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1기] [인도 남아시아] - 야뜨리양 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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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6-03-25 11:45 | Read | 2,793 |
본문
탐사테마
현재 한국은 ‘카페 열풍이 불고 있다’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느 곳을 가던지 카페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학생에서부터, 직장인, 장년층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카페를 많이 이용하고 있으며 ‘카페’는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카페에서는 다양한 음료들이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습니다. 커피와 더불어 최근에는 홍차를 이용한 음료들이 많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홍차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습니다. 세계의 3대 홍차생산지로 중국, 인도, 스리랑카가 꼽히고 있습니다. 그 중 스리랑카는 인도학을 전공하면서 역사나, 문학,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언급이 많이 되었고, 그만큼 인도와의 연관이 많이 되어 관심이 갔습니다. 그리고 현재 학습하고 있는 타밀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여 사용하는 타밀어권 국가라 현지 탐사와 동시에 타밀어를 직접 구사해 볼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고 판단되어 탐사지로 ‘스리랑카’를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스리랑카’를 모르는 사람도 ‘립톤’, ‘실론티’라는 말은 실생활에서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한때, 스리랑카는 인도와 함께 영국의 속령이 되어 지배를 받아왔고, 1948년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한 후 국호를 ‘실론’에서 '스리랑카로‘ 변경하였는데,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상품화되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립톤’, ‘실론티’라는 이름의 유래가 바로 스리랑카의 예전 명칭인 ‘실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최근 ‘딜마(Dilmah), 바질루르(Basilur)'와 같은 스리랑카의 홍차브랜드가 한국에 입점해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국토의 면적은 6만 5610㎢로, 남한의 면적의 약 2/3 정도로 세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작은 편에 속합니다. 이 작은 섬나라는 현재 차 생산량 2위, 세계 최대의 차 수출국으로 입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인도와 중국에 비교하여 국토면적도 매우 작은 스리랑카가 어떠한 방식, 어떤 배경을 가지고 당당하게 세계 3대 홍차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스리랑카에서 홍차를 어떠한 방식으로 재배하고 어떠한 공정을 거쳐 제품이 생산되며, 어디로 수출이 되는 지 등과 같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었습니다. 또한 단순히 차를 가공해 생산하여 판매, 수출하는 일차원적인 산업이아니라 관광 산업 등과 어떻게 연계가 되어 있는지도 관심이 갔습니다. 중국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차 문화권이며 그들의 차 문화와 함께 다기 또한 매우 발전해 있습니다. 인도는 ‘짜이’라고 찻잎과 여러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습니다. 이렇듯 차 산업의 발달은 그 나라의 현지인들의 삶과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리랑카 현지인들에게 차가 갖는 의미와 그들만의 차문화는 어떤 것이 있는가. 스리랑카 현지인들의 삶에도 ’차‘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어떻게 차를 이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로컬리티 챌린지 프로그램에서 저희 팀은 ’스리랑카의 차 산업과 현지인들에게 있어서의 차‘를 테마로 스리랑카 현지 탐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탐사목표
‘스리랑카의 차 산업과 현지인들에게 있어서의 차’라는 테마에 맞추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탐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먼저, 차의 재배에서부터 가공에 관해 전반적인 과정을 살펴볼 것입니다. 스리랑카는 인도와 중국에 비해 작은 국토면적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차 생산국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토지를 활용하여 방대한 양의 차를 재배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차들을 어떻게 수확, 운반하여 가공하는지 직접 차 재배지와 공장 등을 방문하여 살펴봅니다.
다음으로 스리랑카의 차 산업과 다른 산업과의 연계입니다. 우리나라를 예로 보면 녹차로 유명한 보성에서는 녹차를 그 지역을 대표하는 상품으로 상품화하여 매년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차 밭을 방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차를 덖어내는 과정을 보여주고 차를 이용한 다양한 체험 및 상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차와 관광산업을 적절히 잘 연계하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차 밭을 비롯해 ‘립톤시트’ 등의 명소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어떠한 상품들이 개발되어있는지 살펴봅니다.
마지막으로 현지인들에게 차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지, 그들은 차를 소비하는 방식을 알아봅니다. 차 산업은 스리랑카의 전체 산업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차를 생산하는 전 과정을 포함해 수출, 판매를 넘어 관광에 이르기까지 스리랑카 현지인들의 생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이들에게 차는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체류하는 동안 현지인들의 생활을 살펴봅니다. 각 나라에는 그 나라의 차 문화가 있습니다. 주변국인 인도에서는 찻잎과 향신료를 함께 우려내 만든 ‘짜이’를 길에서는 물론 일상생활에서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리랑카 현지인들은 어떻게 차를 소비하는지 현지인들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 알아봅니다.
스리랑카의 한 지역이 아니라 동북부를 제외한 전반적인 지역을 전체적으로 이동하는 탐사 기간에 다양한 교통수단을 활용하고, 전통 시장에서부터 도심의 백화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을 방문하여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이번 탐사는 단순히 ‘스리랑카의차 산업과 현지인들에게 있어서의 차’라는 테마 이외에 스리랑카의 전반적인 모습과 문화를 이해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탐사내용
7월 20일 월, 탐사의 시작, 경유지 말레이시아로.
오늘부터 8월 2일까지 약 2주간의 스리랑카 탐사가 시작된다. 오전 11시 비행을 위해 주희, 소희, 효정이는 오전 9시에 인천국제공항에 모였다. 간소하게 짐을 챙겨온 주희와 달리 소희와 효정이의 가방은 매우 두둑하다. 과연 이 가방을 메고 탐사를 수행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진 채로 우리는 출국 수속을 위해 짐을 다시 점검했다. 스리랑카 직행이 아니라 말레이시아에서 하루를 대기해야 했기 때문에 대기 시간 동안 필요한 짐을 나누어 담았다. 각자 간단히 가족과의 통화를 끝내고 사업단 보고 후 약 6시간 30분의 비행을 시작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이번 탐사를 위해 준비했던 기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팀 구성부터 테마선정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사다난했는데 이렇게 탐사를 떠나고 있다는 것이 아직까지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인도도 다녀오지 않은 세 명이서 스리랑카 탐사를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되었다. 엄청난 난기류 속을 날고 있는 비행기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먹고 자고 하다 보니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했다. 원래 계획은 공항 노숙이었으나 막상 공항에 도착해서 2시간을 기다리다보니 공항노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전상의 문제도 있고 첫 날부터 무리를 하면 앞으로 일정을 소화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공항에서 급하게 숙소를 찾았다. 찾은 숙소는 공항과 한참 떨어져 있어서 택시를 타야했다. 입국장을 벗어나 택시 승강장이 있는 층으로 향했지만 택시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후에 공항에서 택시를 소개받아야 택시를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겨우 택시를 찾아 타고 숙소로 향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숙소에 간 것은 현명한 선택인 것 같다.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근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말레이시아에 왔으니 현지 과일을 먹어보고 싶어 망고샐러드를 시켰지만 망고가 없었고 함께 시킨 과일주스도 맛이 없었다. 이상한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일정을 정리한 후 공항에 돌아갈 택시를 예약하고 앞으로의 탐사를 위해 휴식을 취했다.
7월 21일 화, 드디어 스리랑카로!
