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1기] [인도 남아시아] - 으샤으샤 아샤 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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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6-03-24 16:17 | Read | 2,577 |
본문
탐사테마
‘으샤으샤 아샤’ 팀의 탐사테마는 원래 네팔의 경제였다. 하지만 네팔에서 일어난 지진이라는 큰 자연 재해 때문에 탐사 주제를 바꾸게 되었다. 탐사 지역과 주제를 고민하다 북인도 지역(히마찰 쁘라데쉬, 잠무 & 카슈미르) 지역을 선택하게 되었고, 기존 주제였던 경제와 연관 지어 ‘인도의 공정 무역’으로 주제를 정하게 되었다. 공정무역이란, 한마디로 국가 간 동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을 말한다.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있어 공정한 가격을 지불하도록 촉진하기 위한 국제적 사회운동이다. 이는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직거래, 공정한 가격, 건강한 노동, 생산자의 경제적 독립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소외된 생산자에게는 보다 좋은 조건의 무역을 제공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며, 소비자에게는 윤리적인 제품을 공급하고자 하는 직거래방식의 무역협력을 의미한다. 소비자와 생산자가 직거래를 함으로써 중간 유통과정을 없애고, 이를 통해 생산자에게는 정당한 몫을 돌려주며 소비자에게는 저렴한 가격으로 제품을 공급한다는 개념의 거래방식이다. 생산자의 노동 가치도 보호해 주고, 정당하게 지불된 제품가격을 통해 소비자들은 도덕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윤리적 제품을 제공받을 수 있다.
과거에 다국적기업들은 커피와 함께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 등을 제3세계와 같은 저개발 국가들에게서 제공받으면서 이들로부터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낮은 임금만을 지급하고 있었다. 공정무역은 직접 제품 생산에 기여한 이들이 가져야 할 몫을 다국적기업들이 가로채고 있다는 인식이 나타난 195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이들 기업들에 의해 무시된 노동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해 주고 제3세계 국가들과 같은 저개발 국가들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하자는 취지에서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된 제품으로는 커피ㆍ초콜릿ㆍ설탕ㆍ수공예품 등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인 자유무역과 달리 공정무역은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에 대한 기회 제공, 투명성 및 신뢰 확보, 공정한 가격 지불, 성 평등, 건강한 노동환경 제공, 친환경 등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공정 무역이 꼭 좋은 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무역을 강조하는 이들은 다국적 기업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반대로 제 3세계와 그 지역 생산자/농민들의 입장을 간과하는 특징이 있다. 또한 공정 무역이 제 3세계 즉, 공정 무역 상품을 창출하는 나라에 경제를 교란시킨다는 면도 간과할 수 없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거래되는 공정무역 규모는 약 2조 원에 달하고, 국내에서는 2002년 아름다운가게가 최초로 공정무역운동을 시작한 이후, 2005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내에서 공정무역을 통해 제품을 판매하는 단체는 아름다운가게를 비롯해 에코생활협동조합, 두레생활협동조합, 한국YMCA, iCOOP생협연합회, 페어트레이드코리아 등 10여 개 단체가 있다
탐사목표
현재 인도에서도 공정 무역과 관련된 단체 또는 기업들이 존재한다. ‘Holstee’ 라는 뉴욕을 기반을 둔 공정 무역 기업을 예를 들 수 있는데, 이 기업은 인도의 쓰레기들로 재활용 지갑을 만들어 전 세계 젊은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팀은 이 기업을 모티브로 잡아 인도에 있는 상품을 공정 무역 상품으로 활성화 시키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인도에 Holstee와 같은 공정 무역 기업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공정 무역자체가 활성화 되어 있지는 않다. 따라서 인도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 있는 상품을 우리나라에, 그리고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진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인도에서 공정 무역을 통해 불가촉 천민과 같은 사람들의 생활 환경과 삶의 질 개선, 특히 어린아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공정 무역을 탐구할 것이다. 또한 우리 팀이 이 주제를 정하고, 조사하면서 나왔던 공정 무역의 이면, 부정적인 부분들 또한 함께 고려하여 어떻게 하면 정말 ‘공정’한 무역을 전개할 수 있을까?의 초점을 맞춰 탐방할 것이다.
다인종, 다문화 등.. 모든 것이 다양하고 다채로운 인도에 상품들은 전 세계인이 관심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개성있고, 독특하다. 특히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캐시미어 또한 잠무 & 카슈미르 지역에만 있는 독특한 티베트 풍 수공예품들, 카페트 등의 상품들을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끼며 공정 무역 상품으로 발전시키고 다른 나라에 수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탐사내용
<8월 3일> “인도 여정의 시작”
이른 아침 눈을 떠 인천공항을 향해 집을 나섰다. 약 15kg에 달하는 무거운 여행 배낭을 짊어 메니 비로소 지난 5개월간 준비해온 탐사가 시작된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동안 우리 팀은 탐사 준비 과정에서 유난히 역경이 많았었다. 첫 탐사지역이었던 네팔이 지난 4월 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게 되어 급하게 북인도로 루트와 테마를 변경하고, 처음 예매했던 비행기가 메르스로 두 번이나 비행기 편을 변경하게 되어 일정이 지연되는 등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러한 역경들을 헤쳐 드디어 인도 땅을 밟게 된 것이다!
팀원들과 12시 30분 인천공항에서 모인 뒤 체크인을 하기 위해 케세이 퍼시픽 비행사의 창구로 향했다. 그런데 체크인과 인도에 도착해 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필요한 인도 전자비자 서류를 잘못 출력해왔다는 사실을 그 곳에 가서 알게 됐다, 부랴부랴 프린트가 가능한 곳에 가서 서류를 출력해온 뒤에야 무사히 체크인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하마터면 탐사 시작부터 애를 먹을 뻔했다. 경유지인 홍콩을 거쳐 자정이 되어서야 인도에 도착했다. 배낭을 메고 공항 게이트를 막 나서자마자 느껴지는 더위와 습함,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우리를 향해 쏠리는 인도 사람들의 시선들. 그때서야 ‘와~ 인도구나. 인도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 확 들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던 인도 식당 지인의 도움을 받아 파하르 간즈에 위치한 숙소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하루 한줄 정리!!
보민曰 새벽 시간에 도착한 우리를 잠도 안자고 기다렸다 숙소까지 데려다주신 주리 지인 분에게 너무 감사했다. 피부에 느껴지는 덥고 습한 날씨... 내가 정말 인도에 왔구나 싶었다.
인도 첫 번째 숙소 있었던 ‘배드 버그’(일종의 빈대) 때문에 얼굴과 몸에 물린 곳이 팅팅 부었었다. 첫 시작부터 녹록치 않다.
주리曰 아침 일찍 출발해 광주에서 인도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비행기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는데도 왜 이리도 힘든지. 자정이 되어서야 도착했던 인도는 밤임에도 불구하고 꿉꿉함 그 자체였다. 이제부터 고생 시작이다!
동현曰 김해 공항에서 인천 공항까지 가는 길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맛있는 햄버거를 사주셔서 힘든게 싹 가셨다.
<8월 4일> “향신료의 메카 카리 바올리, 그리고 인도친구 쇼바”
이른 아침 탐사 일정을 위해 서둘러 준비를 하고 숙소 밖을 나왔다. 우선 15일간의 여정 속에서 한국과 원활한 연락을 위해 필요한 심(SIM)카드 발급과 우리의 세 번째 도시인 레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날리를 거쳐야했기에 마날리 행 버스 티켓을 구하기 위해 메인 바자르로 향했다. 파하르간즈의 메인 바자르로 말할 것 같으면 여러 상점과 레스토랑, 호텔 등 여행에 필요한 거의 모든 시설들이 자리잡고 있는 여행자 거리다. 인도에서의 첫 끼를 한식으로 든든하게 해결하고 모든 업무를 본 뒤 다음 일정으로 본격적인 공정무역 상품 탐방을 시작했다. 델리에서 우리 팀의 공정무역 주요 아이템은 향신료였다. 세계 7위의 국토 면적을 가지고 있는 인도에는 인종, 종교 등에 따라 다양한 요리가 있다. 그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인도 요리를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향신료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세계 향신료 생산량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인도에서 향신료는 단순히 맛과 향, 음식의 색깔을 위한 첨가물이 아니다. 열대 기후에서 음식이 쉽게 상하는 것을 막아주고, 우리의 한약재와 같이 약용 혹은 건강식품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때문에 인도에서 향신료는 음식 뿐 아니라 대부분의 스낵, 음료에 첨가된다.
