기 지현의 핸드폰이 물감 통으로 떨어져버렸다. 온 사방에 물감이 튀고 아저씨가 작업하던 천에도 물감이 번졌다. 너무 놀라고 죄송해서 어버버거리는 우리에게 아저씨가 북한보다 너희가 위험하다며 건물이 떠나가도록 호탕하게 웃어주셨다.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진짜 괜찮다며 되려 다친 데나 혹은 물감이 묻은 곳이 있냐고 물어주셨다. 그 동안 가이드아저씨는 잽싸게 수돗가로 가서 천에 물을 묻혀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이 물감은 3분 안에 닦지 않으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 댄다. 졸지에 북한보다 위험한 여대생 삼인방이 된 우리는 그 후로 조심조심 공장을 견학했다. 변 아닌 변을 하자면 그곳은 관광이나 견학을 하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명도 제대로 서있을 수 없었다. 물감작업을 하는 아저씨는 따뜻하게 웃어주시더니 기념이라며 손바닥만한 천에 물감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가이드를 자처한 아저씨는 염색은 천연 물감으로 하며, 그림에 색을 넣는 물감은 돌에서 추출한 색이라고 하셨다. 돌을 갈아서 그 가루를 다시 빻은 다음 여러 색을 내는 것이라 하셨는데, 어떻게 돌에서 색을 낼 수 있는 지 의아했다. 이 후의 과정은 볼 수 없었는데, 색이 난 옷감은 옷을 만드는 공장으로 따로 보내지는 모양이었다. 카디 생산 공장에서는 원료를 실로 만들고 실을 베틀에 짜 옷감을 만든 후 그것을 염색하기까지의 과정만 볼 수 있었다. 그 다음을 궁금해 했더니 카디는 국가기관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일정 기준을 넘으면 품질인증을 받아 그 곳으로 넘겨진다고 하였다. KVIC라는 국가 기관이 카디 사업을 주관하며, 때문에 이 카디는 국가적 사업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이런 시골 같은 동네의 마을회관(공장)에서 국가가 관리하는 일이 있다니 신기했다. 아저씨는 계속해서, 카디는 ‘인도의 저항’으로서, 영국 식민지배 하에서 독립으로 이끈 스와데시 운동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농민과의 연대를 의미한다고 했다. 지금의 카디 사업은 농촌에 사는 백만 일꾼이 연계된 농촌경제를 살리는 산업이며, 지역매장에서는 카디로 만든 옷과 옷감 뿐 아니라 꿀이나 향신료 등 각 지방의 특산물도 판매하고 이로써 낮은 계층의 생활 증진을 돕는다고 하셨다. 카디는 독립-간디-인도의 정신으로 이어지는 고리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공장 견학 이후 그 못지않게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델리와 뭄바이 등과 같은 대도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아직까지 농촌이고, 그 농촌 경제를 떠받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카디생산이었다. 때문에 국가에서도 나서서 이를 관리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제서야 카디가 여러 지역에서 생산된다는 것이 이해되었다. 한 지역에서 몰아 생산하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큰 의미가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카디매장에서 왜 옷감과 옷이 아닌 다른 제품들을 파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사실 공장이라고 해봤자 크지도 않고 체계적이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아저씨의 짧은 강연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많은 생각에 잠겨 공장 밖으로 나오니 철수씨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짧은 투어 시간 동안 부쩍 친해진 철수씨였다. 시티투어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창밖에 펼쳐진 들과 산, 그리고 조용하지만 포근한 자이뿌르라는 촌동네를 눈에 담았다. 물감사건을 괜찮다고 넘겨주시는 마음씨 따뜻한 아저씨들 때문인지, 카디의 커다란 의미 때문인지, 아님 환하게 웃어주던 철수씨 때문인지, 왜인지 모르지만 감동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13 일 차

패션대학 교수님과 카디 인터뷰를 하다.

