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4기] [유라시아] - 누리 팀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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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7-11-06 11:26 | Read | 1,392 |
본문
7.9 러시아여행 6일차 – 모스크바 셋째 날
오늘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노보데비치 수녀원으로 가기위해 일찍 숙소를 나섰다. 아직 시차적응이 완전히 되지 않아 다들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서 조금 쌀쌀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수녀원 주변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입장권을 구매하여 수도원으로 들어섰다. 노보데비치 수녀원은 바실리 3세가 폴란드령이던 스몰렌스크를 탈환하여 1514년에 러시아로 편입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차이코프스키가 이곳 호수에서 영감을 얻어 발레곡 ‘백조의 호수’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수도원은 우리가 여태까지 보았던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잘 보존되었다고는 하나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내부에는 스몰렌스크 성당과 우즈벤스키 성당을 비롯한예배당들이 있어 둘러보기 좋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와보고 싶었던 것은 표트르 대제의 이복누이인 소피아 황녀가 바로 이곳에 유폐되었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었다. 표트르 대제와의 정쟁에서 패배한 소피아 황녀는 이복동생에 의해 죽을 때까지 이곳에 갇히게 되었다. 일리야 레핀의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유폐된 소피아 황녀’(1698)을 보면 표트르 대제가 소피아 황녀의 지인의 목을 창가에 매달아 놓았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비가 오는 수녀원 전경은 음산하게만 느껴졌다. 수녀원 바로 옆에는 안톤 체홉, 고골, 가가린 등 유명인들의 잠들어 있는 노보데비치 수녀원 묘지가 있었다. 우리는 많은 묘비들 사이에서 아는 이름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러시아 인들의 묘지에는 흔히 보았던 것처럼 이름이 적힌 비석이 놓여 있을 뿐 만 아니라 생전의 모습을 재현한 동상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망자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망자의 모습과 삶을 추억하기에 좋은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생각보다 동상은 러시아 인들의 생활 가까이에 밀접해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동상문화가 일상 속에 크게 자리 잡은 것이다.
우리는 묘지에서 나와 트레찌야코프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 앞에서는 수집가 트레찌야코프의 동상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트레찌야코프는 상인이지만 미술품에 조예가 깊어 많은 작품들을 수집했다고 한다. 그런 그는 말년에 이 건물과 그가 수집한 작품들을 모두 모스크바 시에 헌납했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의 트레찌야코프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내부로 들어서니 러시아 색채가 강한 미술 작품들이 다양하게 전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번 여행을 위해 러시아 역사에 대해 약간의 공부를 해 간 우리로서는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아까 언급한 일리야 레핀의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유폐된 소피아 황녀’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들과 역대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를 감상하면서 우리는 러시아라는 나라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미술관을 나오며 우리는 트레찌야코프의 동상 앞에 서서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7.10 러시아여행 7일차 – 모스크바 넷째 날
오늘은 시간 관계 상 둘러보지 못했던 바실리 성당의 내부와 크렘린을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붉은 광장으로 향하는 길은 아르바트 거리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간단한 식사를 한 뒤 걸음을 옮겼다. 길을 거닐다보니 장난감 가게와 백화점 같은 일상적인 건물들이 동상과 조화를 이루며 건축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에게 동상은 어떠한 장소를 특정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공간 자체와 어우러져 그 공간을 장식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붉은 광장에 다다라 중심으로 들어서니 정면에는 바실리 성당, 왼편에는 굼 백화점, 오른편에는 크렘린 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먼저 바실리 성당으로 향했다. 모스크바하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인 바실리 성당은 이반 뇌제가 타타르 칸을 예속시킨 것을 기념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어떠한 각도에서도 8개가 다 보인다는 알록달록한 양파 모양 돔은 러시아와 비잔틴 양식의 혼합으로 러시아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듯 정교하고 섬세했다. 바실리 성당에 가까이 다다르자 미닌과 포자르스키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폴란드 침공에 맞서 의용군을 조직하여 나라를 구한 공을 인정받아 동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중에서 미닌은 정육점 일을 하던 평민 출신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인물이나 왕족, 아니면 유명하고 지위 높은 인물들이 주로 동상의 모델이 되는 것에 비해 러시아에서는 일반인도 얼마든지 그 대상으로 인정되는 것 같았다. 특히 전쟁이나 구국 영웅에 경우가 그랬는데, 동상 아래 적혀 있는 “대 러시아로부터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민 미닌과 포자르스키 공에게 1.8.1.8년” 이라는 문구를 통해 러시아 인들이 이들을 얼마나 예우하고 있는 지 느낄 수 있었다. 바실리 성당 내부는 마치 요새처럼 구불구불했지만 화려한 외양에 비해 특별함은 느낄 수 없어 우리는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아카펠라 그룹의 찬송을 들으며 성당을 나왔다.