우리는 다양한 향신료들을 구할 수 있는 대형 재래시장 찬드니촉 시장을 찾기로 했다. 찬드니촉은 사자하나바드 시절에 가장 번화했던 거리로 현재는 델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재래시장으로 꼽히고 있다. 이 찬드니촉에서도 서쪽 끝에 위치한 카리 바올리 시장은 전 세계에서 생산된 각종 향신료가 거래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향신료 도매시장이기도 하다. 설립 당시 향신료가 주거래 물품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곡물, 말린 과일, 설탕, 소금 등 인도산에서 외국 수입산에 이르기까지 갖은 향신료와 식재료들이 거래되고 있다.
우선 뉴델리 역에서 올드델리에 위치한 찬드니촉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이용했다. 인도는 지하철이 군사시설이기 때문에 이용하기에 앞서 모든 소지품들을 X-RAY에 통과시키고 몸 곳곳 검사를 받아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표를 사고 소지품 검사를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피난처가 따로 없었다. 다행히 현지인들의 배려로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지하철에 오를 수 있었다.
찬드니 촉 역에 도착해 릭샤를 타고 카리 바올리 시장으로 이동하였다. 시장에 들어가자마자 알싸하고 매콤한 커리 파우더, 마살라들의 냄새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재채기를 했다. 길게 늘어선 시장 골목에는 노점상부터 시작하여 크게는 10평이 이르기까지 다양한 면적의 상점들이 줄지어있었다. 대부분의 상점에서는 각양각색의 향신료 자루들을 늘어놓은 채 장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팀은 향신료를 판매하는 여러 상점에 들어가 인터뷰를 했는데, “마살라, 커리 파우더들의 원산지는 어디인지?”, 또한 “다른 나라로도 수출을 하는지?” 등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카리 바올리 시장에 있는 향신료들은 캬슈미르 지방 등 다양한 지방에서 가져오고 있으며, 다른 나라와의 수출은 큰 공장이나 상점에서 이루어지지 작은 소매업 가게에서는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인터뷰 후 가게 사장님께서는 우리에게 맛보라며 건과일 하나씩을 쥐어 주셨다. 우리가 동시에 그 건과일을 맛본 순간 속았다 싶었다... 너무 떫은 맛에 뱉고 싶었지만 우리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맛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사장님이 건내준 건과일은 살구를 말린 것이었다.
우리에게 재채기부터 떫은 말린 살구까지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던 카리 바올리는 인도 전역의 향신료, 마살라, 건과일들이 한 곳에 모여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장소였다.
탐사 일정을 마친 뒤 우리는 특별한 인연을 만나기로 했다. 바로 한 달 전 진행했던 썸머스쿨에서 10일간 함께 생활했던 쇼바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인도에서 꼭 다시 만나자 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낯선 인도 땅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인도의 소비 문화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 함께 사켓 시티워크로 지하철을 타고 이동 했다. 인도의 자하철 맨 앞 칸은 항상 여성 전용 칸이다. 남자인 동현이도 함께 한적한 여성전용칸에 탑승했는데, 탑승하자마자 인도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결국 그녀들의 뜨거운 눈빛을 못이기고 일반 칸으로 돌아갔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시티 워크까지 릭샤를 이용했다. 인도의 또 다른 교통수단인 ‘릭샤’는 종류가 크게 릭샤, 사이클릭샤, 오토릭샤가 있다. 먼저 릭샤는 사람이 끄는 인력거로 현재는 많이 없어져서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델리에서는 보기 힘들다. 그리고 사이클릭샤는 말 그대로 사이클 즉, 자전거 뒤에 사람을 싣고 움직이는 이동수단이다. 사이클릭샤는 멀지 않은 거리를 이용할 때 싼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토릭샤는 세 발 달린 오토바이로 움직이는 이동수단이다. 당연히 셋 중에 가장 가격이 비싸다. 하지만 조금 먼 거리를 가거나 많은 사람이 타려고 할 경우에는 오토릭샤로 이동하는 것이 제일 낫다.
오토릭샤를 타고 5분 정도 도로를 달리니 ‘시티워크’가 눈에 보였다. 우리는 먼저 배가 고파서 밥을 먹기로 했다.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이것저것 그동안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기회가 되어 쇼바가 현재 재학 중인 JNU(Jawaharlal Nehru University)를 구경하게 되었다. 학교는 정말 상상 외로 큰 캠퍼스를 갖고 있었다. 캠퍼스가 아니라 큰 마을 정도의 규모였다. 캠퍼스가 큰 만큼 그 안에 우체국, 옷가게, 마트 등 없는 게 없었는데 심지어 경찰서까지 있었다. 그만큼 캠퍼스 안은 무척이나 안전한 곳이었다. 또한 나무들이 무성하고 숲이 우거져 델리의 주변 풍경과 극명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인도는 6월에 학기가 시작하기 때문에 캠퍼스에서 많은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저마다 한가롭게 캠퍼스를 거니는 모습이 우리나라 학생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인도 현지 학생들과 유학생들이 생활하고 있는 기숙사와 문구점 등도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는 기념으로 JNU 마크가 새겨진 카라티를 단체티로 구매했는데, 쇼바가 우리학교에 와서 ‘한국외대’라고 적힌 티를 사는 셈이라 입고 다니기 민망할 수도 있었지만 JNU 학생인 듯 잘 입고 다녔다. 늦은 저녁을 학생식당에서 해결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와 학식처럼 외부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메뉴들이 눈에 띄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인도식 튀김 만두인 사모사와 커리, 짜파티(인도 전통 밀가루 빵) 등 다양한 메뉴들을 먹을 수 있었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늦어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쇼바와 우리는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떼었다. 우리를 위해 시간을 만들고, 네루 대학교까지 소개시켜준 쇼바에게 고마운 하루였다.
기나긴 일정을 모두 끝낸 뒤 우리는 다시 숙소가 있는 파하르간즈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델리에서의 탐사 일정을 무사히 마친 뒤 다음 도시인 마날리로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며 하루를 마감했다.
참고자료:
신민하, 「아시아 최대의 향신료 도매시장-카리 바올리 시장」, 세계의 시장을 가다(네이버 캐스트),
접속일자-2015.08.23.,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879&contents_id=95188
********************************우리들의 하루 한줄 정리!!보민曰 우리와 하루종일 동행해준 인도친구 쇼바.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향신료 탐방, 네루 대학교 탐방도 좋았지만, 먼 인도땅에서 또 하나의 좋은 ‘인연’이 생긴것 같아 감사한 하루였다. (카리바올리에서는 코마개가 필수품인것 같다. 에에취!!!!)
주리曰 코를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던 향신료 시장 탐방. 없는 게 없다는 찬드니 촉에서는 신나게 곡물 통을 뛰어다니는 라따뚜이 친구(쥐)도 만날 수 있었다. 여름의 인도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땀은 줄줄 쏟아지는데 어딜 가도 사람들로 붐비기까지. 하루빨리 델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 이었다.
동현曰 오랜만에 델리에 와서 많이 설렜다. 날씨가 많이 덥긴 했지만 그래도 재밌는 하루였다.
<8월 5일> “마날리로”
마날리로 떠나기 위해 아침 일찍 숙소 체크아웃을 했다.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메인 바자르로 건나갔다. 짊을 맡기고 마날리로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파하르간즈 메인 바자르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앞서 말했듯 파하르 간즈에는 정말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그만큼 볼 것도 구경할 것도 많은 곳이다. 호기롭게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35도를 웃도는 날씨 탓에 조금만 걸어도 땀이 줄줄 쏟아졌다. 더위가 조금이나마 가실까 노점상에 파는 10루피(약 180원)짜리 망고주스를 먹어봐도 더위가 가시는 것은 찰나. 결국 더위에 지쳐 메인 바자르 탐방은 길게 하지 못하고 마날리 출발 직전까지 카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가기로 했다. 정신없는 파하르간즈와 비오는 날과 걸맞는 노래가 흐르는 평화로운 카페 안은 너무 대조적이었다.
