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3기] [마그레브] - 보띠끄 팀 [간판, 그 역사를 걷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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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7-03-14 14:52 | Read | 1,737 |
본문
탐사테마
우리 보띠끄 팀은 간판의 역사로 보는 프랑스, 모로코의 모습을 주제로 탐사를 진행한다.
‘디자인과 문화’ 라는 교양 수업에서 한 사회의 디자인은 그 사회의 모습을 이해 할 수 있게 해준다는 내용의 수업을 들었다. 여기서 디자인은 우리가 ‘디자인’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미술적 측면만의 디자인만이 아닌 여러 기능적, 실용적, 미술적 요소를 모두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숟가락이나 머리를 빗을 때 사용하는 빗 등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실용적인 도구들 또한 디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상당히 광범위한 디자인 속에서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가장 많이 녹아있고 친숙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간판디자인이다.
또한 간판은 그 사회의 모습과 문화, 예술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간판이 그 사회의 역사를 반영한다는 전제를 내렸고 이를 현장 조사를 통해 실제로 확인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이번 탐사프로그램을 통해 조사할 대상인 간판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상업적 간판과 관공서나 학교 등의 여러 기관들의 간판으로 간추렸다.
<1>간판
①간판의 정의: 광고를 위한 표지물
②기능: 1)과거: 존재를 알리는데 사용.
2)현재: 상점 따위의 이름이나 상품, 업종 따위를 써서 사람들의 눈에 뜨이게 걸거나 붙이는 표지.
과거와 현재의 간판의 기능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결국 장소를 인식시키고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2>간판의 역사
간판의 역사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나뉜다.
①고대(~5c)
1)간판의 역사는 고대 로마나 그리스시대부터 시작됨
2)간판에 글씨를 쓰지 않고 그 가게의 상품이나 상징물, 제작 도구를 직접 상점 앞에 내놓아 그 상점이 무엇을 파는 곳인지 알게 해줌
EX) -산양이 조각되어있는 나무를 불에 그을려 간판으로 사용한 우유가게,
-술통을 맨 두 남자의 조각을 걸어 놓은 목로주점
(17세기까지 영국의 여관이나 술집에서 사용되었을 정도로 그 특징이 꽤 오래 지속됨) -바카스신에게 바쳤던 등나무 가지를 묶어서 술집의 표식을 삼았던 간판형식
②중세(5c~15c)
1)여전히 상점의 상징물이나 상품이 간판을 대신하는 경우로 보아 고대에서의 간판의 특징이 일부 반영됨
2)길드제도(이해관계와 직종이 유사한 사람들끼리 형성한 동업자 조직체로 상호 협조하며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조직적제도) 가 발달하면서 동업자에 대한 간판표기의 규정이 생김➞ 동업자들 사이에서는 공통된 문장을 간판에 사용함/글자를 잘 읽지 못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점포주인의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명칭을 가진 동물을 그려서 표기하기도 함
EX) Cox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몇 마리의 닭들을 의미하는Cocks로 표시하여 읽히도록 함
3)중세 암흑시대(15c) 이후 상업, 무역이 증가함에 따라 간판의 정교화 예술화가 이루어짐➞ 표현의 다양성과 간판의 수가 증가하여 간판의 장식과 색채 역시 다양화 됨
③근,현대(15c~)
1)암흑시대 이후 간판의 최고 전성기(16c~17c)
2)점점 증가하는 간판의 수와 달리 그것들을 관리할 규정이 마땅치 않았음➞가게 앞에 내세운 큰 간판들은 위방해가 험하기도 하고 통행에 됨➞간판의 크기를 제한하고 벽에 밀착시키도록 하는 등 간판에 대한 법률이 본격적으로 등장(18c)
3)그 후 간판의 유행이 차차 쇠퇴
4) 런던이나 파리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가게 앞에 상호나 옥호 또는 번호를 붙이는 것이 유행하였고 이는 유럽 각지에 퍼짐
5)19세기 이후 간판의 광고적 요소와 장식적 요소가 혼합되어 나타나 변질 됨➞ 오늘날까지 변질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들이 존재함