공항노숙대신 선택한 아늑한 숙소에서 묵은 우리는 전날 예약한 택시를 타고 다시 쿠알라룸푸르 공항으로 향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공항에서 소희는 두리안 아이스크림에 도전했고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남은 시간동안 공항을 둘러보다 스리랑카행 경비행기에 올라탔다. 오늘도 어김없이 우리의 비행은 난기류를 맞아 롤러코스터처럼 역동적이었고, 기내에는 스리랑카인들이 매우 많았다. 우리 옆에 앉은 스리랑카인 아저씨들은 우리가 입국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는 것을 친절히 알려줬다. 약 3시간 30분의 비행 후, 스리랑카에 도착했으나 시차로 인해 한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2시간을 번 셈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적도의 더운 열기가 전해져왔고 우리는 스리랑카에 도착했음을 직감했다. 입국장으로 향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온화한 미소를 지닌 커다란 부처상. 이외에 공항은 마치 한국의 구청 같았다. 반입 금지 물품들을 소지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다. 일단 도착비자를 받기 위해 비자발급데스크로 향했다. 안내원은 “visa? travel?”라는 두 마디로 간단히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과연 이 나라의 치안은 안녕한 것일까. 역시 허술했던 입국심사 후 나간 곳에서는 여러 환전소들과 통신사, 몇 몇 가게들이 있었다. 어느 환전소를 가야할까 망설이던 우리를 한 환전소 직원이 "same price"라며 손짓했다. 호객행위를 하는 환전소가 낯설긴 했지만 환전에 대한 정보가 없는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준비해온 지원금을 환전하고 나니 금전담당 효정이의 지갑이 매우 두둑해졌고 1루피에 한화로 약 8.8원이라는 놀라운 스리랑카의 환율을 몸소 겪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유심칩을 사러 미리 알아두었던 Dialog라는 통신사데스크로 갔다. 직원이 웃는 얼굴로 중국어로 된 상품설명서를 주어 당황스러웠다. 스리랑카에서 전화나 문자를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아 5기가짜리 유심칩을 선택하니 직원이 놀란 얼굴로 바라본다. 그 때 우리는 직원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약 2주의 체류 후 우리는 직원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소희가 유심칩을 사용하는 대신 모든 검색과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고 캔디 행 버스를 타러 갔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정류장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우리에게 온갖 택시기사들과 툭툭(삼륜차, 스리랑카의 주요한 교통수단 중 하나)기사들까지 달라붙어서 호객행위를 시작했다. 공항 건물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다섯 명의 기사들을 상대했다. 분명 버스가 있다는 정보를 알고 왔는데 택시기사들과 툭툭기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여기는 버스가 없으며, 버스정류장이 멀어서 걸어서 가기 힘드니 택시나 툭툭을 타고 가야한다면서 우리를 속인다. 한참 비슷한 장소에서 방황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어떤 청년이 우리에게 “Can I help you?" 라고 말을 걸었다. 그래서 캔디로 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는지 물어보니까 한 곳을 가르치면서 “저 여자가 서 있는 곳이 버스정류장이야.” 라고 한다. 우리가 방황하던 곳에서 채 10m도 떨어져있지 않은 곳이자 수많은 기사들이 버스가 없다고 속이던 그 곳이었다. 그 청년은 버스 시간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사라졌다. 툭툭기사들과 택시기사들에 대한 분노보다 더 큰 고마움을 그 청년에게 표시하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매 시간 45분에 있었는데 시간도 적절히 맞춰서 버스가 왔다. 화려하게 장식된 버스에는 요금을 받는 안내원이 따로 있었다. 버스내부는 색색의 전구로 꾸며져 반짝 거렸고 간드러진 싱할라어(스리랑카 현지어)노래가 흘러나왔다. 특이했던 점은 곳곳에 여러 신들이 붙어 있던 것이다. 버스 제일 앞에는 납작한 부처상이 전구에 둘러싸여 빛을 내고 있었고 그 옆으로 힌두 신 그림도 있었다. 수많은 신들을 보며 역시 여기도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는 국가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버스를 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왜 이렇게 신들의 그림을 붙여놓는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이 나라에도 과연 운전면허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신호등과 중앙선이 무색하게 그저 기사의 본능에 맞춰 달린다. 우리의 버스는 역주행해서 달린 거리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앞에 차가 있는 것이 거슬리는지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차선으로 역주행을 해서 차들을 추월했다. 정말 무시무시하게 운전을 한다. 3시간의 여정 중 효정이 옆에 앉은 현지인 아저씨는 잠을 자다가 깨어날 때 마다 효정이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캔디에 거의 도착할 때에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 ‘이곳은 캔디의 대학교고 한국인 학생들이 많다. 이쪽으로는 시내가 있고 곧 있으면 캔디에 도착할 것이다.’등의 유용한 정보를 주었다. 사고 없이 무사히 캔디에 도착했다. 스리랑카의 제 2의 도시로 불리는 곳답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그렇게 발전되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툭툭을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환영하는 의미에서 차를 내주었고, 저녁 식사를 위해 펼친 메뉴에도 차가 있었다. 숙소 주인아저씨에게 캔디에서 차에 관련해 밭이나 공장 등 가볼 만한 곳이 있냐고 물어보자 자신에게 커다란 차밭이 있으니 원한다면 투어를 해주겠다고 했다. 생각해 보기로 하고 우리는 차를 마시며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되는 다음 날의 일정을 점검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7월 22일 수, 본격적인 탐사의 시작, 캔디
스리랑카에서의 첫 날 밤, 시차에 적응이 되지 않은 세 명이서 돌아가면서 한 번씩 새벽에 눈을 떴다. 스리랑카는 한국과 3시간 30분의 시차가 나는데, 이 시차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느꼈다. 탐사를 오기 전 진행되었던 로컬리티 섬머스쿨에서 인도인 친구들이 힘들어 했던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효정이는 결국 현지 시간으로 오전 6시가 채 되기 전에 잠이 깨었다. 오전 9시에 모두 준비를 마치고 첫 번째 목적지인 Kandy City Centre에 걸어서 가기로 했다. 우리를 향한 스리랑카인들의 호객행위는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활발했다. 꽤 오래 걸려 Kandy City Centre에 도착을 했다. 이곳에서 캔디 시내를 소개한 간략한 책자가 있다고 하여 가장 먼저 책자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건물 안이 무척이나 휑했다. 한참을 찾다가 겨우 발견한 소책자에는 정말 간략한 소개밖에 없었다. 그래도 차 박물관에 가는 길이 있어서 우리는 차 박물관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끊임없이 흥정하는 툭툭기사들을 뒤로 하고 걸어가려고 하였으나 생각보다 거리가 멀어 결국 툭툭을 타기로 했다. 조금 전에 호객행위를 하던 기사들은 분명 차 박물관까지 200루피를 불렀는데 이 아저씨는 500루피를 부른다. 끊임없는 흥정 끝에 우리는 차 박물관까지 가서 한 시간을 기다려 왕복하는 비용으로 450루피에 마무리를 지었다. 걸어서 갔으면 박물관을 왕복하는데 해가 질 뻔 했다. 툭툭을 탄 건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 산 주위를 빙그르 돌아올라 도착한 차 박물관에서는 스리랑카의 전통의상인 사리를 입은 직원이 설명을 해주었다. 예전에 공장이었던 건물을 고쳐 박물관으로 만든 이곳에서는 실제로 사용하던 기계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차를 만드는 과정과 기계에 대한 설명을 비롯해 스리랑카에서 차를 재배하게 된 계기, 처음으로 차를 재배한 인물 등 간략한 역사와 그에 관련한 다기 및 대표적인 차 브랜드의 제품들을 관람하고 나니 기념차를 제공해주었다. 그 옆으로는 차의 여러 가지 효능과 스리랑카의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들의 특징 및 차를 구입할 수 있는 가게들이 있었다. 툭툭기사와 함께 차를 마시며 박물관 관람을 마무리하고 시내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툭툭기사는 식당까지 왔으니 500루피를 달라고 한다. 약속했던 가격과 다르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했다. 식당의 메뉴에는 역시 ‘A pot of tea' 라는 이름으로 차가 있었지만 차를 마시는 현지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다음으로 캔디 호수의 끝 부분에 유명한 카페가 있다고 해서 호수를 한 바퀴 돌았으나 애초에 원형인 호수에 시작과 끝을 알 수가 없었고 카페도 찾지 못했다. 더 늦기 전에 다음 일정인 현지 시장답사를 하러 이동하였다. 현지 시장에는 향신료, 과일 등 여러 식재료들을 많이 팔고 있었지만 차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찾아볼 수 없었다. 시내의 대형 슈퍼마켓에 가자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Dilmah의 차를 비롯하여 현지어로 쓰여진 브랜드들과 함께 여러 종류의 차가 판매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차들은 간편한 티백 형태로 포장 된 것에 비해 여기서는 주로 잎차를 한 팩씩 판매하고 있었다. 차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음과 동시에 현지인들의 차 문화에 대한 의문을 품고 탐사 첫 날이 저물어 갔다.