- IN JAIPUR (자이뿌르, 2016년 1월 18일 ~ 2016년 1월 )

숙소 바로 뒤쪽으로 패션 스쿨이 하나 있었다. 아무래도 옷감과 옷에 관련된 대학이니 다른 사람들보다 카디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고 있지 않을까 혹은 카디의 현대적 모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점심시간쯤 학교로 향했다. 독자 여러분들도 인도에서 일이 술술 풀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이라 믿는다. (앞서 말한 NO, PROBLEM을 잊지 않았길 바란다.) ‘Pearl Academy’ 라는 패션 스쿨은 딱 봐도 경계가 삼엄했는데, 들어가는 정문 바로 앞에서 빈디(이미 위에 붉은 물감을 찍는 전통)를 찍은 경비 아저씨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우리는 델리에서 공부를 하다가 카디에 대해 조사할 것이 있어서 이곳에 왔고, 학생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고 싶다, 그리고 이미 학교 측과 이야기가 된 상태이다, 라고 말해 보았지만, 직업의식이 뛰어나신 경비아저씨께 아주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패션학과 교수와 만나기로 이미 이야기가 된 부분인데 들여보내주지 않으니 애가 탔다. 아저씨가 너무 완강하신 관계로 시간차를 두고 다시 학교 앞을 기웃거렸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며 한 번만 들어가게 해 주시면 안 되냐고 정중히, 애교까지 동원해 가며 부탁 드렸다. 결국 경비 아저씨께서 로비 데스크로 연락을 넣어 주셨고, 드디어 우리는 경비실을 넘어 울타리 안쪽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1단계 경비실은 클리어 했으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을 직감했고, 애써 긴장하지 않은 척 생글생글 웃으며 유리문을 열고 건물 로비로 들어섰다. 깐깐하게 생긴 여자 직원 분 한 명, 우리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남자 직원 분 한 명이 데스크 너머에 앉아 계셨다. 호기심과 탐구에 대한 열망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으로 우리는 데스크 앞에 섰다. 여자 분이 우리에게 정확히 어떤 일로 방문한 건지를 물으셨고, 우리는 경비실에서 설명했던 대로 또 그 긴 이야기를 반복해야 했다. 의심이 많은 것 같은 그 여자 분은 우리가 외국인이기도 하고, 카디 조사 중인 건 알겠는데 본인은 그런 연락을 받은 적도, 전해들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아니 그럼 대체 우리는 누구와 통화를 했던 것인가……. 아무튼, 여자 분은 우리가 어느 소속인지도 불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어디 소속인지, 뭐하는 사람들인지가 증명되지 않으면 인터뷰든, 사진 촬영이든, 뭐든 허가해 줄 수 없다며, 그런데 진짜 너희 어디 서 온 애들이니? 라고 물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그냥 카디 탐사하러 온 학생인데요, 하면 절대 어떤 기회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한국에서 온 유학생인데 델리 대학교 소속이라고 뻥 아닌 뻥을 쳐 버렸다. 지현이가 델리 대학교에서 공부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면 들여보내 줄 줄 알았는데, 깐깐해도 너무 깐깐한 여직원 분은 보기 좋게 우리에게 한 방을 날렸다. “Then, can I see your student ID?” 다행인 것은, 지현이에게 델리 대학교 학생증이 있었다는 것이다. 숙소에 두고 왔는데, 가져올게요, 라고 말하고 얼른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지현이의 델리 대학교 학생증을 꺼냈다. 거의 간이 학생증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전임 교수 서명도 있고 그럴싸하게 생겼다. 이런 데에서는 간이 콩알만 한 지현이가 걸리면 어떻게 하냐며 징징거렸지만 승희와 인혜는 단호하게 지현이를 선두로 학교에 재 입장했다. 깐깐한 직원 언니는 학생증을 한참 동안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정확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물론 애초에 다 설명하긴 했지만 세 번째로 다시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을 줄줄이 설명했다. 다행히 어딘가로 전화를 거시더니 의심해서 미안하다며 너희와 약속을 한 교수가 내려오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셨다. 우리와 만나기로 한 Harangad Singh 교수님은 잠시 뒤 헐레벌떡 등장하시더니 수업 때문에 늦었다고 미안하다며 멋쩍게 웃으셨다. 사실 카디에 대해서는 델리에서 그리고 바라나시에서 보고 들은 것이 많았겠다. 기본적인 거 말고, 요즘의 카디 동향, 젊은 세대에서의 카디, 그리고 왜 정치인들이 카디 옷을 입는지 궁금했지만 일반 사람들이 대답해 주기 어려웠던 질문들을 맘껏 물었다. 일단 인도 정치인들이 카디로 만든 전통 복장을 고수하는 것은 의복의 상징성이라고 하셨다. 기본적으로 인도는 전통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모디 총리가 당선된 이 후 세계무대에서 인도라는 나라의 위상이 세워지고,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 일차적으로 다른 나라의 도움이 아닌, 인도 스스로, 인도 국민 스스로 이루어낸 것이라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생각하며,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인 당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원칙적이고 전통적인 것이 다시금 리바이벌 되고 있다고 했다. (물론 순수하지 않으며 약간의 정치적인 전략이라고 했다.) 또한 정치인들은 카디를 입음으로서 자신이 국민의 편에 있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자신이 얼마나 애국심있는 사람인지를 드러낸다고 하였다. 단순히 간디의 정신, 농촌 경제를 넘어서 인도인이라는 연대 또한 느끼게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중상층이상의 사람들 또한 카디를 찾는 것이라. 현대에 들어와서 카디는 본래 투박하고 민무늬였던 전통을 벗고, 변신을 꾀하고 있다고 하였다. 색을 물들이고 화려하게도 바뀐다고 했다. 그러면서 젊은 층을 타겟으로 삼기위한 노력을 한다고 한다. 카디 자체가 아닌, 정치와의 상관관계, 앞으로의 동향 등 전문적이고도 신선한 이야기를 들으니 카디에 대해 더 깊고 넓게 알게 된 기분이었다. 한 시간 가량의 인터뷰 후 교수님의 명함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교수님은 언제든지 메일로 궁금한 점을 물어보라고 하시며 근처에 있는 카디매장을 가보라며 추천해주셨다. 감사하다고 꼭 가겠다고 말했지만 이미 많은 카디 매장을 들렸던 관계로 바로 숙소로 들어가겠다고 생각했다. 학교를 나오니 다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책할 겸 주변을 돌아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이 사실상 탐사의 마지막이었는데, 많이 배우고 익힌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다만 지역이동시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아까웠다. 인도라는 나라가 워낙 크지만 돈을 더 주고서라도 비행기를 탔어야 했나 싶다. 하지만 다 끝난 마당에 웬 후회람! 기분 좋게 웃으며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14 일, 15 일 차