출발 1시간 전 카페 밖을 나오니 아뿔싸.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는 한참 전부터 오고 있었는지 이미 길의 군데군데에는 흥건한 웅덩이가 생겼다. 카페에서 짐을 맡긴 곳까지의 거리는 100미터 가량. 우산도 우비도 없던 우리는 망설임 없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생각보다 빗줄기는 굵어 순식간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 젖은 몸으로 뒤늦게 우비를 입고 배낭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 버스에서 먹을 주전부리(삶은 감자를 샀다)를 이것저것 사서 출발 장소인 실라 극장으로 가기 위해 릭샤를 탔다. 하지만 비가 온 탓에 릭샤는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우리는 행여나 버스를 놓칠까봐 애가 타기 시작했다. 파하르 간즈 메인 바자르에서 큰 도로로 나가는 길에는 군데군데 빗물로 인해 생긴 웅덩이와 함께 사람, 자동차, 릭샤부터 소, 개까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차들은 서로 앞으로 가기 위해 견적을 빵빵 울려대는 탓에 더욱 정신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우리의 최후의 수단은 바로 걸어가는 것. 그 곳에서 실라 극장까지는 약 1km였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우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도 모르면서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는 패기. 평소엔 무겁기만 하던 배낭도 조급함이 앞서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지다가던 행인들에게 길을 물어물어 다행히 출발 예정 시간 5분 전 출발 장소인 실라 극장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와 같은 버스를 타는 듯한 사람들이 일찌감치 모여 있었다. 하지만 5시 예정이었던 사설버스는 서둘러 온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도통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왜 ‘인디아 타임’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평화로운 카페에 좀 더 앉아있다 나올걸 그랬다. 극장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우리들이 신기했는지 지나가던 인도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를 구경했다. 약 한 시간가량 기다린 끝에 저 멀리 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타게 될 버스는 약 40명이 탑승할 수 있는 대형 버스였다. 인도는 면적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델리에서 마날리까지 예상 소요시간은 약 15시간 정도. 하지만 비도 오고 퇴근 시간까지 겹친 탓인지 델리를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도심을 달리면서도 차들 사이로 도로 한가운데를 유유자적 걸어가는 소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하나 소를 때리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이게 바로 소를 신성시 하는 인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 아닐까 한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 좌석이 그날 밤 우리들의 잠자리였지만 노곤한 탓에 누구보다 편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들의 하루 한줄 정리!!
보민曰 버스에서 먹은 식은 삶은 감자는 꿀맛이었다. 한국에 와서도 집에서 감자를 삶아 먹었지만 이 버스에서 먹었던 감자맛이 안난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먹던 다 식어버린 감자... 그 감자맛이 그립다^^
주리曰 장대비를 흠뻑 맞고 마날리로 떠나던 날. 6차선 위를 달리던 우리와 함께 유유자적 소도 함께 거닐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소를 나무라지 않는 이 곳이 바로 인도.
동현曰 마날리로 가는 버스가 마음에 안든다. 버스에서 비가 새서 가는 내내 몸 반쪽이 축축했다.
<8월 6일> “인도의 스위스 마날리”
17시간의 긴 여정 끝에 오전 11시 경 우리는 드디어 마날리에 도착했다. 마날리는 인도의 북서부 히마찰프라데시 주에 위치해 있으며 히말라야 산맥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어 ‘인도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도시다. 마날리에는 3개의 마을이 조금씩 떨어져 있다. 뉴 마날리가 중심이고 북쪽으로 올드 마날리가, 동쪽으로는 온천이 있는 바쉬쉿 마을이있다. 우리는 세 곳 중 바쉬쉿으로 숙소를 정했다. 덥고 습했던 델리를 벗어나 마날리에 오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선선한 날씨와 공기가 벌써부터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바쉬쉿이 온천으로 유명한 탓인지 외국인 여행객과 함께 현지인들로도 가득했다. 골목에서는 뜨거운 온천수가 24시간 호스를 통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간 식당에서는 노천온천이 한눈에 보였다.(남자들이 팬티만 입고 바물에 들어가 씻고 나오는 모습을 감상?하며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온천을 즐기는 듯 했다. 인도에서 온천이라니. 생각해보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뒤 챌린지 활동을 위해 마날리에서 유명한 숄과 카펫을 탐방해보기로 했다. 숄과 카펫이 특산품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보니 들어서는 초입부터 숄 가게와 공장들이 즐비해 있었다. 버스를 예매했던 여행사 아저씨의 도움으로 카펫과 숄을 가내수공업으로 제작하는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가정에서는 베틀을 이용해 직접 하나하나 숄들을 만들고 있었다. 두건을 쓴 마날리 어머니들이 한땀한땀 직접 손으로 만들고 있는 광경을 보며 마날리 수공예품들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귀해보였다. 우리 팀이 방문했던 가정은 해외와 거래나 무역을 하지 않지만 가정에서 만들어낸 숄이나 카페트 등을 올드&뉴 마날리에 있는 중심거리 시장에 판다고 했다. 그들의 정성, 그리고 그들만의 기법이 담긴 수공예품들을 대형 에이전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에 직접 거래 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다. 마날리 중심 에이전시는 이들에게 공정한 가격을 제시한다고 하지만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각 나라 사업체들과 직접 무역을 한다면 그들에게 더욱더 나은 조건을 제시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날리 가내 수공업 탐사 활동을 마친 뒤 오후에는 바쉬쉿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마을을 따라 길게 늘어선 상점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조그만 마을이지만 관광으로 유명한 지역이여서 그런지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가게들이 많았다. 한 상점을 지나가다 특이한 모양의 모자를 발견했다. 티벳인들이 주로 쓰고 다니는 모자인데 낮은 원통 모양에 앞부분이 천으로 수놓아진 알록달록한 색감을 갖고 있었다. 팀원들과 함께 모자를 하나씩 구매하고 이것저것 구경하고 나니 저녁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서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굵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델리에서 이미 일회용 우비를 써버린 탓에 우비도 우산도 갖고 있지 않았던 터라 숙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저녁식사를 위해 급조한 비닐을 몸에 씌운 채 장대비를 뚫고 나갔다. 조그만 마을이라 가로등 하나 제대로 설치되어있지도 않아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비를 뚫고 식당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고 저녁식사 메뉴로는 탄두리 치킨을 먹기로 했다. 탄두리 치킨이란 향신료와 요구르트로 양념한 닭을 탄두리라는 화로에 구워낸 음식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인도음식이다. 우리나라에서 먹었던 탄두리 치킨과 맛은 비슷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우리들의 하루 한줄 정리!!
보민曰 인도의 스위스라는 마날리. 명성대로 구름이 걸쳐진 산의 모습은 보면 숨이 트이는것 같았다. 엄마 아빠랑 몇 달 정도 휴양하러 오고 싶은 곳이다.
주리曰 모든 인도가 이 곳 만 같으면 몇 년이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무척이나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동네 바쉬쉿. 마누 신의 보살핌을 받는 곳이라 더욱 그랬나보다.
동현曰 마날리는 처음인데 정말 좋은 도시라는 것을 느꼈다. 한적하니 사람도 별로 없고 공기도 좋았다. 휴양 온 기분이었다.
<8월 7일> “마날리 공정무역 탐사”
아침 일찍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씨 탓에 원래 계획했었던 패러글라이딩은 결국 하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폭포를 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숲 속은 이곳이 인도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무척이나 깨끗하고 고요했다. 다리를 건너 숲 속을 지나가니 점점 폭포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폭포가 크고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마날리의 푸른빛의 하늘과 구름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사람들이 왜 마날리를 인도의 스위스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폭포에 도착했을 때 한 현지인 가족이 큰 제사를 드리고 있어 대가족이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함께 폭포 아래에서 음식을 준비해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폭포에 어우러진 제사를 드리는 광경은 그림을 보는것 같았다. 폭포 트래킹을 마치고 릭샤를 타고 뉴 마날리로 향했다. 한적한 바쉬쉿과는 뉴 마날리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인터뷰를 위해 현재 해외로 수출하고 있는 한 카페트와 숄 가게를 찾아갔다. 다음은 마날리의 현지 숄가게 인터뷰 내용이다.(서기를 토대로 작성)
A : 안녕하세요 저희는 한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인도를 전공하고 있고, 공정무역 관련 탐사를 위해 북인도 왔습니다.
B : 공정무역?(fair trade라는 말을 알지 못했다) 그게 뭐야? 어쨌든 만나서 반가워!
A : 공정무역은 쉽게 말해 국가 간 동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무역, 즉 공평한 거래라는 뜻입니다. 저희는 이 가게에 있는 숄이나 카페트들을 만드는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받고, 또 이런것들이 어떻게 해외에 수출되는지, 정당한 값을 받고 있는것인지 등을 조사하러 나왔어요.
B : 아 그렇구나. 우리 가게는 여러 나라와 거래하고 있어! 물론 가게에서 직접 하는게 아니라 대형 에이전시를 통해 거래 중이지
A : 그 에어전시는 어디 있어요?
B : 여기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A : 그 대형 에이전시를 통해 다른 나라에도 수출하면, 그들은 당신이나 손으로 숄을 짜는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고 있나요?
B : 응 나는 내 월급에 만족해. 그리고 가내 수공업 노동자들도 그들이 한 일에 따라, 즉 일의 성과에 따라 다른 돈을 정당하게 받고 있고 임금에 만족하고 있는 편이지.
A :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이전시가 주는 돈에 만족하며 일을 하고 있군요
B : 그런셈이지
A : 다른 나라에는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수출하고 있나요?
B : 대형 에이전시에서 다른 나라 기업들과 연결해서 수출하기도 하고, 우리 가게 같은 경우는 중국과 직접 협약을 맺어 이것들을 팔고 있어. 숄하나의 가격은 물량, 환율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대량으로 수입하기 때문에 싼 가격에 팔고있지.