왼편에 있는 크렘린은 백악관이 미국 정부의 상징인 것처럼 그 자체로 러시아 정부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말 그대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사는 곳인 것이다. 엄격하고 권위적일 것 같은 러시아의 이미지 상 대통령이 실제로 집무를 하고 있는 장소에 관광객의 출입을 허용하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그러나 그만큼 입장검사가 철저하고 입장한 뒤에도 대통령의 집무실과 저택 방향 쪽으로는 접근이 불가했다. 크렘린은 표트르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황제들이 거하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크렘린의 성당 구역 내에는 역대 황제들과 그 가족들을 안치한 아르한겔스키 성당이나 국가적인 행사가 행해지던 우스펜스키 대성당과 같은 볼거리가 많았다. 그러나 막상 성당 구역에서 우리의 탐사 주제인 동상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는데, 예상은 했지만 일상적인 공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동상을 오히려 종교적인 건물 주위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대신 그 종교상들을 대신하는 이콘들을 많이 감상할 수 있었는데 특히 류블로프와 같은 이콘 거장들의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일정 상 더 많은 곳을 둘러보지는 못하고 우리는 밤비행기로 마지막 여정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기 위해 세레메티예보 공항으로 출발했다.
7.11 러시아여행 8일차 – 상트페테르부르크 첫째 날
밤사이 우리는 새로운 숙소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섰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가 서유럽을 모델로 건설했던 계획 도시답게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에 위치한 넵스키 대로는 아르바트 거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는데, 이 거리 위에서 수많은 문학 작가들의 작품들의 탄생했다고 하니 꼭 과거로 돌아가 그 시대의 거리를 거니는 기분이었다. 넵스키 대로에서 가까운 곳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판 바실리 성당이라고 볼 수 있는 피의사원이 위치해있다. 피의 사원의 본래 이름은 그리스도 부활 성당이지만 알렉산드르 2세가 이곳에서 아나키스트의 폭탄을 맞은 사건 때문에 피의 사원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폭탄을 맞은 알렉산드르 2세는 결국 궁전으로 이동 중 사망했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이 성당을 지었다. 서유럽 느낌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양식으로 지어진 피의 사원은 바실리 성당보다도 훨씬 정교하고 섬세하게 화려한 멋이 있었다. 또한 외부만큼이나 화려한 내부는 러시아 여행 중 가장 인상적인 것 중에 하나였는데 특히 모든 성화가 모자이크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그러나 이 화려함 뒤에는 러시아 민중의 희생이 있음을 알기에 한편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의 암살 시도는 분노한 민중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이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오히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삼아 더 권위적인 압제 정치를 펼쳤다. 이렇게 누적된 민중들의 분노는 알렉산드르 2세의 아들인 니콜라스 2세 때 혁명으로 이어지니 어쩌면 피의사원은 혁명을 앞당기는 도화선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피의 사원의 피가 알렉산드르 2세의 피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중들의 투쟁의 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피의 사원을 나와 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또 다른 유명 성당인 성 이삭 성당으로 들어섰다. 황금 100kg 이상을 녹여 만들었다는 돔으로 유명한 이삭 성당은 피의 사원과는 달리 프랑스 건축가가 지어 어딘지 모르게 서유럽의 분위기가 풍겼는데 40년의 노력이 빛나는 걸작 같은 느낌이었다. 이삭 성당 앞의 광장에는 니콜라이 1세의 기마상이 위치해있고 조금 더 걸음을 옮기면 데카브리스트 광장에 위치해 있는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을 만날 수 있다. 쿠테타로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가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건립했다는 표트르 대제가 타고 있는 말은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것 같은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개혁적인 성향과 더불어 정복 전쟁을 일삼았던 표트르 대제를 잘 묘사한 것 같았다. 특히 말의 두 다리가 들려 있는 것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데 꼭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이 짓밟고 있는 것은 러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악을 상징하는 뱀이었다. 뱀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는 표트르 대제의 모습은 위대한 정복자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러시아에서 인물을 동상을 통해 형상화하여 그 인물의 권위를 드러내고 정치적 선전을 하는 것은 흔하게 이루어졌었다. 특히 예카테리나 2세가 그녀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표트르 대제의 동상을 세운 것은 그만큼 당대 사람들에게 표트르 대제가 인기가 있었고 러시아를 하나로 통합하는 강하고 리더십있는 군주였다는 반증이다.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은 단순히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정치적 암투가 녹아 있는 제정 러시아의 역사적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동상은 푸쉬킨이 그의 작품 청동의 기사를 쓸 때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날,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푸쉬킨도 서서 이 동상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동상은 단순히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동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가능하므로 이러한 소통을 통해서 그는 시대와 사건 그리고 인물들을 환기시켰을 것이다. 환기된 역사는 푸쉬킨 개인의 상상과 경험을 결합하여 위대한 작품으로 창조되었다. 그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는 각자 어떤 대화를 하고 있었을까.