7월 23일 목, 체험 삶의 현장?! 누와라엘리야
전날 미리 예매한 기차시간에 맞추어 역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숙소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했는데 역시 차가 메뉴에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식당에 차가 있는데 현지인들이 식당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아 모순적이다. 제 시간에 도착한 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려와 달리 기차는 연착되지 않고 제 시간에 들어왔고 우리도 기차에 탑승했다. 스리랑카의 기차는 1등석, 2등석, 3등석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3등석은 당일 구입 좌석과 예매 좌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고, 우리는 당일 구매 좌석이 있는 곳에서 한참을 헤매다 많은 스리랑카인들의 도움을 받아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겨우 앉을 수 있었다. 3등석이라 설국열차의 꼬리칸을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내부는 쾌적했고, 예매석이라 그런지 관광객들이 대부분이었다. 기차는 말을 타는 것처럼 흔들거렸고 각 간이역에 멈출 때 마다 창밖으로 과일이나 간식거리를 파는 장사꾼들이 가득했다. 기차가 달릴수록 바깥 공기는 쌀쌀해졌고, 창밖으로는 차밭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풋풋한 찻잎의 향기를 맡으며 한참을 달린 기차는 종착역인 나누오야 역에서 멈췄다. 캔디에서 누와라엘리야로 가는 기차가 없기 때문에 나누오야역에서 내려 버스나 택시 등 다른 교통수단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역에서 나가려면 기차표를 반환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기차표가 보이지 않았다. 역직원은 “ 표 없어?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라며 우리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결국 추가요금을 더 내고 나왔다. 찝찝한 마음으로 역을 나서자 한 택시 기사가 누와라엘리야까지 가주겠다고 한다. 이미 역에서 실랑이를 벌이느라 지친 우리는 일단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누와라엘리야로 이동을 하는 내내 택시 기사는 아무 말도 없는 우리가 신경이 쓰였는지 주변 경치와 누와라엘리야에 대해 짧은 영어로 끊임없이 말을 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와라엘리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와라엘리야는 고도가 높은 도시라 한국처럼 더웠던 캔디와는 달리 날씨가 서늘했다. 현지인들도 대부분 긴 소매를 입고 있었고 모자나 목도리를 하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는 택시 기사가 추천해 준 숙소로 가기로 했다. 대충 숙소를 둘러보고 있자 숙소에서 차를 내주었다. 어느 곳에 가든 차를 대접해 주는 것 같다. 후에 시내로 내려가 답사를 했다. 캔디에 있을 때는 대도시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었는데 누와라엘리야에 오니 새삼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매우 시골로 들어온 것 같다. 답사를 하기 전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역시나 메뉴에 차가 있었다. 그리고 캔디에서 갔던 식당도 마찬가지지만 조금 큰 식당들은 대부분 빵집도 같이 운영을 한다. 이번에는 식사 후 빵집도 둘러보았는데, 여러 종류의 빵을 놓아두고 차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하는 현지인들이 많았다. 식당은 가격이 있는 편이라 주로 부유해 보이는 현지인들이 많이 있었다면 빵집에서는 평범한 현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 블루필드와 맥우드 차 밭과 공장을 돌아볼 계획을 세웠다. 해가 지자 누와라엘리야는 매우 추웠다. 소희와 효정이가 씻고 주희가 씻을 차례가 되자 물이 나오지 않았다. 미리 사놓았던 생수로 간단히 씻고 담요를 덮고 있는데 밤에 누군가가 밖에서 현관문을 세게 두드리며 소리를 지른다. 영어가 아닌 싱할리어라 우리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가 묵었던 방은 현관문 바로 옆이라 소리가 더 크게 들렸는데 소희는 잔뜩 겁을 먹었다. 몇 분가량의 소동이 진정된 후에 우리는 아침 일찍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7월 24일 천국을 빚은 도시, 누와라엘리야
추운 방에서 지옥 같았던 밤을 보낸 우리는 숙소를 옮기겠다는 마음 하나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겼다. 소희는 새벽에 일어나 열심히 숙소를 찾아놓았고 우리는 물티슈와 생수로 간단히 세수를 하고 나왔다. 조금 걷다 결국 툭툭을 하나 잡았다. 툭툭은 우리가 탐사를 하는 동안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엄청난 요금을 요구하니 조심하라고 해서 툭툭을 타는 것이 꺼려졌었는데 이제는 툭툭을 잡는 것이 꽤나 자연스럽다. 툭툭 아저씨는 집에 잠시 다녀올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민가에 있던 현지인들이 담 너머로 우리를 흥미로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인도에 다녀온 선배들이 ‘거기가면 스타가 될 수 있어’라고 했던 것이 이런 것일까 생각하며 웃어 주었다. 곧 돌아온 아저씨는 300루피에 새 숙소에 가주겠다고 했고 우리는 맥우드와 블루필드도 함께 가는데 1000루피를 흥정했다. 짧은 기간 사이 흥정의 대가가 된 느낌이다. 새 숙소가 있는 곳은 전날 묵었던 숙소가 있는 곳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우리가 전날 묵었던 숙소는 현지인들이 주로 사는 동네였다면 새로운 숙소가 있는 곳은 관광객들을 위해 여러 숙소가 지어진 곳이었다. 우리는 새 숙소의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전망과 아늑한 시설에 두말없이 숙소를 예약했다. 하지만 숙소 주인은 오늘 방이 없어서 한 시간 뒤에 방이 생길지도 모르니 연락을 해준다고 했다. 우리는 그 사이 차 밭과 공장을 둘러보고 오기로 했다. 차 밭을 가는 길에 툭툭 아저씨는 여러 설명을 해주었고 우리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길가에 툭툭을 멈춰서 기다려주거나 사진 찍기에 좋은 장소로 데려다 주기도 했다. 스리랑카에서 툭툭 기사는 단순히 기사가 아니라 개개인이 하나의 여행사의 역할을 한다. 특별한 가이드가 없더라도 좋은 툭툭 기사를 만나면 좋은 가격에 현지에서 인기 있는 장소, 유명한 것들을 느끼고 갈 수 있다. 우리와 함께 했던 아저씨도 하루 동안 가이드와 툭툭 기사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다. 우리는 먼저 더 멀리 있는 블루필드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맥우드에 가기로 했다. 두 곳 모두 특별한 예약 없이 관람이 가능하고, 입장료도 무료다. 블루필드에 도착하자 툭툭 아저씨는 공장 직원을 불러주었고 우리는 쉽게 공장견학을 할 수 있었다. ‘블루필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파란 사리를 입은 직원들이 일행별로 맡아서 공장 설명을 진행해주었다. 캔디에서 방문했던 차 박물관은 한 직원에 여러 일행이 함께 듣고 설명이 너무 빨리 진행되어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았는데 이곳에서는 한 일행에 직원 한명이 담당하여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천천히 설명을 해주었고, 이해가 될 때까지 다시 이야기를 해주고 이해가 되었는지 확인까지 시켜주었다. 실제로 가동하고 있는 공장을 관람할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홍차에 사용되는 잎의 특징부터, 홍차의 종류, 등급, 제조과정 등 제조와 수출 전의 과정까지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차를 시음할 수 있다. 맥우드 공장도 비슷했다. 초록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차를 제공해주고 공장을 견학할 수 있다. 맥우드 공장에서는 공장 직원을 기다리다 툭툭 아저씨가 직접 설명을 해주었다. 아저씨는 공장 앞에 작게 피어난 차나무에서 직접 찻잎을 따가며 설명을 해주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비슷했다. 오는 길에 보았던 넓은 차밭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궁금했는데, 차 밭마다 잎을 따는 날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잎을 따는데 잎이 자라는 속도에 맞추어 하루에 한 구역씩 나누어 수확한다고 한다. 두 공장에서 가공된 찻잎들은 수출용과 내수용으로 나누어지고 딜마나 바질루르 등 여러 회사로 가서 각 회사의 특징에 맞춰 다른 공장의 잎들과 조합하여 다시 가공된다. 두 공장을 견학하고 나니 진한 차향에 코가 마비될 것만 같다. 두 개의 공장 견학을 마치자 차의 제조과정과 등급, 홍차의 분류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고, 현지인들이 일하는 모습이나 차밭을 직접 들어가 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어서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을 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가이드나 상품 등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스리랑카에서 이미 차 산업과 관광 산업이 잘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캔디 차 박물관처럼 예전에 사용하던 공장을 리모델링해 박물관으로 만들거나, 숙소로 만든 곳도 있다. 공장을 다녀오는 길에는 아저씨가 추천하는 1년에 1달 오직 누와라엘리야에서만 자라는 과일인 뺘스를 먹었다. 배의 식감에 사과와 복숭아를 섞은 듯한 맛이 나는 새콤달콤한 과일이었다. 툭툭 아저씨는 숙소로 전화를 걸어 방이 남아있는지 확인해 주었고 돌아가는 길에 길가 차밭에서 차를 따고 있는 아주머니들을 불러주었다. 아주머니들은 우리 가까이에 와 찻잎을 따며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다 찍고 나자 돈을 요구했다. 사실 차를 따는 것은 부업이고, 진짜 직업은 사진 모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100루피를 지불하고 돌아왔다. 선선한 날씨에 좋은 아저씨를 만나 즐거운 탐사를 마친 우리는 다음 날 하푸탈레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가 시간을 확인한 후, 도시 구경을 하기로 했다. 어제 가보았던 시내에 다시 가보았지만 특별한 점은 없었고, 숙소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갔다. 호수를 끼고 조성되어 있는 공원은 많은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이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소희와 주희는 말을 타고 시내를 둘러보았고 효정이는 사진을 찍으며 산책을 즐겼다. 한 블로그에서 누와라엘리야는 천국을 빚어놓은 도시 같다고 했는데, 어제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햇볕에 반짝이는 호수 옆을 거닐고 있으니 이해가 되었다. 한참 여유를 즐기고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와 오늘 탐사했던 내용을 정리하고 안전하고 따뜻한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스리랑카에 와서 해가 지고 난 후에는 숙소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데, 좋은 숙소에 들뜬 소희와 효정이는 밤에 숙소 안에 만들어진 작은 정원에 산책을 나갔고,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았다. 방에서 쉬고 있던 주희도 불러내었는데 스리랑카에 온 이후로 가장 밝은 표정의 주희를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지 못해 아쉬웠다. 다시 스리랑카를 찾게 된다면 그것은 오늘 누와라엘리야에서 보고 느낀 것 때문일 것이라고 다짐하며 우리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 찻잎 수확
-잎들이 자라는 데에 7일 정도 걸리므로, 주로 7일에 한 번씩 찻잎을 채취한다. 비가 많이 오는 우기에는 4~5일에 한 번씩 채취한다.
* 차의 종류
1. Black Tea
- 찻잎을 건조 후 발효한다.
- 가공방식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
- OP→PEKOE→BOP→BOPF→DUST NO.1 순으로 분류되며 OP가 가장 연하고, DUST NO.1이 가장 맛이 진하다.
- OP와 PEKOE는 맛이 연하므로 설탕과 우유 없이 마신다.