(변질 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가 우리나라이고 그 반대인 곳이 프랑스이다.)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라고 불리는 만큼 예술적인 요소가 그들의 일상생활 곳곳 자연스럽게 녹아있기 때문에 간판의 역사에 대한 사전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프랑스의 예시가 자주 등장하고는 했다. 반면 모로코는 아직 문맹률이 높기 때문에 간판 사용시에 글보다는 그림이나 사진이 주로 사용된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러한 점에서 모로코의 간판은 아직 중세의 간판의 특징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제가 간판의 역사로 보는 프랑스와 모로코의 모습인 만큼 프랑스와 모로코의 역사박물관을 직접 탐사하여 역사를 깊이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또 나라의 역사가 간판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탐구했고 탐사를 진행하면서 일반 시민들과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다. 설문조사는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간판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탐사목표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역사란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이나 그 기록인 동시에 어떠한 사물이나 사실이 존재해 온 연혁이라 정의한다. 또한 간판이란 기관, 상점, 영업소 따위에서 이름이나 판매 상품, 업종 따위를 써서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게 걸거나 붙이는 표지라 정의한다. 보띠끄 조의 탐사는 한 나라의 역사와 그 나라의 간판을 비교하면서 둘의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탐사를 진행한다.
사전 조사한 것을 토대로 탐사와 설문조사를 통해 그 나라의 역사와 간판을 탐사한다. 먼저, 사전조사를 통해 알아본 프랑스의 간판규정이 조사와 똑같이 시행되고 있는지 확인해 본다. 시행할 탐사의 종류에는 박물관 탐사와 거리 탐사가 있다. 이를 통해 각각 한 나라의 역사와 그 나라의 간판의 특성을 알아본다.
박물관은 카사블랑카 박물관, 마르세유의 역사박물관, 파리의 중세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견학을 통해 역사와 간판의 상관관계를 조사한다.
거리탐사는 주로 번화가와 시장을 목표로 한다. 모로코의 하산 모스크 사원 부근 거리와 같은 번화가, 전통시장인 메디나, 카르카손 성이 있는 la site 부근 거리, 마르세유의 notre dame de garde 부근 거리, 파리의 번화가인 샹젤리제 거리 탐사를 통해 두 나라의 간판의 특징을 사진으로 파악하고 비교한다. 거리탐사를 통해 사진으로 알 수 없었던 특징들을 현지에서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설문조사를 통해 각 도시의 사람들의 자기 간판에 대한에 대한 의견을 듣고 그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들의 역사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도시간판 고유의 특성을 알 수 있다. 그를 통해 현지에서 알게 된 특성들과 지식들을 직접 탐사를 통해 재확인해본다.
탐사내용
<탐사시작>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여 아부다비공항에서의 21시간 경유 끝에 지친 몸으로 마침내 탐사 첫번째 지역인 모로코 페즈에 도착했다. 아프리카는 태어나서 처음인데다가 아직까지 모로코에는 동양인과 여성들을 차별하는 경향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경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랍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가 들렸다.
우리는 casa port역에서 기차를 타고 Fez역으로 이동했다. 기차안에서 한 모로코 청년을 만났다. 기차를 타기 전, 팀원 중 한명이 그 사람에게 핸드폰 충전기를 빌려줬었는데 그래서인지 그 사람은 우리의 캐리어를 손수 옮겨주기도 하고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주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모로코에는 그렇게 호의를 베풀면서 나중에는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있었고, 처음보는 외국인에게 경계를 풀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그 사람이 아무 요구 없이 먼저 내렸지만 앞으로 만날 사람들을 대할 때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페즈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구글맵이 가리키는 숙소가 있는 쪽에 내렸는데 숙소를 찾기가 힘들었다. 삐끼들이 길을 알려주고 돈을 요구한다는 경험담을 탐사를 오기 전에 많이 접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장을 보고 돌아가는 듯한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한 눈에 봐도 삐끼처럼 보이는 아이들을 부르셨다. 그 아주머니는 그 아이들과 함께 우리 숙소까지 같이 가주셨고 그 아이들에게 돈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아주머니께서 같이 와주시지 않았다면 돈뿐만이 아니라 더 험한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숙소로 올때 탔던 택시 요금은 바가지 요금이었다는 것은 후에 숙소 주인아저씨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메디나>
페즈에서는 9000여개의 미로같은 골목인 구메디나를 중심으로 탐사를 진행했다. 페즈의 메디나는 모로코가 이슬람 사회로 변신한 후 100년에 걸쳐 만들어진 대표적인 모로코의 중세도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는 이 지역에서 중세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간판의 모습을 보기 위해 페즈를 탐사지역으로 선택 한 것 이다.