A : 그럼 그 수익에 몇 %정도 이것들을 만드는 노동자에게 가나요?
B : 정확하게 말해줄 순 없지만, 노동자들마다 일하는 속도, 만드는 것에 따라 다르게 받지만, 아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임금에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해.
A : 그렇군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나서 소수의 큰 에이전시를 통해 이곳의 상점들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들의 수출 방식이 100% 공정무역 방식이라 할 순 없지만, 다양한 국가에 마날리의 숄들을 수출하며 지역 가내 수공업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고 있는 시스템은 어느 정도 공정무역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만든 숄과 카페트 등은 중국, 일본, 유럽 등 다양한 나라에 수출한다. 에이전시에 경우 중간단계에 있는 상점과, 노동자에게 수익의 일부를 전달하고 그들은 임금에 만족한다고 했다. 관광업을 주로 하는 마날리에서 숄이나 카페트를 만들고 다른 나라에 수출하여 파는 것은 현지 사람들과 마날리 경제에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무역이 더 많은 마날리의 상점에서 이루어져, 관광업을 주로하는 마날리 지역 주민들과 지역 경제가 비수기에도 더욱 활성화 되었으면 좋겠다.
마날리 카페트와 숄 탐방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로컬식당에 들어갔다. 처음 먹어보는 남인도 음식 도사와 탈리(탈리는 “접시”를 의미하는 힌두어로 큰 접시에 여러 음식을 담아 먹는 남인도의 식사이다.) 초우면(중국식 볶음면)을 주문했다. 처음 시도해보는 음식이었지만 성공적이었다.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뉴 마날리에서 걸어 올라가 올드 마날리까지 가보기로 했다. 뉴 마날리와 올드 마날리는 큰 숲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져 있는데, 그 숲은 마날리에서 유명한 산림 보호 구역이다. 아파트 높이의 끝을 알 수 없는 빽빽한 침엽수림 사이를 걷다보면 나무의 긍정적인 기운으로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몇 분 쯤 걸었을까 올드 마날리에 도착했다. 높은 비탈길을 올라가며 주변의 상점들도 구경했다. 며칠 후 갈 판공 초를 대비해 팀원들과 함께 판초를 구매했다. 그렇게 정처 없이 올라가다 보니 한 힌두 사원이 보였다. 마날리의 뜻은 마누신이 있는 곳이란 뜻인데 이 때 마누 신의 이름을 붙여 만든 마누사원이란 곳이었다.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지만 힌두 신을 모시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안식처 같은 공간인 듯 했다.
다시 올드 마날리를 내려오며 뉴 마날리를 가로지르는 산림을 산책하고 숙소가 있는 바쉬쉿으로 돌아 왔다. 다음날 새벽 일찍 마날리를 떠나 레에 가야했기 때문에 숙소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하루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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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민曰 마날리의 자랑인 산림 보호 구역. 숲 속 요정이 튀어나올것 같은 숲길을 흙냄새와 흔들리는 나무 소리와 함께 걷다 보면 온 몸이 힐링되는 기분이었다. 숲에서 얻은 생명 에너지로 지친 몸의 피로가 싹 풀렸다. 마날리... 너무 좋다
주리曰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바쉬쉿의 폭포를 만났다. 바쉬쉿과 정 다른 분위기였던 뉴 마날리, 그리고 올드 마날리와 뉴 마날리를 이어주던 산림 속을 조용히 걷기만 해도 좋았다.
동현曰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하늘이 너무 미웠다. 온천도 있어서 한 번 들어가 볼까 하다가 일단 발만 담가봤다. 발이 없어지는 줄 알았다. 안 들어갔다.
<8월 8일> 레, 죽음의 구간
새벽 2시 우리는 미니버스를 타고 레로 향했다. 히말라야 산맥 속 위치한 레를 향한 육로는 매년 6월부터 9월까지 단 3개월만 개방된다.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고도 3,000~5000m의 비포장도로를 오르락내리락 4번을 거친 끝에야 도달할 수 있는 웬만해서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도시다. 레에 가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행객들은 조그만 버스에 몸을 싣고 달렸다.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았던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에 온통 안개로 뒤덮여버려 가시거리가 불과 2m도 채 되지 않아 보였고 반복되는 비탈길에서는 자칫 핸들을 조금이라도 늦게 틀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차선도 제대로 표시되어있지 않은 1차선 넓이의 이곳을 지나가다 반대편에서 트럭과 버스가 돌진해올 때면 비탈길에 버스를 세우고 상대가 지나갈 때 까지 기다려야했다. 가드레일도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아슬아슬한 도로를 지나며 과연 내가 죽지 않고 레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더 큰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높이 5000m까지 올라가는 탓에 고산병을 피할 수 없었다. 매스꺼움과 두통, 헛구역질 등등 순간 레에 가는 것이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고산병, 멀미약, 두통약을 끊임없이 먹어대고, 잠을 자면 조금이나 덜해질까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막혀오는 숨 탓에 이도저도 못할 지경이었다.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큰 호흡을 반복하기를 수 백 번, 우리의 의지 따윈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영혼 없이 의자에 쓰러져있었다. 우리가 고산병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한 인도인 관광객은 옆에서 요가를 하고 있었다. 인도인이 정말 생명력이 강한 종족이라는 것을 느꼈다.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우리는 경찰초소에서 총 4번의 여권 검사를 받아야했다. 이 길을 통과하는 외부 인들의 정보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곳이었다. 레가 속한 잠무·카슈미르 주는 현재도 중국, 파키스탄과 국경분쟁 중에 있는 지역 탓인지 철저한 검사라 이루어졌다. 차 안에도 어둠이 내려앉고 고산병과 19시간의 사투 끝에 우리는 드디어 레에 도착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마날리에서 레로 가는 죽음의 구간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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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민曰 초록색, 노란색 위산까지 섞인 토사물을 구경?시켜 준 고산병...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주리曰 마날리에서 레로 가는 지옥의 구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순간들 뿐 이다. 휴, 다음엔 돈 많이 벌어서 비행기 타고 가야지.
동현曰 저녁에 레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고산병이 그렇게 무서운 건지 모르고 있었다. 앞머리가 길어 너무 거슬려서 머리를 잘랐다. 싼게 비지떡인 것 같다..
<8월 9일> 고산지역 적응기
얼마나 잤을까? 레의 따스한 햇살에 눈이 부셔 기상했다. 레가 위치한 라다크는 인도 땅 중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한 히말라야 고원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잠무·카슈미르 주에 속해있지만 지리적으로 파키스탄,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탓에 현재에도 끝이질 않는 ‘국경분쟁’의 중심에 서 있는 곳이다. ‘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라다크는 서부 히말라야 고원의 황량하지만 아름다운 마을이다. 1949년 중국이 공산당에 의해 통일된 후, 중국은 티벳을 자신의 영토에 넣으려 하였고, 달라이라마는 티벳을 떠나 인도 북부의 다람살라로 가서 이곳에 망명정부를 세우며 세계적인 비폭력투쟁을 전개했다. 인도 전역에는 10만 명의 티벳인이 있다고 한다. 라다크 지역 중 한 곳인 레에도 많은 티벳인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들과 너무나도 닮아있는 티벳인들의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어딜가나 ‘옴마니 반메홈’이라고 적힌 불교 천들이 걸려있었다. 또한 시내 곳곳에 있는 티벳불교 사원들을 보니 이곳이 마치 인도이면서 티벳의 모습을 더 띄고 있는 듯 했다.
점심식사를 마친 뒤 다음날 판공 초로 떠나기 위해 여행사를 들렀다. 레에 온 이유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판공 초였는데 드디어 그 곳에 가게 된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설레였다. 우리들의 버킷리스트 지역인 판공초행 지프를 예약하기 위해 여행사를 찾아갔다. 우리가 찾아간 여행사는 ‘강용해 여행사’였는데, 처음 상호를 보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인가? 하고 의아해 했지만 막상 가보니 현지 바야지(아저씨를 부르는 명칭)가 계셨다. 알고보니 전라도에서 온 한국인 여행객이 아저씨에게 지어준 이름이고, 용해 바야지는 그 이름으로 여행사 운영을 하고 계셨다. 이름 탓인지 여행사 사무실에는 한국인들이 붐볐다. 판공초행 지프를 예약하고 탐사를 하러 레의 중심거리로 이동 했다.