- 스리랑카 현지인들은 주로 BOPF나 DUST NO.1를 우유, 설탕과 함께 마신다.
2. Green Tea
- Black Tea와 같은 잎을 사용하지만 발효과정 없이 건조한다.
3. White Tea
- 다른 차들과 달리 잎이 아니라 잎 사이 어린 순을 건조한다.
- 차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양이 많지 않아 가격이 매우 비싸다.
- 설탕과 우유를 넣지 않는다.
- Silver Tips와 Golden Tips로 나뉜다.
* 차 가공 과정
1. Black Tea
- 밭에서 수확한 잎의 수분을 50% 날린다.
- 2시간 자연 발효한다. 이 때, 잎이 갈변한다.
- 건조기에서 900℃에서 21분 동안 건조한다.
- 분류기에서 잎과 줄기를 걸러낸 후, 줄기는 버린다.
- 분쇄기에서 5개의 다른 크기의 조각으로 나눈다. 큰 잎은 연한 맛이 나고, 작은 잎은 강한 맛이 난다.
2. Green Tea
- 밭에서 수확한 잎을 자연 건조한다.
3. White Tea
-밭에서 수확한 순을 자연 건조한다.
7월 25일, 구름 속으로, 하푸탈레
아늑한 숙소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우리는 스리랑카식 커리와 코코넛로띠(스리랑카의 전통 음식 중 하나. 커리와 곁들여 먹음.)로 여유로운 아침 식사를 하고, 함께 제공되는 차를 마신 후 다음 도시인 하푸탈레로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어제 확인한 버스 시간에 맞추어 여유 있게 도착을 했으나 10시 35분이던 버스는 10시 15분에 이미 떠났다고 했다. 누와라엘리야에서 하푸탈레로 가는 하루에 한 번 있는 직행버스를 놓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웰리마다로 가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스리랑카에서 버스 안내원들은 버스 요금을 걷는 역할도 하지만, 버스가 출발하기 전 도착지의 이름을 반복해서 외치면서 마지막까지 승객을 받는다. 버스는 두 개의 산을 오르내렸는데 아직 도로가 닦아지지 않아 매우 거칠었다. 창밖으로는 끊임없이 차 밭이 펼쳐지고 있었다. 스리랑카에서 보이는 숲의 대부분이 차나무로 조성된 것이다. 국토 면적은 좁지만 그만큼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몇 시간 사이 녹초가 된 우리는 하푸탈레에 도착했다. 누와라엘리야보다 조금 더 시골 같은 분위기였다. 일정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현지인의 삶에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일단 우리는 미리 찾아두었던 숙소로 갔다. 언제나 그렇듯 숙소에서는 차를 제공해주었다. 제공되는 차는 소위 말하자면 영국식이다. 따뜻한 차가 티팟에 나오고, 우유, 설탕이 함께 나와 취향에 맞게 만들어 마시면 된다. 따뜻한 차로 이동하면서 얻은 피로를 달래고, 계획보다 늦어진 립톤시트 탐사일정을 수행하기 위해 툭툭을 잡았다. 툭툭기사는 편도로 간다는 우리의 말을 듣고 ‘진짜 편도로만? 왕복 아니고?’ 라고 했으나 우리는 강력히 편도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선택은 우리가 스리랑카에서 저지른 최악의 선택 중 하나였다. 툭툭을 타고 차 밭이 펼쳐진 산비탈길을 40여분 올라 립톤시트에 도착했다. 립톤시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 ‘립톤’의 창시자인 립톤 경이 방문했던 곳으로 현재는 담바타나 사에서 관리하는 유명 관광지다. 구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립톤 시트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하얀 구름사이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차 밭이 펼쳐져 있었고, 저 멀리서는 색색의 옷을 입은 타밀족 여인들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찻잎을 따고 있었다. 여느 관광객들과 똑같이 립톤경이 된 것처럼 립톤시트에 앉아 광활한 차 밭을 보고 있으니 스리랑카가 세계 3대 홍차 생산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주희는 “차 밭이 보성만하다.”고 했다. 차나무는 주위 다른 산들까지 뒤덮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중 한 차 밭에서 전날 공장에서 배웠던 내용을 떠올리며 찻잎을 따보기도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직 가공하지 않은 은은하게 차향기가 흘러왔다. 구름 속에서 차 밭을 감상하며 우리는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돌로 쌓아진 낮은 담의 곳곳에 각기 다른 교훈을 주는 문구들이 쓰여 있었고, 바닥에는 타밀어로 같은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스리랑카에 표지판은 대부분 싱할라어와, 영어, 타밀어를 함께 썼는데, 이곳에서는 타밀족의 비율이 높아서 그런지 타밀어가 평소보다 많이 보였다. 찻잎으로 가득한 자루를 머리에 이고 가는 여성들도 보고, 그 자루들을 모아두는 곳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트럭에 실어 공장으로 운반해간다. 차밭 사이사이 현지인들이 거주하는 집들도 있었다. 일정을 늦게 시작한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툭툭을 타고 올라올 때도 멀다고 느꼈지만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다. 작은 마을도 지나고, 학교도 지나고, 병원도 지나 2시간 정도 걷자, 담바타나 사가 운영하는 공장이 나왔다. 여러 공장을 보며 느낀 것은 차 공장은 ‘여기가 차공장이야’를 나타내듯 다 비슷하게 생겼다. 공장 앞에서는 양복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현지어로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을 뒤로하고 정류장을 찾기 위해 끝없는 차밭을 가로질러 걸었다. 약 1시간 쯤을 더 걸어 우리는 산의 절반을 내려왔으나 버스를 찾을 수가 없어 결국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아저씨를 세워 물어보았다. 아저씨의 도움으로 겨우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옆에는 현지인 남자아이들이 있었는데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주희는 기꺼이 사진을 찍어주었고, 그 남자아이들은 싱할라어로 적힌 메일주소를 적어주었다. 주희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싱할라어로 적어주면 어떻게 보내주지?’라고 했다. 곧 버스라고 하기 힘든 폐차직전의 봉고차가 우리 앞에 멈춰 섰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우리는 그것에 올라탔다. 천장은 뼈대인 철로 된 틀만 남아있었고, 의자도 다 떨어져 나무판자를 덧대어 놓은 작은 봉고차는 곧 부서질 듯 달려 시내에 도착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시내에 도착하자 우리를 태워다주었던 툭툭기사가 웃으며 “너희 돌아왔구나!”라고 했다. 아저씨의 말을 듣지 않고 편도로 갔다가 힘들게 내려온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맑게 웃어주었다. 툭툭기사들은 관광객들을 속이기도 하지만, 가끔 그들을 믿어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유명한 가게에서 에그 사모사(스리랑카 전통 음식 중 하나, 반죽에 향신료와 계란을 넣고 삼각형으로 튀긴 것)와 약간의 간식을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에그 사모사는 굉장히 맛있었다. 기본적인 인사말 밖에 모르지만 타밀족 사람들에게 말을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숙소에서 하푸탈레에서 골로 이동하는 방법을 찾았는데 버스를 2번 갈아타고 10시간 이상이 걸린다는 것을 보고 일정 조율을 해야 하는지에 깊이 고민했지만 원래 하루 여유를 두고 일정을 계획했기 때문에 큰 차질은 없을 것 같아 그대로 가기로 했다. 스리랑카의 버스를 타고 반나절이상을 가야하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
7월 26일, 아름다운 도시, 골
골로 이동하기 위해 숙소를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하푸탈레에서 골로 이동하려면 일단 웰라와야로 가서 또 다른 도시를 거쳐야 한다. 하푸탈레의 시내는 매우 작아 시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어제 잠시 둘러보아서 정류장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정류장에서 흰색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마주쳤는데, 펜을 줄 수 있냐고 하였다. 스리랑카에서는 볼펜이나 공책 등 필기구가 비싸서 어린 학생들이 관광객들에게 볼펜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나눠줄 만큼 필기구를 여유롭게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펜을 나누어주었고, 펜을 받자 행복한 표정으로 가는 아이들을 보며 필기구를 더 가져오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마침 웰라와야행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라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작은 모금함을 들고 있는 학생들이 버스에 올라타 현지어로 무언가 설명을 하고, 사람들에게 기부금을 받았다. 그 학생들은 곧 우리에게와 영어로 스리랑카의 무상교육을 위해 기부금을 모으고 있다며 도와줄 수 있냐고 했다. 우리도 매번 학비로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아픔이 느껴져 그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며 작은 돈이지만 기부를 해주었다. 