7.12 러시아여행 9일차 – 상트페테르부르크 둘째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이튿날은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다행히 우리의 오늘 일정은 실내인 에르미타쥬 미술관을 둘러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에르미따쥬 미술관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답게 이른 시간부터 엄청난 인파가 입장을 위해 긴 행렬을 이루고 서 있었다. 폭우 속에서도 줄을 기다리며 러시아 할머니와 손자와 함께 우산을 나눠쓰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입장 시간이 되어 있었다. 에르미따쥬는 원래 러시아 황제들의 겨울용 궁전으로 사용되었으나 황제가 없는 현 시점에는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힐 정도로 다양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에르미따쥬는 모든 작품을 1초씩만 보아도 2년이 걸린다고 한다. 무엇보다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처럼 대부분의 작품을 약탈을 통해서가 아닌 정식으로 구매하여 수집하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현재의 에르미따쥬는 화재로 인해 새로 복원한 것인데, 아름다운 건물의 외양만큼 내부도 무척이나 화려했다. 우리는 돌아온 탕자를 비롯한 렘브란트의 작품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리타의 성모에 이르는 다양한 그림을 구경하고 요르단 계단과 표트르 대제의 방 등을 구경했다. 특히 입구에 위치한 요르단 계단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는데 화재 당시 유일하게 살아 남은 공간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과 달리 화려한 바로크 양식이 돋보였다.
비록 유한한 시간과 일정으로 인해 수많은 작품을 자랑하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모두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알고 있던 신화와 러시아 역사를 한 번 더 되새겨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꼭 올 수 있기를 빌어본다.
7.13 러시아여행 10일차 – 상트페테르부르크 셋째 날
어제 본 에르미따쥬가 황제들의 겨울 궁전이라면 오늘 일정인 페쩨르고프는 황제들이 여름철에 거하던 여름궁전이다. 페쩨르고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와 약간 떨어져 있어, 가기위해서는 페리나 마르슈룻까라고 불리는 교통 수단을 이용해야 했다. 우리는 페리를 타고 가기로 결정하고 네바 강가의 선착장에서 표를 끊었다. 그동안 날씨가 좋지 않아 운하들을 누비는 유람선을 타지 못했는데 페리를 타고 보는 핀란드 만은 그것을 만회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름 바다 바람을 맞으며 도착한 여름궁전은 상부와 하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입장료를 구매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조금 걷다보니 저 멀리 화려하게 빛나는 궁전이 보였다. 노란 빛깔의 궁전은 빛을 받아 마치 황금처럼 빛나보였다. 궁전 중심을 향하는 수로를 따라 조금 더 걷다 보니 대형 분수들이 등장한다. 분수에서 물을 뿜어내는 부분은 37개의 동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분수는 아무래도 삼손분수일 것이다. 가장 중심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삼손분수는 삼손이 사자를 맨손으로 제압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삼손을 형상화 한 동상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설명에 따르면 이 궁전을 지은 표트르 대제가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을 격파한 날이 마침 ‘성 삼손의 날’ 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삼손의 일화를 소재로 분수를 만들었는데 여기서 삼손은 러시아, 사자는 스웨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분수 외에도 여름 궁전에는 곳곳에 수많은 동상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상들은 모두 종교적인 인물들을 형상화한 것들이었다. 성상 숭배를 금지하는 러시아에서 어떻게 이러한 동상들이 존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점을 품고 알아보니, 당시 표트르 대제는 서구를 모델로 하여 개혁정책을 펼쳤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불러 동상을 제작하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러시아 양식에 유럽 정통 양식을 배합한 개혁의 산물로서 여름 궁전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름궁전의 숲길을 걷다보면 개혁을 주도하였던 표트르 대제의 동상 또한 만나볼 수 있다. 표트르 대제의 동상은 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특히 러시아 인으로부터 무척 인기가 많아보였다. 주변국과의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서구를 모델로 한 개혁정책으로 러시아의 근대화를 가속화했으며 무엇보다 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업적을 아직도 사람들은 영광스럽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름 궁전을 한바퀴 돌고 난 뒤 궁전의 주변을 둘러싼 바닷가에서 휴식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 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여름궁전 정원에서 팔던 아이스크림이었다. 더운 날씨에 아이스크림을 사먹고자 했던 우리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스크림과 먹지도 않은 커피 값으로 2500루블, 한화 약 5만원을 청구 받았다. 이후에 영수증을 보고 부분적으로 환불은 받았지만 아름다운 여름궁전과 즐거웠던 여정에 한 가지 흠으로 기억된다.