레에서의 첫 번 째 탐사 활동으로 인도판 아름다운 가게라고 할 수 있는 좀싸(Dzomsa)에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무료로 생수를 리필해주고 친환경 재료들만을 사용해 만든 제품들과 현지 여성들의 수공예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또한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세탁을하는 ‘Laundry service'도 함께 운영 중이었다. 좀싸는 일부 수익을 현지 농업과 지역 주민을 위한 기금으로 쓰인다. 건조한 레지역에서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싼 가격의 물을 제공하고, 친환경 지역 특산품을 팔면서 지역 주민에게, 그리고 환경보존에 기여하는 좀싸 기업이 인상 깊었다. 친환경 제품 붐이 일었던 우리나라에서 기업 또는 개인 사업체가 작은 사업체인 좀싸와 협력을 맺어 라다크만의 특산품과, 수공예품을 거래한다면 어떨까? 좀싸와 같은 사회적 단체가 인도 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좀싸 탐방을 마치고 이번에는 레 시내를 구경하기로 했다. 레에 도착한지 하루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빨리 걷을 때면 어김없이 숨이 가빠왔다. 숨이 가빠올 때면 재촉했던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발을 떼곤 했다. 정처 없이 가다가 마주한 산에 올라가니 레 시내가 한 눈에 보였다. 산에서 내려와서는 골목길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양계장부터 시작해 과일가게, 미용실, 세탁소 등등 정겨운 모습들이 펼쳐졌다. 판공 초로 떠나기 전 오랜만에 한식을 먹으며 든든한 식사를 마쳤다. 레에서의 두 번 째 밤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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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민曰 레지역도 고지대라 그런지 걷다 보면 금방 숨이 찼다. 레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것 같다.
주리曰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던 신기한 동네다. 공기가 이렇게도 소중한 것 이었구나. 레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나무 하나 없어도 아름답기만 하다. 우리와 똑 닮은 티벳 꼬맹이들을 볼 때는 여기가 한국인지 인도인지 헷갈릴 정도.
동현曰 감기 몸살이 와서 너무 힘들었다. 다시는 마날리에서 레 구간을 차로 오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8월 10일 ~ 11일> 우리들의 버킷리스트, 판공초에 가다
아침 일찍 판공 초로 향하기 위해 나섰다. 우리의 일정은 판공 초에 도착해 그 곳에 위치한 마을에서 1박을 하고 오는 총 1박 2일의 코스였다. 레에서 150km 거리에 있는 판공 초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기수호 중 하나로 인도와 티베트에 걸쳐있는데 그 길이가 134km에 이른다. 판공초로 가기 위해선 또 5000m 이상의 도로를 지나야했다. 좀 익숙해졌나 싶었던 고산병은 마날리에서 레로 향할 때보다는 가벼웠지만 여전히 우리들을 괴롭혔다. 우리 모두가 또 다시 만난 고산병으로 머리가 아픈 가운데 한 인도인 친구가 솜뭉치를 귀에 꽂고 있으면 머리가 덜 아플거라고 말해주었다. 솜뭉치를 양 귀에 꽂고 있으니 고산병의 고통이 훨씬 덜했다. 겨우 귀 하나 막았을 뿐인데 고산병이 나아진 것이다. 신기하고 유용한 팁이었다. 우리는 고산병이 두려워 가고 오는 길 내내 솜뭉치를 귀에 꽂고 있었다. 5시간을 꼬박 달렸을까 판공 초를 가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하는 해발 5,320m의 창 라(Chang La) 고개에 도착했다. 창 라의 도로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자동차도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높은 곳에도 어김없이 구멍가게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판공 초를 오가기 위해 지나가던 수많은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이 곳에 들렀다. 눈에 띈 것은 오토바이를 타고 그 험난한 도로를 가로지르던 바이크 족들이었다. 차를 타고 가도 행여나 떨어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그 도로를 지나가다니 보는 사람이 다 걱정됐다.
창 라를 지나 2시간을 더 달리니 산맥들 사이로 호수가 빼꼼 보이기 시작했다. 호수의 초입에 들어서자 길게 늘어선 호수가 파란 빛을 뽐내며 우리를 반겼다. 바람에 따라 색깔이 다른 판공초의 물빛을 보니 우리의 마음까지 깨끗해 지는것 같았다. 판공초는 황량한 산맥들 사이에서 거짓말처럼 펼쳐져있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경이롭고 또 경이로웠다. 이것 하나 보기 위해 달려온 그 수많은 시간들이 찰나의 순간 잊히는 듯 했다. 영화 「세 얼간이」에서 처음 보았던 그 곳이 바로 내 눈 앞에 있다니! 파란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았던 판공초의 맑은 하늘과 너무나도 투명해 물 속 헤엄치는 물고기가 보이는 호수 물까지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판공초에 물은 바닷물 처럼 짰는데, 원래 현재의 히말라야는 6천만 년 전 바다였던 곳이다. 인도와 아시아 대륙의 충돌로 인해 솟아버린 부분이며, 판공초는 융기할 때 솟아나온 바닷물이 증발하지 않고 호수를 이룬 곳이라고 한다. 실제로 판공초에는 조그마한 새우를 볼 수 있는데 과거 자연현상과 생명체들의 증거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해가 지기 전 서둘러 우리가 묵을 홈스테이 가정으로 향했다. 이곳 판공 초에 자리 잡고 살고 있는 티벳인 가정이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일행들과 함께 캠프파이어를 준비 한 뒤 직접 사온 감자와 닭을 손질하고 불에 익히기 시작했다. 저녁 준비를 마치고 나니 금세 날이 어둑해졌다. 캠프파이어를 앞에 두고 앉아 올려다 본 하늘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별들을 본 게 얼마만인지. 책에서만 보았던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가 저 멀리서 반짝였다. 별을 바라다보고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음식들이 완성되어 갔다. 홈스테이 가족들과, 운전 기사 아저씨와 가족처럼 함께 둘러앉아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리와 멀고도 먼 이 곳에 살고 있는 그들이지만 우리와 똑 닮아있는 모습 탓인지 낯설지 않았다. 바깥은 무척이나 추웠지만 함께 있는 그 공간은 무척이나 편안하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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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민曰 버킷리스트 이뤘다! 판공초의 깊은 자락인 메락까지 들어간 우리. 그리고 마치 가족처럼 우리를 맞아준 홈스테이 가정. 라다키 부모님 그리고 여동생까지 생겼다. 판공초의 깨끗한 물과 닮았던 그들. 비록 하루였지만 정들었던 시간이었다. 언젠간 아이와 함께 있는 라다키 여동생을 다시 보러 갈 날이 있기를..
주리曰 판공 초, 판공 초에 드디어 오게 되다니! 투명한 빛의 호수와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까지, 모든 것들이 완벽했다. 바깥은 너무나 추웠지만 라다키 가족들과 함께한 식사는 너무나도 따뜻했던 판공 초였다. 판공 초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또다시 레. 오는 길에 현지인에게 배운 고산병 극복 팁 덕에 편안하게 올 수 있었다. 이걸 마날리에서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레에 도착하자 먹던 김치찌개 맛은 환상의 맛이었다.
동현曰 판공초다. 말로만 듣던 판공초다. 내가 드디어 봤다. 나도 세 얼간이가 된 기분이었다.
<8월 12일> 레 공정무역 탐사 ‘에꼴로지 센터’
오전에 스리나가르 행 버스 티켓을 구매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레 메인 바자르 근처에 위치한 버스터미널에서 잠무·카슈미르 주에서 운영하는 공영버스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예매 시스템이 전산화 된 우리나라와 달리 안내판에 그려진 좌석을 직접 고르고 날짜부터 시간까지 하나하나 직접 손으로 써서 티켓을 만들어 주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예매를 마치고 메인 바자르(중심 시장가)로 향하는 길 들른 폴로경기장에서는 며칠 뒤 있을 독립기념일 기념행사에서 선보일 무대를 연습하고 있는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형형색색 옷을 맞춰 입고 줄을 맞춰 선 백여 명의 학생들은 며칠 뒤 있을 행사를 위해 열심이었다. 그 때 울려 퍼진 노래를 들은 우리는 귀를 의심했다. 바로 우리나라 2NE1의 ‘Go away’란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먼 인도 땅에서 한국 노래를 듣게 되다니! 그것도 인도의 중요한 기념일 중 하나인 독립기념일 기념행사에서 한국 노래를 튼다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우리는 “이 노래 한국 노래야!!”라고 주변 학생들에게 얘기하며 타지에서 듣는 한국 가요에 신선함과 뿌듯함을 느꼈다.