웰라와야행 버스안내원은 매우 친절했고, 웰라와야에서 골로 가는 직행버스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우리가 웰라와야에 도착하는 시간과 골로 가는 직행버스 시간이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아 쉽게 버스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동하는 길에 안내원은 여기에 스리랑카에서 유명한 폭포가 있고, 이 길은 스리랑카에서도 거친 길에 속하니 버스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게 주의하라는 등 쉬지 않고 설명을 해주었다. 실제로 스리랑카 버스는 안전벨트는커녕 버스 앞, 뒤의 모든 문을 열고 달리기 때문에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으면 튕겨나가는 것은 한순간이다. 흙먼지를 맞으며 산길을 달리는 버스는 웰라와야에 11시 20분쯤 도착했다. 웰라와야에서 골로 환승을 하는 관광객이 꽤 있는 것 같다. 우리를 보자 다른 버스 안내원이 “골?”이라고 물어보았고 우리는 쉽게 버스를 찾을 수 있었다. 골 직행버스는 공항에서 캔디로 가는 버스처럼 어마무시하게 달렸다. 이쯤 되니 스리랑카에서 역주행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 중 하나인 것 같다. 버스 안에서 우리는 ‘골로 가려다 진짜 골로 가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살기위해 손잡이를 꼭 쥐고, 튕겨나가지 않게 다리에 힘을 주고 있었다. 조금씩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바다는 바위에 부딪혀 하얀 물거품이 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그 앞에는 스리랑카 전통방식으로 낚시를 하는 낚시꾼들이 있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방식이 많이 줄어들어 관광객들을 위해 돈을 받고 낚시하는 척을 해준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게 볼 수 있었다. 바닷가에서는 생선들을 판매하는 노점들이 늘어서 있었고, 우리는 갈레포트에서 내렸다. 버스를 타고 왔는데 왜인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골은 특히 스리랑카 식민지 지배 당시 지어졌던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어 스리랑카 내에서도 굉장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띄었다. 덥고 습한 유럽에 와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라 시내 탐사는 내일하기로 하고 우리는 숙소 근처를 잠시 둘러보고 오기로 했다. 압도적으로 관광객의 비중이 많고, 식당에서 판매하는 음식들도 햄버거나, 팬케익, 파스타 등 굉장히 서구식이었다. 우리는 한 햄버거 가게에 갔는데 주인 아저씨가 서양인이었다. 스리랑카의 매력에 빠져 아예 가게를 운영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햄버거 가게에서는 독특한 차를 개발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스리랑카에서 접했던 차는 다 티팟(tea pot)에 담겨 우유, 설탕과 함께 따뜻하게 제공되는 기본적인 차였는데, 이곳에서는 허브와 과일 등을 함께 우려내어 시원한 아이스티처럼 마실 수 있게 만들어졌다. 관광객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있었다. 바다 근처에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카페들도 있었다. 스리랑카에서 차를 사 마시는 것은 대부분 관광객이라 그런 듯하다. 누와라엘리야나 하푸탈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브랜드 샵들도 입점해 있었다. 엽서나, 코끼리 조각 등 스리랑카 기념품들과 함께 여러 브랜드의 차들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보석 가게들도 매우 많았다. 스리랑카는 차말고도 보석으로도 유명한데, ‘신밧드의 모험’에 나오는 보석섬의 배경이 스리랑카였다고 한다.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스리랑카의 여러 모습들을 보며 갈레포트에 다다랐다.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 지금은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어 있었다. 바로 이어진 바다에도 많은 사람들이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근처를 조금 더 둘러보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7월 27일 월, 탐사의 쉼표, 골
아침에 일어나 브런치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골 시가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골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어 있다. 우리가 묵었던 곳은 구시가지 쪽이었다. 여러 식민지배의 흔적이 남아있어 서구적인 모습을 지닌 모습을 지닌 구시가지과 달리 신시가지은 스리랑카의 현지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지나가는 툭툭기사들은 우리에게 호객행위를 했고 골에 대해 그렇게 많은 정보가 없는 우리는 툭툭기사가 제안하는 시내 투어를 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툭툭 기사는 지난 몇 몇의 툭툭기사와 다름없이 우리를 보석점에 데리고 갔다. 반짝이는 보석들을 보고 있으니 탐사를 하러 와서 샛길로 빠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차’라는 테마에 얽매여 스리랑카의 일부분만 보고 ‘스리랑카는 이런 곳이다!’라고 단정 짓는 것은 스리랑카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은 스리랑카에서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경험해 보기로 했다. 다음으로 힌두교 사원, 불교 사원, 교회 등 여러 종교들의 사원에 가 보았다. 특히 굉장히 많은 불교 사원들이 있었고, 한 골목에 부처상이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이렇듯 대부분의 국민이 불교를 믿고 있고 그 영향력이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종교를 차별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예로 우리가 이용했던 많은 버스와 툭툭들에는 십자가와 부처, 힌두 신들이 함께 장식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잠시 스쳐가는 우리가 그 깊은 사정까지 알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종교들이 잘 융화되어 있는 모습은 꽤나 인상 깊게 느껴졌다. 툭툭기사는 사원 근처에 있는 ‘정글 비치’라는 해변에 데려다 주었다. 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에서 에메랄드 빛 바다에 발은 적셔 봐야 하지 않겠는가. 기대를 하면 실망을 한다고 책과 블로그 등 많은 곳에서 찬양하던 부서질 듯이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바다는 아니었다. 분명 푸르고 맑긴 했지만 생각만큼 엄청 아름답지는 않았다. 강렬한 적도의 햇빛에 데워진 탓일까? 물도 그렇게 차갑지 않았다. 이후에 우리는 바다거북 부화센터로 향했다. 골 근처 히카두와에서는 해변에서 바다거북을 직접 볼 수 있다고 해서 그런 곳을 상상하고 도착한 부화센터는 작게 만들어 놓은 시멘트 수조에 바다거북들이 담겨있었다. 조금 실망했지만 바다거북 알도 보고 직접 바다거북을 들어 만져보기도 했다. 커다란 바다거북을 들던 툭툭 아저씨는 성난 거북에게 호되게 맞고 당황한 얼굴로 다시 내려놓았다. 오늘 시티투어에서 가장 재미있던 순간이었다. 소희는 그 순간을 동영상으로 담아내었고 우리는 숙소에 가서 두고두고 그 영상을 보았다. 이후 시내 차 가게도 방문했다. 딜마나 바질루르, 믈레즈나와 같은 유명 브랜드들은 주로 대도시의 쇼핑센터나, 유명 관광지 근처에서 볼 수 있는데, 사실 이외에 스리랑카의 다른 로컬브랜드 상품들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번에 방문했던 곳도 로컬브랜드들 중 하나인데 굉장히 많은 종류의 차가 있었다. 레몬, 바나나, 패션후르츠 등 과일 향이 첨가된 홍차부터 시작하여, 민트, 쟈스민과 같은 허브, 심지어 초콜릿 향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많은 차들이 있었고, 원하는 차는 시음도 해볼 수 있다. 툭툭 기사를 졸라서 차에 관련한 다른 곳에도 데려가 달라고 했더니 정원 같은 곳에 데려다주었다. 정원에서 직접 재배한 잎으로 만든 차를 마시며 여러 식물들로 가득한 정원을 둘러보는데, 각 식물들 옆에는 그것들로 만든 제품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가 원했던 곳과는 다르지만 나쁘지 않았던 경험인 것 같다. 그 외에도 시내 여러 명소들을 다니며 신시가지에서 투어를 끝냈다. 다른 도시들에서 시내 투어를 하지 않았던 것이 아쉬울 정도로 다양한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신시가지의 도로 중심에 커다란 찻주전자 모양의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었다. 시내에는 정말 현지적인 찻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커피를 팔고 있었다. 지금까지 탐사를 진행해 오면서 풀지 못한 한 가지 숙제가 바로 ‘현지인들의 차 소비문화’인데 그 모습을 보고 ‘스리랑카인에게 사실 차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관련이 없는 그저 하나의 산업으로 전락해 버린 것인 건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내 투어를 통해 스리랑카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고 얻은 것도 많은 하루였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있다. 이 문제를 탐사가 끝나기 전에 풀 수 있을까라는 무거운 마음과 함께 일찍 이동해야 하는 내일 일정을 위해 잠을 청했다.
7월 28일 화, 파란만장, 콜롬보.