7.14 러시아여행 11일차 – 상트페테르부르크 넷째 날
러시아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또 다른 여름궁전인 예카테리나 궁전으로 향했다. 예카테리나 궁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여름궁전이라고 불리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황제들이 주로 여름에 거했기 때문에 황제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차르스코예 셀로(ЦАРСКОЕ СЕЛО)라고 불렸다고 한다. 현재는 푸쉬킨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여 푸쉬킨 시로 불리지만 여전히 관광객들에게는 차르스코예 셀로라고 부르는 게 익숙해 보였다. 예카테리나 궁전이라는 이름은 표트르 대제가 황후였던 예카테리나 1세를 위해 지은 궁전이기 때문이다. 외관은 전체적으로 밝은 녹색의 에르미따쥬나 노란색의 여름궁전과 달리 푸른 빛을 띄고 황금색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에르미따쥬와 마찬가지로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더 화려하고 섬세한 느낌이었다. 예카테리나 궁전은 무엇보다도 호박방으로 유명하다. 방 전체가 6톤의 호박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호박방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에 약탈당했다가 최근 복원이 이루어졌다. 예카테리나 궁전 관람 시 특징적인 것은 궁전 내부가 가이드 투어로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20분 남짓한 시간이지만 우리는 가이드 투어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2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밖에서 줄을 서야 했다. 예카테리나 궁전의 앞에 위치한 정원에는 다양한 동상들이 장식되어 있어 기다리는 동안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예카테리나 궁전의 내부에 들어서니 호박방의 명성 때문인지 호박으로 만들어진 액세서리를 파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가이드 투어가 시작되고 화려한 계단과 드넓은 궁전의 대회장을 지나 일명 골든 엔필라데라고 불리는 황금으로 치장된 방들을 보니 러시아 제국이 얼마나 부강했으며 러시아 황가가 얼마나 호화롭게 생활했는 지를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뒤이어 들어간 호박방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천장을 제외한 모든 벽면이 호박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한때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기도 했다고 한다. 호박방까지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캐머런 갤러리라고 불리는 회랑을 돌아보기로 했다. 설계자의 이름을 딴 이 공간은 예카테리나 2세의 명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 곳에는 탁트인 회랑을 따라 유명 인물들을 본뜬 흉상이 늘어서 있었다. 사색과 산책의 장소였다는 이곳에 마저 이렇게 많은 동상들이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러시아 인에게 동상은 어떤 의미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쉬웠던 일정을 뒤로하고 이제 러시아 여행의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러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마르슈룻까‘(МАРШРУТКА)라고 불리는 미니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서 즐거웠던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우리는 중앙아시아의 곳곳에 위치해있는 동상의 기원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우리는 여행 중 수많은 동상을 볼 수 있었고 그 동상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많은 역사적의미를, 때로는 시사점을 제공해주었다. 동상은 분명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단순 조형 예술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특히 그 제작 목적은 예술적인 이유 뿐 만 아니라 정치적 목적인 경우도 있었고 누군가를 추모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고취하기 위함도 있었다. 우리는 동상을 통해 그 동상이 환기시키는 시대의 사회와 이념을 바라볼 수 있었다. 동상이 있었기에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낯선 러시아를 좀 더 쉽게 이해하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동상이 특정 인물을 형상화하여 그들이 살던 시간과 실제로 동상이 제작된 시간, 그리고 현재 동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간이 만나고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물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짧지만 길었던 여정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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