왔어 왔어 다시 델리로 돌아왔어!

-BACK TO DELHI, HONGKONG, AND KOREA

인도에 온지 14일 차 새벽, 기차를 타기위해 새벽 3시에 잠에서 깼다. 인도를 다니며 기차 트마우마가 생길 지경이었기 때문에 진짜 진절머리가 난다고 속으로 외치며 숙소 밖으로 나오니 우리의 철수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없이 트렁크를 열어주었다. 한 시간 가량을 달려 도착한 자이뿌르 기차역 새벽공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라자스탄을 떠나는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짐을 한 가득 매고 플랫폼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서 철수가 가지 않고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곳 남자들은 이탈리아남자 뺨치게 매너가 좋다.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고 그대로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생각보다 훨씬 탈 만했다. 앉아서 대여섯 시간을 간다고 생각하니 끔찍했지만 그럭저럭 눈은 붙일 수 있을 정도로는 편안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시끄럽지도, 사람에 치이지도 않았다. 델리로 이동하는 동안 해가 떴는데, 길게 자란 장초 수풀과 인도 토박이 나무들 사이로 오렌지처럼 떠오르는 해가 만들어낸 광경이 라이온 킹에 나오는 초원을 떠올리게 했다. 마지막 기차여행이니까 아쉬운 마음에 아주 자그마한 풀잎 하나 하나 눈에 담았다. 인도에서 즐거웠던 일들, 힘들었던 일들, 정들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기차 창에 파노라마처럼 스치다 아스러질 때쯤 델리역에 도착했다. 델리에서의 하루하고 반나절은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인도를 느끼는 날이었다. 탐사에 매어 가보지 못한 델리 시내 곳곳을 탐사 일지 없이 둘러보고, 개인적으로 보고 싶었던 볼거리들도 보고 왔다. 배낭에 아무렇게나 쌓인 짐들도 다시 정리해야 했고, 활동한 내용들도 어느 정리를 해야 해서 사실상 마지막 델리에서의 이틀은 인도에 있는 동안 가장 바쁜 나날이었다. 어느새 인도를 떠날 시간이 성큼 다가왔고 이제는 거의 마음의 고향이 된 한국인 식당 쉼터에서 마지막 만찬을 벌였다. 정 많은 사장님께서 공항까지 가는 택시를 불러 주셨고,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인도에서의 2주가 어떻게 보면 빠르게, 또 어떻게 보면 느리게 흘러갔다. 탐사기간 동안 운이 좋았고, 인복이 있어 좋은 사람들만 만났다. 또 무엇보다 카디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사회에 대해 알 수 있어서 뜻 깊었다. 안녕 인도, 2주만으로 알 수 없는 나라, 꼭 다시 올 테지만 다시 오게 된다면 기차여행만은 사양하겠어~