점심식사를 마친 뒤 라다크 지역 여성들을 위한 공정무역 에꼴로지 센터(Ecology Centre)를 방문하였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가 건립한 친환경을 소재로 한 연구소 겸 전시관인 이곳은 라다크 여성들이 직접 제작한 다양한 친환경 기념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물이 귀한 레 지역 사람들에게 물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에꼴로지 센터에서의 활동을 마친 일몰을 보기 위해 산티 스투파에 올랐다. 산티 스투파(Shanti stupa)는 일본 불교 종파 중 하나인 일련정종(日蓮正宗)이 세계평화를 기원한다는 목적 하에 건립한 일종의 평화기념비다. 하얀 색 둥근 형태를 띠고 있는 이 탑은 레에서도 꽤 높은 곳에 위치하여 레의 전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설산으로 둘러싸인 풍경과 일몰이 어우러져 장관을 빚어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티 스투파에서 멍하니 일몰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지고 그렇게 레에서의 마지막 밤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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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민曰 레에서의 마지막 날. 스리나가르행을 결정한 우리를 걱정해준 숙소 아저씨, 판공초의 잊지 못할 시간을 선물해준 강용해 여행사, 그리고 라다키 가족, 해맑게 웃던 아이들...레에서의 시간은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선물해준 잊지 못할 시간이다.
주리曰 에꼴로지 센터에서 만났던 라다키 아주머니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계속 생각이 났다. 산티스투파에서 바라보던 레에서의 마지막 일몰. 난간에 기대어 아무 생각 없이 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던 그 순간이 그리워진다.
동현曰 스리나가르로 가기 전 레를 둘러보는 날이다. 시장도 가고 노을도 봤다. 레는 정말 아름다운 곳인 것 같다. 빨래가 잘 말라서 너무너무 행복하다.
<8월 13일> 위험지역 스리나가르로
레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스리나가르 행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분쟁지역이라 불안하기도 하고 떨렸지만, 전공 교수님이 아름답다고 극찬했던 곳을 가는 것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레에서 스리나가르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20시간. 다행히 스리나가르로 가는 길은 고도가 점점 낮아진다고 하니 다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버스는 20시간을 달리기에 너무도 좁고 더러웠다. 엉덩이를 딱 붙여 앉아야만 세 명이 탈 수 있는 의자였다. 어느새 버스는 출발하고 열심히 달리던 중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버스가 들썩이더니 이내 멈춰 섰다. 잠을 자고 있던 우리는 놀라 일어나보니 버스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는 것이다. 버스는 아래에 강이 흐르는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정지해 있었다. 깜짝 놀란 모든 승객들은 도로 한 가운데 내렸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자동차 보험 직원이 달려와 해결해주었을 일인데 이곳은 인도였다. 버스 기사님이 운전도 하고 수리도 해야 했다. 타이어를 교체하기 위해서는 버스를 들어 고정시켜야 했는데 이 때 필요한 연장이 없어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우리 버스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내 차를 멈춰 세우고 무슨 일인지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너도 나도 있는 연장을 꺼내어 타이어 교체에 힘을 더했다. 큰 버스의 바퀴를 여러명의 아저씨들이 힘을 합치니 금방 갈았다. 결국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타이어는 교체되었고, 우리는 다시 버스에 탈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인도에서 여행을 할 때마다 간혹 오지랖 넓은 사람들을 만나 곤혹스럽고 귀찮을 때가 있지만, 오늘은 타인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따뜻한 정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제 일인 양 발 벗고 나서준 인도인들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무사히 스리나가르에 갈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들의 하루 한줄 정리!!
보민曰 하필 인도 독립 기념일 위험한 때에 맞춰 스리나가르에 가다니. 버스 티켓을 구매하고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까지 스리나가르행을 고민했다.
주리曰 스리나가르로 여정 출발. 좁디좁은 공영버스는 처음 1시간은 즐거웠지만 나머지 19시간은 고통스러웠다. 버스를 하도 많이 타니 이제 시간 때우는 요령과 잠만 늘었다.
동현曰 버스라니이이이이이이이이이 또 버스를 탄다는 게 너무 싫었다. 의자 옆에 팔걸이가 없어서 밤에 자는 동안 몇 번이나 자리에서 떨어졌다. 아팠다...
<8월 14일> 스리나가르, 혼란 속 평화 ‘달레이크’
밤새 칼바람을 맞으며 잠을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날이 밝아있었다. 좁고 딱딱한 의자에서 장장 20시간을 앉아있었더니 목이며 허리며 어느 곳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버스에 앉아 차창 밖으로 바라본 스리나가르의 풍경은 그동안 보았던 인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우선 가장 눈에 띈 것은 사람들의 옷차림. 인구의 대부분이 힌두교인 인도와는 달리 잠무카슈미르 지역은 인구 대부분이 무슬림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남자들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가운 같은 흰 옷과 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골무 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가게의 간판들은 힌두어가 아닌 우르두어가 적혀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은 인도지만 전혀 다른 풍경의 모습을 발견하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9시경 우리는 최종 목적지인 스리나가르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도착했던 날은 인도의 독립기념일의 전 날. 거리 곳곳에 무장하고 서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니 삼엄하고 긴장감이 흐르는 모습이었다. 스리나가르 지역은 파키스탄과 인접해 있는 위치 특성상 해마다 끊임없이 분쟁이 발생하고 있고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근까지도 불안정한 정세를 보이고 있는 지역이다. 실탄으로 무장을 한 군인들이 삼엄한 눈빛으로 경계태세로 근무를 선 모습에 자동으로 시선이 바닥을 향하게 했다.
스리나가르 중에서도 달 레이크 인근 지역은 그 위험성에서는 안전이 보장된 ‘세이프 쉴드 지역(Safe Shield Area)’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따라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우리는 달레이크의 게이트 쪽에 숙소를 잡게 되었다. 간단하게 짐을 풀고 샤워를 한 뒤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로컬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고르고 식당의 양해를 구해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을 드디어 개시하기로 했다. 여행 도중 힘들 때 먹으려고 열흘가량 애지중지 모셔온 컵라면을 드디어 먹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이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한국에서 먹을 땐 그 소중함을 몰랐지만 타지로 나오니 컵라면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컵라면과 커리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본격적인 파시미나 탐방을 위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독립기념일 때문에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카슈미르 지역의 사람들은 인도 정부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독립기념일과 그 전후로 모든 상점들의 문을 닫는 일종의 시위를 한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이유를 살펴보자면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한 나라였다. 그런데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인도와 파키스탄은 두 개의 나라로 쪼개졌고 이 때 카슈미르는 파키스탄이 아닌 인도를 선택했는데, 대부분의 카슈미르 주민이 무슬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힌두교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카슈미르를 둘러싼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전쟁이 세 차례나 이어졌고, 90년대엔 카슈미르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단체까지 출현했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이 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파시미나가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과정을 알고 싶어 스리나가르에 찾아왔지만 시작부터 쉽지가 않았다. 사실 우리 팀이 가장 기대했던 공정무역 아이템이 스리나가르 지역의 파시미나였기 때문에 더욱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정보를 구하기 위해 거리에 문을 연 파시미나 가게에 들어가 봤지만 번번이 실패하던 찰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사진관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스리나가르 여정에서 아주 큰 도움이 되어주신 분을 만나게 되었다.
사진관 아저씨는 갑자기 우리가 가게 안으로 들어와 이것저것 물어봐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선뜻 나서서 친절하게 우리를 도와주셨다. 우선 자신의 지인들에게 연락해 현재 가동 중인 파시미나 수공업 공장이 있는지 물어봐주었다. 그렇게 연결된 파시미나 업체와의 간단한 만남 이후 마침 무슬림들의 점심 예배 시간이 되어 근처에 위치한 이슬람사원 모스크에 방문하게 되었다. 이슬람에서는 하루 중 해가 뜨기 전, 검은색과 하얀색이 분간되는 아침, 해가 중천에 있을 때, 검은색과 하얀색이 분간되는 저녁, 밤 이렇게 총 다섯 번의 예배를 한다. 모스크에 도착하기 전 멀리서부터 길거리 곳곳의 스피커에서는 이슬람 교리인 코란을 읊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리나가르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슬림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모스크는 예배를 하기 위해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하지만 모스크에 들어가 예배를 구경하는 것에 통제가 따랐다. 여성들이 모스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머리를 가려야 했으며 본문이 아닌 따로 마련된 별채 같은 곳에서 예배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곳만 그런 것인지 다른 곳도 똑같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성에게만 이러한 제약들이 있다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결국 모스크 내부는 구경도 못해보고 코란 읊는 소리만 실컷 듣고 나왔다.