7시 35분에 있는 콜롬보행 열차를 타기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숙소 주인아저씨가 툭툭으로 데려다주었다. 이번에는 2등석 표가 있어서 2등석을 탈 수 있었는데, 2등석은 누와라엘리야로 갈 때 탔던 3등석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았고,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승차감이 좋았다. 골에서 콜롬보까지 기차는 해안 바로 옆을 달리는 열차라 창밖으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고 하여 기대하고 자리에 앉았으나 해안 반대쪽 자리에 앉아 반대편에 앉은 아저씨의 어깨너머로 겨우 볼 수 있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자 기차 안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콜롬보역은 굉장히 크고 사람들로 붐볐다. 나누오야역에서의 악몽을 떠올리며 우리는 이번에는 기차표를 꼭 손에 쥐고 출구로 향했다. 콜롬보는 한 나라의 수도답게 고층빌딩도 많았고 양복을 입은 직장인들도 많이 보였다. 우리는 숙소에 가기 위해 툭툭을 탔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힐튼, 킹스버리 등 유명 호텔들이 가득했다. 숙소의 위치대로 찾아가보았지만, 총을 든 경비병이 지키고 있는 중앙 은행만 있을 뿐, 아무리 찾아도 숙소는 보이지 않았다. 콜롬보에 오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피곤한 우리는 한낮의 더위와 무거운 짐에 극도로 예민해지기 시작했고 근처 가까운 숙소로 갔다. 콜롬보에서 여러 차 가게들과 대형 쇼핑몰들을 갈 계획이었는데,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은 골에서처럼 툭툭으로 시티투어를 해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다음 날에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탐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콜롬보의 툭툭 기사들은 다른 도시의 툭툭 기사들과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우리를 향해 호객을 하던 많은 툭툭 기사들 중 우리가 선택한 아저씨는 25년 경력의 자부심이 매우 대단한 아저씨였다. 차 가게로 가달라는 우리를 당당하게 데려간 곳은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아무것도 모르는 관광객들에게 비싼 가격을 붙여 물건을 파는 가게였다. 입구부터 실망한 우리에게 점원은 설상가상 일본어로 인사를 건넸다. 후에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울과 삼성에 대해 열심히 말을 했다. 스리랑카인들에게 한국이란 ‘서울’과 ‘삼성’, 그리고 친구나 가족이 일을 하러 떠난 나라가 전부인 것 같다. 대충 가게를 둘러보고 나가려는데 툭툭 기사는 아래층에 있는 보석점으로 우리를 이끈다. 들어가지 않으면 다음 장소로 데려다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들어간 곳에서는 아까 차 가게에서 보았던 점원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점원들은 해맑은 표정으로 중국어로 인사를 건넸고 이미 이러한 상황에 익숙해 중국인인척 받아치는 우리와 달리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아는 점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다른 점원들을 말리느라 바빴다. 대도시에서는 툭툭 기사들과 가게들이 무언가 계약을 하는 듯하다. 툭툭 기사는 손님을 받아 요금을 챙기고, 아무것도 모르는 관광객은 그들이 ‘아주 좋은 곳이야’라며 데려간 가게에서 구입을 함으로써 윈-윈 전략을 펼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툭툭 아저씨는 비슷한 분위기의 기념품가게에 우리를 데려갔고 ‘천천히 둘러보고 와’라는 아저씨를 무시하고 1분도 채 되지 않아 나왔다. 그나마 딜마 티 샵을 간 것이 가장 보람 있었다. 차와 간단한 디저트를 비롯해 포장된 차들과 다기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도 팔고, 원두나 텀블러 등을 파는 것과 비슷했다. 오늘은 사전답사 개념으로 온 것이라 차를 마셔보지는 않았다. 내일 다시 오로 것을 기약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우리의 숙소 바로 한 골목 뒤였다. 아무래도 이 아저씨와 계속 있다간 제대로 된 탐사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시내에서 큰 백화점으로 가자고 했다. 아저씨는 아직 좋은 곳이 많다며 설득했지만 더 이상의 시간을 낭비할 수 없는 우리는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우리의 뜻대로 백화점에 가는 길에 아저씨의 어깨가 처음과 달리 좁아보였다. 말수도 많이 줄고 의기소침해 진 것 같다. 우리는 그의 25년 경력과 자부심에 스크래치를 내고 왔다. 백화점에 도착하자 아저씨는 약속했던 것보다 30분이 지났으니 돈을 더 달라고 했다. 우리의 말은 이미 듣지 않고 있었다. ‘말을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니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다’는 한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뻔히 보이는 바가지요금을 지불하고 간 백화점은 단촐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1층에 믈레즈나와 딜마가 입점해 있었다. 차를 사러 온 관광객들로 매우 붐볐다. 한 중국인은 자신의 몸집보다 큰 가방에 차를 쓸어 담고 있었는데, 그 옆에는 이미 채워진 가방이 하나 더 있었다. 우리는 ‘중국에는 스리랑카만한 차 밭이 있을 텐테’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차를 사는 사람들을 보았다.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차들을 사는 것은 대부분 관광객들이었다. 관광객들을 겨냥하여 만든 상품들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외에는 코끼리가 그려져 있는 각종 기념품들, 서점, 생필품들을 팔고 있었다. 현지인들도 꽤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크지 않은 건물을 살펴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숙소에서 우리가 처음에 찾던 숙소의 와이파이가 잡혔다. 우리가 있는 숙소는 로비에서만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고, 방에서는 추가 요금을 내야하던 참이라 우리는 밖으로 나가 와이파이의 세기를 추적해 우리가 찾던 숙소를 찾아내었다. 이미 이틀을 계산했지만 구경이라도 하고 오자는 마음으로 들어간 숙소는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고, 무엇보다 객실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내일 이곳에서 지내기로 하고 원래의 숙소로 돌아와 하루 분을 환불해 달라고 했다. 직원은 나중에 처리해주겠다는 말만 남기고 밤 10시가 되어서야 전화로 ‘50%만 환불해 줄 수 있어’라고 통보해왔다. 예산을 담당하고 있던 효정이는 주희와 소희를 데리고 직원을 찾아가 환불 규정을 보여 달라고 항의했다. 직원은 그제야 내일 아침에 매니저와 전액환불에 대해 상의해보라고 했다. 빨리 숙소를 옮기고 싶다. 아침에 매니저에게 할 말을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7월 29일 수, 뜻밖의 하루, 콜롬보
아침에 매니저를 만나 무사히 환불을 받은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새로운 숙소로 이동했다. 전 숙소에서는 와이파이가 되지 않았기에 숙소로 와 콜롬보 시내에 있는 쇼핑센터와 명소들을 검색해 일정을 정리했다. 도움이 될 줄 알고 한국에서 힘들게 구해온 여행책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먼저 숙소 근처에 있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가보기로 했다. 쌍둥이 빌딩처럼 같은 크기의 건물 두 개가 이어져 있다. 안에는 여러 회사들이 있었는데 주로 전자기기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간단히 건물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흰 교복을 입은 학생들부터 사리를 입은 여인들, 양복을 입은 직장인들을 비롯해 관광객들도 모여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노랫소리와 북소리가 가득한 그 곳에서는 축제가 이뤄지고 있었다. 제일 앞에 바닥에 물을 뿌리는 차를 따라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공작형상의 들 것을 들고 있었고 그 뒤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큰 가마가 이어서 행렬을 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계획할 때 축제가 겹치지 않아 아쉬웠었는데 운이 좋아 축제를 볼 수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던 남자가 와서 사진을 찍으라고 자세를 취해주었다. 옆에서는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바닐라우유와 물을 나눠주고 있었고, 붉은 빈디를 찍은 힌두 신자들이 가마에 꽃을 바치고 있었다. 행렬은 한 동안을 그곳에 멈추어 서서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스리랑카의 어느 방송국에서 나온 아저씨는 카메라로 축제의 모습을 담다가 우리에게 가마를 보고 있으라며 주문을 했다. 아마 축제를 즐기고 있는 외국인들이라는 이름으로 그날 뉴스에 나오지 않았을까. 충분히 축제를 구경한 우리는 툭툭을 타고 크리스캣이라는 쇼핑센터로 향했다. 한국의 백화점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어제 갔던 오델에 비하면 매우 좋다. 이른 시간이라 건물은 한산했다. 이곳에도 믈레즈나와 딜마가 입점해 있었다. 딜마는 현지인들도 많이 이용하는 브랜드라 그런지 스리랑카의 어느 슈퍼에서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슈퍼에서는 포장이 비교적 간단했다면 이런 큰 백화점에서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예쁘게 조금씩 포장한 상품들도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믈레즈나는 슈퍼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백화점에서 화려하고 예쁘게 포장된 차와 다기세트들이 주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판매되고 있다. 오늘 방문한 곳에서도 두 곳의 특징은 잘 드러났는데 대표색인 청록색으로 포장된 상자들이 주를 이루는 딜마와 달리 믈레즈나는 그림이 그려진 나무상자, 코끼리 모양 도자기, 각 지역의 특징을 그린 그림이 그려진 상자 등에 담긴 차가 시선을 끌었다. 같은 건물에 있는 서점에 차에 관련한 책을 찾아보았다. 서점에서 유일한 차 관련 도서는 스리랑카의 차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차에 대해 소개되어 있었는데 한국의 다도도 나와 있었다. 각 나라에서 차가 생산되는 지역과 특징, 차 마시는 문화가 자세히 나타나 있었다. 