16 일 차

# 에필로그

-인도 공항, 그 이후.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인도에서 경유지 홍콩으로 넘어가는 비행기는 새벽 2시 이륙이었다. 안전 때문에 밤 10시쯤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도착했고, 3시간 동안 공항을 끊임없이 돌았다. 4시간의 비행시간이 지나고 홍콩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4시간이 증발해버리는 마법을 볼 수 있었다. 시차로 인해 실제 잘 수 있었던 시간은 4시간이었으며, 홍콩에서의 경유대기 시간은 15시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트랜스퍼 라인으로 가면 될 것을, 잠이 덜 깬 우리는 홍콩 입국 심사를 받아 버렸다. (대한민국 국적 소지자는 안타깝게도 홍콩 무사증 출입국이 가능하다.) 졸지에 15시간 후 출국 심사를 받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입국장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참고로 홍콩 공항 입출국장에는 마땅한 음식점도, 카페도, 앉을 곳도 없다. 공항 밖으로 나가면 되지 않느냐고? 땡전 한 푼 남지 않은 여행 막바지라고!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바닥을 치고 실성한 사람 마냥 말도 안 되는 말들을 해결책이랍시고 지껄이다가(정말 이런 표현이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결국 부딪혀 보자며 안내 데스크에 15시간 후 비행기를 탑승하는 데 지금 체크인 가능한지 문의했다. 당연히 안 된다더라. 보기 좋게 거절당한 충격이 커서 그런지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딱 죽겠다 싶은 상태였다(거짓말 아니다). 쓰러지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다해 보자 하는 심정으로 아시아나 발권 라인으로 갔다. 저기, 저희가 이런 상황인데, 어려운 건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저희 저 안에 좀 들어 갈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되냐고, 눈물로 애원하자 직급 좀 있어 보이는 아저씨가 “오케이”라고 하신다. 헐. 진짜 될 줄은 몰랐는데.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여러분, 아시아나 타세요. 두 번 타세요. 자국민 살리는 아시아나 사랑합니다. 결국 입국 심사를 받은 지 2시간 만에 다시 출국 심사를 받았다. 거의 바보들의 행진 수준이었다. 출국 심사를 받는 도중 인혜의 ‘올드 몽크’ 술이 심사대에서 걸렸다. 인도 공항 면세점에서 사서 입국 심사 통과하고 포장도 뜯지 않은 아버님 선물이 대체 왜 반입 금지로 걸린 것인가. 인혜는 보안 요원들에게 끌려가 그걸 다시 수하물로 부치고 두 시간 만에 돌아왔다. 으으 제발 집에 가게 해줘. 아직 이륙까지 10시간이 넘게 남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렬하게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여대생들은 동전을 모아 공항 밥을 사먹고 간이 의자에서 10시간 노숙을 시도했다. 비행기 탑승시간이 다가오는데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연착이란다. 이쯤 되자 화도 나지 않았다. 겨우 올라탄 비행기에서 한국어 안내방송을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2016년 2월 1일 오전 4시 50분, 비행기는 인천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고, 탐사는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세 명 모두 건강상의 하자가 생기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안전하게 돌아왔고, 센터로의 도착보고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나긴 여정을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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