파시미나 업체와 약속을 잡은 뒤 우리가 향한 곳은 달 레이크였다. 호수 위에는 수많은 보트들이 나란히 줄지어있었다. 이곳에서는 보트들을 시키라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는데 각기 다른 개성으로 형형색색 꾸며진 것이 눈에 띄었다. 사공들과 가격 협상을 하고 우리는 3시간짜리 코스로 달레이크를 구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요하고 잔잔한 분위기 속에 보트에 앉아 휴식을 취할 요량이었던 우리의 계획은 산산히 무너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해가 쨍쨍한 시간에 타서 자외선을 온몸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좀 괜찮아졌다싶으면 우리 보트를 향해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시카라 위에서 관광객들에게 물건을 파는 보트 상인들이었다. 한 보트를 보내면 다른 보트가 오고의 반복이었다. 보트를 타며 눈에 띈 것은 호수 위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집 앞에 앉아 낚시를 하며 보트를 타고 지나가는 우리들과 반갑게 인사해주었다. 해가 져갈수록 선선함이 찾아와 한결 편안한 보트 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스리나가르가 분쟁지역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달레이크 호수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달레이크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을 때 우리는 ‘짜르쯔 날리’란ㄴ 수중 공원에 잠시 들렀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큰 나무 4그루가 가장자리에 심어져 있는 정사각형 모양의 공원이었다. 물 위에 큰 나무가 심어진 공원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평화로운 수중 공원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달레이크의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약 세 시간가량 보트를 타고 한껏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달 레이크의 저물어 가는 노을을 구경했다. 지고 있는 주황빛 해와 스리나가르를 둘러싸고 있는 산 그리고 달레이크까지...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답고 몽환적인 풍경을 우리의 눈과 마음에 가득 담아왔다. 고요하고 평안한 달레이크의 풍경처럼 스리나가르에도 평화가 찾아오길 바란다.
********************************우리들의 하루 한줄 정리!!
보민曰 외교부에서 위험 지역이라 문자까지 왔던 스리나가르. 경찰들의 경계가 삼엄하긴 했다. 어깨를 다 펴지도 못하는 좁은 버스 때문인지 몸 구석구석이 쑤셨다. 달레이크 주변 적당한 숙소를 빨리 찾아 다행이었다. 달레이크를 한바퀴 돌았던 시카라 보트는 이곳이 위험지역인가 할 정도로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주리曰 생각했던 것보다 평화롭진 않았던 스리나가르. 처음 가본 이슬람 모스크는 입장 불가라는 실망감만 안겨주었다. 이슬람은 이해하려해도, 그게 참 쉽지 않은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밍을 잘 못 잡아 땀 뻘뻘 흘리며 탔던 달 레이크 시카라 보트는 그 나름대로 좋은 추억이 된 것 같다.
동현曰 스리나가르에 겨우 도착했다. 착한 사진관 사장님을 만나서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8월 15일> 셧 다운 데이 ‘독립기념일’
우리나라와 같이 8월 15일은 인도의 독립기념일이다. 우리나라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한 것처럼 인도는 우리보다 2년 뒤인 1947년 8월 1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지인들로부터 되도록 독립기념일 오전에는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당부를 들었기에 오전까지는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밖에 나오자 몇몇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카슈미르에 왔으니 그곳의 전통 음식을 먹어보기로 했다. 양고기 시크케밥과 말린 과일들과 견과류를 함께 넣어 볶아낸 볶음밥과 양고기 커리를 주문했다. 볶음밥에 말린 과일이 들어간 음식은 처음이라 걱정도 되었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양고기 커리는 매콤한 맛과 향신료가 어우러져 색다른 커리를 맛볼 수 있었다. 독립기념일로 상점들이 문을 닫아 썰렁하고 심심했지만, 카슈미르 전통 음식도 체험하고 다음날 있을 파시미나 탐방을 위해 준비하는 하루였다.
********************************우리들의 하루 한줄 정리!!
보민曰 모든 상점이 '셧 다운‘했던 독립기념일. 카슈미르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나라와 같은 아픔을 이들도 가지고 있었다. 스리나가르에 더 이상 분쟁과 피의 역사가 쓰여지질 않기를 바란다.
주리曰 우리나라와 함께 인도도 독립기념일을 맞았다. 하지만 조용했던 스리나가르의 독립기념일. 그들의 역사를 알고 나니 이해가 갔다.
동현曰 몸이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그냥 하루 쉴 수 밖에 없었다.
<8월 16일> 스리나가르 공정무역 탐방 ‘파시미나 가내수공업’
어느덧 우리의 마지막 여정인 스리나가르에서도 마지막 아침. 점점 일정은 막바지를 향해갔다. 우리는 델리로 향하는 공항에 가기에 앞서 스리나가르에 온 진짜 목적인 파시미나 탐방을 가게 됐다. 우선 캐시미어는 카슈미르라는 지역에 그 어원이 있으며 카슈미르에서 자라는 산양의 털을 지칭한다. 낮과 밤의 온도차가 심하고 평균 기온이 영하 30도를 육박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산양들은 겨울이 되면 혹한을 견뎌낼 보드라운 털을 자라게하여 몸을 보호하는데, 그 보드라운 털들을 캐시미어라고 한다. 전세계 연간 생산량이 500만kg에 불과한 귀한 직물이다. 그 중에서도 파시미나는 페르시아어로 '울'이라는 뜻의 Pashm과 '보석'이라는 뜻의 Mina의 합성어로 최상급 캐시미어를 지칭한다.
사실 우리 팀이 굳이 먼 스리나가르까지 와서 공정무역 상품으로 파시미나를 선정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탐사를 준비하던 4월, 자료조사를 하던 중 현재 스리나가르의 캐시미어를 한국에서 판매하고 있는 분을 알게 되었다. 보통의 여행자와 같이 인도를 여행하던 도중 파시미나를 알게 되었고 처음엔 일반적인 소비자에서 나중엔 ‘이걸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일 년에 한번 스리나가르를 직접 방문하여 제품을 구입하고 상품을 의뢰한다고 했다. 거래는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양산형 제품이 아닌 가족단위의 소규모 제작을 하는 곳을 중심으로, 동시에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자신들이 1년 동안 거래하는 양이면 그들에게는 엄청난 경제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 가격 설정과 비즈니스적인 거래에 관련해서도 최대한 서로 만족할 수 있는 방향을 항상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소비자들에게는 최상의 제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생산 및 수출보조금을 받지 않으면서 노동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거래야말로 우리가 찾고 있던 공정무역의 취지에 가장 걸 맞는 상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직접 스리나가르에 방문해서 실제로 파시미나 제작공정이 궁금했고, 또 파시미나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직접 듣고 싶었다. 이렇게 우리의 스리나가르 행이 결정된 것이다.
독립기념일 다음날이었지만 사진관 아저씨의 도움으로 다행히 파시미나를 수공업으로 제작하는 공장을 방문할 수 있었다. 외관으로 봤을 때는 여느 가정집과 다르지 않았지만 작업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파시미나를 제작하는 곳에 가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수공업자들은 사람 머리카락의 6분의 1 굵기인 파시미나의 양털을 실로 만들어 옛날 우리 선조들이 베틀로 직조를 했던 것처럼 하나하나 직접 짜고 있었다. 제조업자들은 베틀에 앉아 양털이나 야크 털 하나하나를 큰 바늘에 꿰어 베틀에 넣고 양쪽으로 왔다갔다 했다. 또한 베틀 아래에 있는 페달을 밟으며, 손은 양쪽으로 움직이며 천을 완성해갔다. 동물의 털이 하나의 천이 되는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다음은 파시미나 수공업자 ‘막쑬’씨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A : 안녕하세요! 베틀은 짜는 모습이 멋지시네요!
B : 만나서 반가워 한국에서 왔다고 했지? 멀리서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A : 이곳에 흔쾌히 초대해 주셔서 저희가 감사하죠. 이 일은 얼마 동안 하셨어요?
B : 25년인가? 아니 30년이다. 거의 30년 정도 이 일에 종사했어. 이 일을 하면서 6명의 가족을 먹여 살렸지
A : 가족이 많으시네요!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역할을 하신다 하셨는데, 그럼 이 일을 하면서 받는 수익에 만족하세요?
B : 응 나와 내 가족들은 만족하는 편이야. 하지만 요즘 좀 힘들지
A : 뭐 때문에요?
B : 왜냐하면 공장들이 들어서서 기계로 파시미나를 찍어내고 있기 때문이야. 우리는 손으로 하나하나 만드는 작업이라 아무래도 공장에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지. 그리고 기계에서는 100% 천연 실로 제작할 수 없어(실이 매우 약함) 그것들은 100% 파시미나가 아니야. 그런데도 사람들은 값싼 공장 제품들을 많이 사고 있어. 점점 우리는 위기를 느끼고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지...
A : 현재 이곳에 많은 공장들이 들어섰나요?
B : 응 이곳 스리나가르 지역 뿐만이 아니라 근처 다른 지역에도 파시미나 공장들이 생겨 점점 수공업자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지고 있어
A : 그럼 파시미나를 수입하는 외국에서도 수공예품 보다 공장에서 만든 제품들은 수입해가겠네요?
B : 그렇지. 이슬람권인 아랍등 지중해 쪽 국가들이 주요 수출국가인데, 우리 같은 수공업자들이 하나하나 만든 파시미나 보다 기계로 찍어내는 싼 파시미나를 많이 수입해 가지.