메디나로 이동하기 위해 숙소를 나오자마자 모로코사람들은 우리들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인터뷰를 하면서 들은 말로는 모로코에서는 아직 동양인, 특히 한국은 아직 낯선 나라라고 했다. 모로코왕이 일본을 방문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이나 일본 관광객의 수가 증가하고는 있지만 그 역시 아직 미미한 수준이라고 했다. 그만큼 우리는 탐사를 진행하면서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감내해야했다.
가장 먼저 메디나 골목으로 들어가기 전 일반적인 거리에서의 간판의 모습은 두가지로 나뉘었다. 프랜차이즈점 같은 경우에는 일반적인 상점간판의 모습처럼 깔끔한 외관과 간략한 글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리고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의 상점 간판의 경우에는 그 가게에서 팔고 있는 상품의 실제 이미지를 간판에 추가하였고 옆에 아랍어로 간략한 설명을 추가한 모습을 띄고 있었다.
메디나 안으로 들어가보니 골목 양쪽으로 상점이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그 상점들은 상점 주위에 특별한 간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의 모든 상점은 그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을 상점 앞 벽에 걸어놓거나 내놓았고 상점을 대표하거나 설명 할 만한 다른 글귀같은 것들은 따로 보이지 않았다. 과거에는 글을 잘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미지로 간판을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현재에도 문맹률이 높은 나라여서 페즈에서의 간판은 아직 실제 상품의 이미지를 활용한다는 면에서 과거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문조사>
우리는 메디나를 나와 메디나 주변에서 설문조사를 시작했다. 팀원 4명 모두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설문조사를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한국어로 한국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도 쭈뼛쭈뼛했을텐데 외국인을 상대로 불어를 사용해 설문조사를 진행해야했고, 또 모로코인들의 동양인에대한 경계와 의심 혹은 과도한 관심 때문에 설문조사를 진행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설문조사를 진행하기에 앞서 제일 먼저 인사를 하고 불어가 가능한지 질문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불어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가 말을 걸기도 전에 우리들을 피하고 경계하는 여성분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국에 잘 오지도 않는 동양인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설문조사를 부탁한다면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 것같다. 그래서 설문조사 대상을 찾는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용기를 내어 설문조사를 진행하던중에 한 카페 근처에서 한 청년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열심히 설명을 하고 설문조사를 마치려던 순간 그 청년은 우리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돈을 요구했다. “자 이제 한명당 10디르함씩 줘” 라는 느낌으로 말이다. 당황한 우리들을 보고 그 청년은 “나는 이 설문조사를 때문에 내 일하는 시간을 소비했다”라고 말했다. 당황한 우리들은 온갖 바디랭귀지와 알고 있는 불어를 총 동원해 그 사람을 설득하려 했지만 시간만 끌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한명당 5디르함을 주겠다고 해서 총 20디르함으로 흥정하고 일단락지었다. 우리 팀원들은 탐사예산계획을 세울때 설문조사비용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 청년을 만나고 난 후 우리들은 설문조사에 대한 어려움을 또 한번 실감했다.