아래에는 슈퍼가 있었는데, 이곳의 차는 주로 현지인들이 구매했다. 분명 현지인들도 차를 마시는 것이 확실한데, 밖에서는 현지인들이 차를 먹는 모습은 일부를 제외하고 보기가 힘들다. 다음으로 근처 카페를 방문했다. 티 브리즈라는 이 카페는 골에서도 봤었는데, 주로 관광객들이 많은 대도시에 위치해 있다. 이 카페는 예전에 방문했던 맥우드에서 운영하는 카페로 맥우드에서 생산한 차를 이용한다. 카페 안에서는 간단한 디저트, 그리고 맥우드상표가 적힌 다기와 차들을 함께 판매하고 있었다. 주로 관광객이나 부유해 보이는 현지인들이 찾고 있었다. 그 이유는 주문을 하면서 저절로 알게 되었는데, 한국의 카페 가격과 비슷했다. 다양한 종류의 차들이 판매되고 있었는데 따뜻하게 먹는 차는 이미 많이 접해봤으니, 차갑게 먹는 아이스티를 주문해보았다. 각 테이블에는 맥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가지 차들과, 간단한 읽을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카페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 같다. 곧 준비된 아이스티는 차의 향긋함과 과일의 상큼함이 함께 느껴져 새로웠다. 한국에서도 아이스티는 있어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사먹는 과일 향이 나는 설탕물과는 달랐다. 차를 마시며 판매하고 있는 메뉴와 가게 안을 찬찬히 둘러보고 노리다케 매장을 방문했다. 노리다케는 사실 일본 브랜드이지만, 스리랑카에서 생산이 된다고 한다. 콜롬보 내에는 여러 노리다케 매장이 있는데, 상품 가치가 떨어진 B급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곳에서 웨딩 컬렉션, 식당 등에 필요한 식기세트를 파는 곳 등 조금씩 다른데 우리가 방문했던 곳은 웨딩 컬렉션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입구에서부터 고급스러워 보이는 매장에는 여러 다기세트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스리랑카 지도나 코끼리가 그려진 기념용 머그잔들도 한 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B급 매장을 파는 곳에서는 노리다케를 저렴하게 구입하러 온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이 꽤 많이 방문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갔던 곳은 웨딩 컬렉션을 파는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다음으로는 스리랑카의 차 브랜드 중 하나인 바질루르가 입점해 있다는 하우스 오브 패션이라는 쇼핑센터에 가기로 했다. 꽤 멀리 떨어져 있어 툭툭을 잡으려 했는데 두 명의 기사가 와 서로 자신의 툭툭을 타라고 호객을 했다. 매우 부담스러워서 둘을 보내고 새로운 툭툭을 잡았다. 하우스 오브 패션은 유명한 곳이라 모르는 툭툭 기사가 없으니 찾기 쉬울 것이라 했는데, 하우스 오브 패션을 안다고 자신하던 아저씨는 이상한 건물 앞에 우리를 세워주었다. 여기도 여러 가게들이 있고 번화가인 듯한데, 우리가 찾던 곳은 아닌 것 같다. 온 김에 구경이나 해볼까하고 들어간 가게에서는 우리가 오늘 묵을 숙소와 같은 회사에서 차를 판매하고 있었다. 캔디에서 자신의 차 밭이 있으니 구경을 시켜주겠다던 숙소 주인이 떠올랐다. 그 외에도 수많은 회사들이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회사들이 있는 것을 둘러본 후 멍하니 앉아있는 경비아저씨에게 하우스 오브 패션으로 가는 길을 물어 보았고, 아저씨는 다른 아저씨에게 물어 보고 툭툭을 타라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하우스 오브 패션에서 툭툭을 타고 진짜 하우스 오브 패션에 도착했다. 오전에 방문했던 크리스캣과 비슷한 분위기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하던 우리는 가방을 맡기고 오라는 직원의 지시에 다시 내려가던 중 바질루르를 찾을 수 있었다. 최근에 한국에도 입점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바질루르도 여느 브랜드와 같이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회사마다 겨냥하는 상품의 판매대상이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딜마는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을 위한 상품을 골고루 판매하여 슈퍼에서나 백화점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데 비해, 믈레즈나나 바질루르 같은 회사들은 주로 관광객들을 위해 상품을 만들어서 슈퍼에서는 보기 힘들다. 또 슈퍼에서 자주 보이는 현지 브랜드들은 큰 쇼핑몰에는 판매되지 않고 있다. 숙소로 돌아가 어제 봐두었던 숙소 근처 딜마 티 샵에 가기 위해 툭툭에 타고 베어풋 매장으로 가달라고 했다. 이번 숙소는 꽤 좋은 곳인데, 좋은 숙소의 이름을 대면 흥정이 되지 않아서 근처 가게이름을 대는 것이 낫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어풋에 도착했는데, 다른 지점이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콜롬보는 넓었다. 툭툭기사에게 다른 매장으로 가달라고 하니 이 매장이 더 크니 둘러보고 오라고 한다. 큰 관심이 없는 주희는 툭툭에 남고 소희와 효정이는 매장을 구경하러 갔다. 후에 찾아보니 세계적으로 꽤 유명한 브랜드에 한국에도 입점을 해있다고 한다. 주로 직물로 만든 상품들을 판매하는데, 매장에서 베틀로 직접 직물을 짜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사이 툭툭기사와 둘이 남은 주희는 현지인중의 현지인인 툭툭 기사와 차에 대해 간단히 인터뷰를 했다. 주희의 눈부신 활약으로 의외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탐사를 시작하고 나서 현지인들이 차를 마시는 것을 보기 힘들었던 이유를 알아냄과 동시에 큰 숙제를 하나 해결한 느낌이다. 스리랑카 현지인들도 차를 즐겨 마시지만, 티 카페나 특정 브랜드들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판매를 하고 있어서 현지인들을 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사람들이 물을 밖에서 잘 사먹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그들에게 ‘차’는 이미 생활 그 자체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우리는 숙소 근처 딜마 티 샵에 다시 방문했다. 딜마가 운영하고 있는 딜마 티 샵에서는 티 브리즈와 마찬가지로 딜마에서 생산한 차들과, 다기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따뜻한 방식으로 먹는 차부터 아이스티, 차를 넣어 만든 칵테일과 함께 즐길 디저트도 판매하고 있었다. 가격은 한국과 비슷했다. 한국도 저렴하지 않은 가격인데, 스리랑카에서 이 가격이니 현지인들이 즐기기에 부담스러운 것이 이해되었다. 찬찬히 메뉴를 살피고 있는데, 작은 잔에 차를 담아주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의 카페는 반성해야 한다. 차나무에서 수확할 수 있는 양이 적어 귀하다는 실버 팁과 칵테일, 현지인이 즐겨 마시는 차를 주문했다. 실버 팁과 차는 찻주전자에 담겨 나왔는데, 직원이 모래시계를 함께 주었다. 모래시계는 여러 종류의 차들을 우려내는 황금 시간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 있었다. 직원은 우려야 할 시간과 우려내고 잎을 꺼내는 것을 설명해주었다. 예상치 않았던 축제에서부터 인터뷰까지 뜻하지 않게 많은 것들을 얻은 날이다.
* 툭툭 기사와 주희의 인터뷰 내용
주희 : 스리랑카에서는 차를 자주 마시나요?
툭툭 : 네. 스리랑카에서는 차를 자주 마십니다.
주희 : 주로 언제 차를 마시나요?
툭툭 : 매일 아침과 저녁에 차를 마십니다.
주희 : 어떤 차를 즐기나요?
툭툭 : 밀크티를 마십니다.
주희 : 스리랑카 현지인에게 어떤 브랜드가 대중적인가요?
툭툭 : 립톤, 실론, 와타왈라, 딜마가 대중적입니다.
주희 : 믈레즈나와 바질루르는 어떤 가요?
툭툭 : 그 브랜드들도 좋지만 현지인에게 매우 비쌉니다.
주희 : 여름에도 차를 따뜻하게 마시나요? 아니면 아이스티처럼 차게 마시나요?
툭툭 : 따뜻한 차를 마십니다.
주희 : 차를 마실 때 주로 잎차를 드시나요? 티백을 드시나요?
툭툭 : 잎차를 마십니다. 티백은 잎차보다 가격이 좀 더 비쌉니다.
주희 : 우리는 스리랑카에 티 카페가 별로 없고, 카페에도 스리랑카 현지인들이 없어서 차를 별로 즐기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툭툭 : 스리랑카 현지인들에게도 티 카페는 매우 좋습니다. 하지만 매우 비싸고 우리는 차를 매일 먹기 때문에 티 카페에 가기보다는 집에서 차를 마십니다.
주희 : 커피와 같은 다른 음료도 즐겨 마시나요?
툭툭 : 물론 즐겨 마시지만, 차를 더 즐겨 마신다.
7월 30일, 한국인을 만나다, 콜롬보
안전하고 시원했으며 따뜻한 물도 잘 나오는 꿈만 같았던 숙소에서 조금 더 있기 위해 우리는 체크아웃 시간이 다 되어서야 느지막히 숙소를 나섰다. 원래 일정은 네곰보로 가 Dilmah사를 방문해 여러 정보를 얻는 것이었지만 스리랑카에서도 다시 보낸 메일까지 끝끝내 답장을 받지 못해 일정을 바꿔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에 가 머무르면서 차와 스리랑카에 대한 정보를 얻기로 했다. 나중에 숙소 주인아주머니께 Dilmah사를 방문하려면 일주일전에 직접 예약을 해야 된다고 들었다. 콜롬보는 우리가 거쳤던 다른 도시들과 다르게 수도라 그런지 매우 넓었고, 우리가 있던 곳에서 한국인 게스트하우스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위치에 적힌 대로 한 병원 앞에서 내렸지만 현지인도 아닌 우리가 주소를 보고 찾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일단 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옆에 있던 툭툭아저씨에게 위치를 물어보았지만 아저씨는 이곳이 아니라 했고, 숙소로 전화를 걸어주었다. 하필 숙소에 어린아이 밖에 없어 아무 것도 얻지 못했고 우리는 병원 앞으로 돌아가 다시 방황을 시작했다. 커다란 짐가방을 메고 방황하는 우리가 딱해 보였는지 옆에 있던 아주머니께서 숙소로 전화를 걸어주셨고, 설명을 하다 지치셨는지 숙소 주인아주머니는 우리를 데리러 나왔다. 스리랑카인들은 외국인을 대하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 같다. 아주머니께 거듭 감사를 표하고 우리는 숙소 주인아주머니를 따라 숙소로 향했다. 길을 헤매느라 지친 우리는 아주머니께서 차려주신 점심을 먹었다. 스리랑카에서 흔히 말하는 ‘날아다니는 쌀’이나 빵 등을 먹으며 생활했던 우리는 오랜만에 접한 한국식 밥에 매우 감동했다. 스리랑카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코이카(KOICA)나 현대 등 한국인 직원분들이 저녁을 먹으러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식사 후 아주머니께서 차 대신 스리랑카 커피를 내주셨다. 원래 스리랑카에 차나무가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것이 커피나무이다. 그러나 커피나무가 말라죽는 병이 돌아서 그것을 대신하여 들어온 것이 차나무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는데 요즘은 다시 커피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현지인들과 짧은 영어로 몇 마디 나누는 것과 달리 한국어로 대화하니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탐사를 시작할 때 이곳에 왔어도 좋았을 것 같다.