A : 참 안타까운 현실이네요
막쑬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현대화로 인해 진입하는 대규모 공장들로 인해 대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저시나 다른 수공업자들이 점점 힘들어진다고 한다. 100% 파시미나는 수공업자들의 손을 거쳐야 탄생한다고 한다. 연약한 실을 공장의 기계가 정교하게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공업 파시미나가 공장에서 찍어내는 파시미나 보다는 거의 2,3배 가까이 비싸지만, 그만큼 귀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파시미나가 탄생하기 까지 거의 15번의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데, 아저씨의 한땀한땀 정교한 손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파시미나는 그만큼 값어치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시미나를 제조하는 전통과 기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눈앞의 이익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수공업자들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탐사를 준비하는 동안 인터넷에서 조사했던 파시미나 쇼핑몰에서도 대규모 공장이 아닌 작은 수공예 수공업자 업체와 연결을 해서 거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오히려 현지의 환경과, 경제를 더 어렵게 하는 대기업들의 공정 무역이 아닌, 규모는 작지만 직접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정하게 진행하는 소규모 기업들이 이상적인 공정무역을 전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파시미나 인터넷 쇼핑몰 같이 다양한 기업들이 스리나가르의 수공업 업체와 연결을 지어 거래하는 법도 이들의 고유한 전통과 기법을 지켜주는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우리팀의 탐사에 도움을 준 사진관 아저씨와 작별인사 후 델리에 돌아가기 위해 스리나가르 공항에 갔다. 공항에 들어가기까지는 2번의 보안 검색 게이트를 통과하여야 했다. 이 중 한번은 차에 승차한 모든 탑승자가 하차해 짐을 가지고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물론 이 구간으로 인해 공항 진입 전 게이트 앞에는 검색대 통과를 대기하는 차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차에 실려 있던 배낭을 모두 들고 검색대를 향했다. 보기와는 달리 검색대는 형식상으로만 X-RAY를 통과하는 절차였고 간단한 몸 검색 뒤에 다시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스리나가르 공항은 듣던 대로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지만 까다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공항에 도착해서도 한 번의 짐 검사를 한 뒤에야 공항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공항은 국제선보다는 거의 모든 노선이 국내선이었다. 북적거리는 인도인들 사이에서 모든 수속을 밟고 나서야 우리는 델리 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스리나가르 공항에서 델리 행 비행기는 약 한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는 거리였다. 우리는 에어인디아 항공사를 이용하였는데 그동안 들어왔던 악명과는 다르게 상당히 괜찮았다. 눈 깜짝할 새 비행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델리에 발을 들이게 됐다. 시원했던 북인도와는 달리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습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서둘러 프리페이드 택시(과다한 요금을 방지하기 위해 운영하는 선불택시)를 타고 미리 예약해둔 숙소가 있는 구르가온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하고 나니 호텔 예약 업체의 전산 상의 문제로 우리의 예약이 되어있지 않아 힘들었지만, 다행히 전산문제가 해결되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스리나가르의 수공예 파시미나 탐방, 그리고 델리로의 여정까지 숨가쁜 하루였다.
********************************우리들의 하루 한줄 정리!!
보민曰 스리나가르의 핵심이었던 파시미나 수공예 탐사도 사진관 아저씨 덕에 할 수 있었다. 문명의 현대화로 생계를 위협받는 수공업자들을 보며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느꼈다. 이들의 고유한 전통과 기법이 후대에도 전승되길 바란다.
주리曰 마지막 탐방 일정 파시미나 제조 현장 방문도 무사히 마쳤다.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파시미나를 만들어내는 장인들을 보며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의 노력이 꼭 정당한 결실을 맺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무리 한 채 다시 델리로 복귀. 그와 함께 더운 델리의 날씨도 다시 돌아왔다.
동현曰 사진관 아저씨가 가이드를 해주셨다. 가이드 같았다. 스리나가르에서 그래도 편하게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 델리로 간다 드디어 쓰리지를 쓸 수 있다. 너무 행복하다!
<8월 17일> 시원섭섭 여정의 끝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고생했던 보름 동안의 여정이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았다. 10시 쯤 숙소를 출발해 우선 우리의 여행 시작점이었던 파하르 간즈로 향했다. 이 곳에서 다시 구르가온에 위치한 엠비언스 몰로 향했다. 이 곳은 깔끔한 시설과 유명 브랜드 들이 위치해 있어 인도 중상층 국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지하에 위치한 대형마트에도 구경거리가 넘쳐났다. 특히 식료품은 채식주의자가 많은 나라인 만큼 가공식품은 찾기 힘들었다. 대신에 유제품과 차 종류가 눈에 띄게 많았다. 마트를 돌아보고 나니 인도의 식문화의 특징들이 보이는 듯했다. 엠비언스 몰을 마지막으로 밤 9시 택시를 이용하여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공항에 도착해서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택시를 떠나보냈다. 그런데 공항이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 한적한 것이 뭔가 이상했다. 아뿔싸, 택시기사가 우리를 국내선 공항에 내려주고 가버린 것이다. 델리의 국내선 공항과 국제선 공항은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으면서도 화가 났지만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 국제선 공항에 가야했기 때문에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헐레벌떡 뛰어갔다. 마음이 급하니 그 무겁던 배낭도 무게 따위 중요치 않고 앞만 보고 막 달렸다. 다행히 국제선 공항으로 바로 가는 셔틀버스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큰일이 날 뻔했다. 약 20분을 달려 우리는 무사히 국제선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 땅을 밟기 전까지 우리의 여정은 다이나믹했다.
********************************우리들의 하루 한줄 정리!!
보민曰 누가 인도의 물가가 싸다고 했던가. 인도 쇼핑 센터 엠비언스 몰의 모든 것들은 거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가격이었다. 심지어 밥까지! 인도에서의 마지막 식사(피자헛)의 가격은 지금까지 인도에서 먹었던 밥값 중 가장 비쌌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 시원섭섭하다!
주리曰 인도 중상층 국민들의 소비 생활을 엿볼 수 있었던 엠비언스 몰 구경이었다. 끝내 구경만 하고 내 손에 남은 건 하나 없었지만 말이다. 인도에서 마지막 날은 시간도 참 잘 갔다. 집에 간다는 설렘에 무거운 배낭을 멨어도 발걸음은 가벼웠던 공항 가는 길이었다.
동현曰 하루 종일 엠비언스 몰 구경을 위해 숨을 쉬고 밥을 먹은 것 같다. 열심히 쇼핑했다.
<8월 18일> 웰컴, 코리아!
우리는 새벽 비행기를 타고 18일 아침 홍콩에 도착하였다. 예상대로였더라면 홍콩을 경유하는 7시간 동안 밖에 나가 홍콩 시내를 보고 올 계획이었다. 홍콩 공항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환승 수속을 밟지 않고 바로 나갔어야 했는데 그대로 수속을 밟아 입국장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결국 우리는 홍콩에 왔음에도 홍콩 바깥공기 한 번 못 맡아본 채 장장 7시간을 공항에 머물게 되었다. 제대로 조사해보고 왔어야하는 건데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어진 물. 공항에서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4시 반 드디어 한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장장 15일 간의 일정이 이렇게 끝이 났다. 약 5개월 간의 길었던 준비 과정 끝에 드디어 오르게 된 인도 로컬리티 챌린지 탐사. 사실 그 동안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생각보다 많은 양의 주어진 과제들 탓에 속앓이를 했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짧고 또 길었던 15일 간의 탐사 일정과 그 준비 과정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갔다고 생각한다. 긴 시간 끝에 우리는 비로소 잊을 수 없는 경험들과 순간들을 얻게 되었다.
********************************우리들의 하루 한줄 정리!!
보민曰 숨 바쁘게 지나간 15일간의 북인도 공정무역 탐방. 그 모든 시간이 꿈을 꾼듯 훅-하고 지나갔다. 한국 땅을 밟는 순간... 오랜만에 만난 한국 땅이 반가웠지만 왠지 인도에 무엇인가 놓고 온것 같은 아쉽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공항버스가 있어 집에 갈 수 있었지만, 공항에서 하루를 보낼 주리랑 동현에게 왠지 미안했다. 새벽 3시쯤 도착한 집.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과 익숙한 내 방을 보니 긴장이 풀려 그동안의 피로가 몰려왔다. 무사히 잘 다녀왔음에 감사하다!!!
주리曰 15일 간의 탐방도 이제 드디어 끝! 밤 비행기를 타고 힘들게 홍콩에 왔는데 수속을 잘못 밟아 공항에 발이 묶였다. 홍콩 바깥 공기 한 번 맡아보지도 못하고 7시간 동안 공항만 실컷 구경하다 왔다. 힘들게 한국에 왔더니 집 가는 차마저 끊겨 인천 공항에서도 노숙을 하고야 말았다. 침대가 너무나 그리운 날이었다.
동현曰 인천 공항 노숙은 할 게 못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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