7월 31일, 탐사의 끝자락, 다시 말레이시아로.
스리랑카의 끝없는 더위에 셋 모두 밤새 씨름을 했다. 더위를 잘 타지 않아 현지인도 짧은 소매를 입을 때에도 긴 소매의 겉옷을 입던 주희도 오늘 밤만큼은 더위를 피할 수 없었다. 스리랑카를 떠나는 순간까지 우리의 몸은 더위에 적응하지 못한 듯 했다. 누와라엘리야 숙소에서 안전의 위협을 느낀 이후로 가격을 더 주더라도 좋은 숙소를 잡아 며칠 호사를 누렸더니 몸이 더욱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소희는 에어컨을 끄고 덥다고 짜증을 내면서도 끝끝내 창문을 열 생각은 하지 않았고 에어컨을 위해 3인실에서 2인실로 옮겨 한 침대를 쓰던 소희와 효정이의 체온은 스리랑카의 더위를 더욱 더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이번 탐사에서 혼자서만 모기에 물린 소희는 창문을 여는 것에 매우 민감했고, 효정이는 결국 몰래 창문을 열고 원래 사용하던 3인실로 건너갔다. 밤새 잠을 잔건지 더위에 지쳐 쓰러진 건지 모르겠지만, 셋은 일어나 제일 먼저 샤워를 했으나 물기를 닦기가 무섭게 다시 땀이 났다. 이 나라에서 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가만히 누워있기로 했다. 네곰보의 일정도 취소하고, 현지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 일정을 하루 여유 있게 계획했었는데 생각보다 일정을 빨리 마쳤고, 딜마 사를 방문하려던 일정을 수정해 이 곳에 와 주인 아주머니와의 면담도 했기에 계획했던 일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숙소 아주머니께 근처에 차 관련해 방문할 곳이 있냐고 여쭤보았다. 노리다케 매장이 있긴 하지만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가게들이 문을 닫는 날이라 어디를 가든 다 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스리랑카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아쉬웠지만 덕분에 이런 날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문화를 하나 더 배워간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한국식으로 잘 차려진 아침을 먹고 우리는 간만에 휴식을 취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잘라주신 파파야를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분이 스리랑카인이신데,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다리를 다쳐서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야기 중간에 아저씨는 방에서 잠시 나와 능숙한 한국어로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그 후에 한참을 쉬다 스리랑카에서 한국 약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아주머니에게 비상용으로 가져왔던 약을 조금 나눠주고 마지막으로 차를 마셨다. 숙소비를 계산 하려는데 50불인지 알았는데 아주머니는 ‘1인당 50불인 거 알죠?’ 라고 했다. 환전해왔던 지원금에서 그만큼의 돈은 남아있지 않았다. 일단 효정이가 사비로 100불을 내고 나머지 돈을 루피로 지불하고 나왔다. 먼 타국에서 한국인을 만나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한식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지만 우리는 한동안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동안을 멍하니 있었다. 그 전날 묵었던 시내 중심의 좋은 호텔이 100불이었음을 생각하면 식사비를 고려해도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머니가 불러주신 나노택시를 타고 편하게 공항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1인당 50불인 거 알죠?’라는 아주머니의 말이 세 명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공항으로 가는 길 스리랑카의 모습을 눈에 가득 담아두기로 했다. 시작부터 모든 것이 낯설었던 나라. 떠나려니 돌아간다는 설레임과 함께 그 동안 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은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밀려왔다. 여러 생각을 하며 도착한 공항은 역시나 허술하다. 허술하기 그지없다. 일찍 수속을 밟고 쉬려고 했던 우리의 계획과 달리 이곳에서는 비행시간 3시간 전에 입국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을 몰랐던 우리는 대기의자에 앉아 8시간을 기다렸다. 시작부터 여기저기 얽힌 지원금 계산을 하고 남은 데이터로 동영상도 보고 탐사기간 동안 스리랑카 여성들처럼 땋아 내린 머리도 다시 매만지고 좁은 공항 안을 카트를 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겨우 대기를 했으나 우리의 비행기는 연착이 되었고 안내데스크에 물어 겨우 입국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남은 루피도 다 환전을 해버려서 8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우리는 먼저 저녁을 먹기로 했고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버거킹으로 향했다. 한국의 버거킹보다 비싸고 맛이 없었다. 간신히 배를 채우고 남는 시간에 마지막으로 공항을 한 번 둘러보고 비행기 대기장으로 갔다. 이미 현지시간으로 1시가 훌쩍 넘은 시간. 한국시간으로 새벽 거의 새벽 5시쯤 되었으니 우리는 거의 20시간을 깨어있는 셈이다. 게다가 추가로 40분이 더 연착이 되어 현지 시간 새벽 2시 10분이 되어서야 우리는 반쯤 눈을 감은 채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우리는 좌석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고 거친 난기류에도 깨지 않았다.
8월 1일, 끝없는 대기, 말레이시아.
눈을 뜨니 어느새 날이 밝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본 일출은 매우 아름다웠고, 덕분에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난기류를 만나지 않는 것이 허전한 비행 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 도착했다. 여행을 시작할 때 벌었던 시차들이 역습해 오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쪽잠을 잔 우리는 몸이 매우 피곤했지만 전날 한국인 게스트하우스에서 예상치 못한 지출로 인해 예산에 차이가 난 상황이었다. 숙소를 잡고 쉬었다가 오후에 쿠알라룸푸르 시티투어를 할 계획을 변경하여 그대로 시티투어를 하기로 했다. 시티투어를 하기 위해 공항철도를 타고 중심지로 나갔다. 흔들림 없이 달리는 철도 안에서 지난 탐사를 돌아보며 잠시 앉아있자 곧 시티투어 버스를 탈 수 있는 Central Station에 도착했다. 편안했던 기차를 벗어나기 싫었지만 이번이 아니면 말레이시아 투어를 하지 못한다는 집념으로 시티투어 버스를 탔다. 시내 여러 곳의 명소들에 잠시 멈춰 내려서 관람 후 다음 버스를 타는 형식의 투어였지만 말레이시아 왕궁에서 한 번 내린 우리는 이후에 내리지 않고 그저 버스에 앉아 창밖을 관람하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제일 컨디션이 좋은 주희는 2층 버스의 야외로 나가 경치를 관람하였고, 소희와 효정이는 버스 구석에서 잠에 취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시티투어를 마치고 다시 Central Station에 돌아가 식사를 하고 역을 돌아본 후 공항으로 돌아갔다. 시티투어를 가기 위해 길을 헤매고 투어버스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식사까지 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시간이 많이 남아 모든 공항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갔던 곳을 몇 바퀴 더 돌고나서야 탑승시간이 되었다. 앞으로 밤비행기에서 밤비행기로 갈아타는 어리석은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셋은 다짐했다.
8월 2일, 탐사의 끝, 다시 한국.
말레이시아에서 약 4시간의 비행을 거쳐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 이틀 동안 비행기에서 쪽잠을 잔 것이 전부인 우리는 극도로 지쳐 서로 말할 힘도 없었고, 묵묵히 입국장으로 가는 열차로 향했다. 얼른 짐을 찾고 돌아가 쉬고 싶었는데 우리의 짐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나왔다. 짐을 찾고 나서야 비로소 탐사가 끝났음이 느껴졌다. 파란만장했던 탐사 준비과정과 함께 현지어도 못하는 우리가 무사히 탐사를 수행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함께 설레던 마음으로 출국을 하던 것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무사히 계획했던 일정을 마치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시작한 탐사였고, 탐사 중에 위험한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보다 좋은 일들도 많았다. 버스에서든, 길에서든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우리를 먼저 반겨주고 도와주던 스리랑카인들 덕분에 현지에서 체류하는 짧은 기간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스리랑카의 모든 것을 보고 오기에는 짧았던 현지 탐사는 오늘 이렇게 끝이 나지만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소중한 인연들과 많은 일들은 잊지 못할 것이다. ආයුබෝව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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