패닉에 빠진 우리 팀원들은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마음으로 잠시 숙소에 복귀했다. 숙소에서 우리는 설문조사를 부탁하기전에 설문조사를 해준 사람들에게 나눠 줄 초코파이를 먼저 줄까? 그냥 돈을 주고 부탁을 해야할까? 우리는 당신에게 줄 돈이 없다고 사전에 미리 얘기를 하고 설문조사를 부탁할까? 등 많은 의견들이 나누었다. 회의를 마친 후, 우리는 다시 준비를 하고 숙소를 나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좋은 사람들>
역시 또 설문조사 대상을 찾기가 힘들었던 와중에 모로코인 여성2분남성2분의 일행을 만났다. 그 분들은 불어를 할 줄 알았고 또 매우 친절했다. 숙소를 찾을때 도움을 주신 아주머니와 숙소 사장님 다음으로 친절하신 분을 만난 것이다. 그 분들은 설문조사에 성실히 답해주시고 모로코에 대한 얘기도 많이 해주셨다. 그분들은 모로코가 유럽 여러 나라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고 아랍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다개국어가 가능한 이점이 있지만, 아직 폐쇄적이고 인프라가 덜 발달된 개발도상국이기 때문에 미국, 프랑스, 일본, 한국 등 다른 열강들과 같이 발전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계셨다. 탐사를 진행하면서 만났던 모로코 사람들 중 가장 깨어있고 친절한 분들이었다. 우리가 감사의 뜻으로 초코파이를 드렸는데 시간때문에 더 이야기 나눌 수 없는 것에 사과하시며 더 미안해 하셨다. 덕분에 우리는 그날 탐사를 기분 좋게 마칠 수 있었다.
<물의 원천이 화장실?>
설문조사를 통해 얻은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의 간판에 대한 만족도가 3점 이상으로 만족도가 높았다. 사람들은 간판의 색이나 명확함, 정돈된 모습의 청결도와 같은 부분에 만족을 보였고 역사적인 의미가 반영되어 있다는 부분 또한 만족했다. 과거의 간판과 오늘날의 간판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에는 ‘과거보다 오늘날의 간판이 더 화려하고 빛난다’, ‘길이나 장소를 표시해주는 기호가 많아졌다.’ 등이 있었다. 모로코는 간판의 디자인 보다는 기능성을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에도 만족을 하고 있어서 의외였다. 그리고 숙소 사장님께서 해주신 설문조사를 통해 우리들은 의미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리아드는 리아드마다 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숙소 사장님께서는 그 각각의 리아드가 가지고 있는 이름에는 역사적인 유래가 반영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묵었던 리아드의 이름은 ‘리아드 나자’였는데 여기에서 나자는 우리나라의 성씨의 고장 예를들어 안동김씨의 ‘안동’ 역할을 한다고 한다. 과거에는 그 지역의 물의 이름을 집에 숫자로 나타내어 붙여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물들의 원천은 메디나 안에있던 화장실이라고 했다. 우리는 메디나를 탐사할때 그 화장실을 찾았다. 그 곳에는 넓은 우물처럼 보이는 물이 있었고 변기와 세면대도 있었다. 또 실제 탐사하면서 집집마다 걸려져있는 간판에서 그 숫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모로코 간판에는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들이 있었다.
<꾸스꾸스? 쿠스쿠스!>
페즈에서의 마지막 날은 금요일이었다. 모로코는 금요일 저녁마다 쿠스쿠스라는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모로코 현지인들이 먹는 형식의 쿠스쿠스를 먹었다. 윈터스쿨에서 만난 모로코 친구와 초급프랑스어회화 수업을 통해 잠깐 배운적이 있었기 때문에 쿠스쿠스가 대충은 어떤 음식인지는 알고있었다. 하지만 실물로 보니 신기했다. 조같이 생긴 곡식위에 감자,오이,당근 등의 채소가 삶아져있었다. 쿠스쿠스말고도 여러가지 반찬들이 많았는데 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낯선 음식에 망설이는 것도 잠깐, 하루종일 탐사하느라 지친 우리는 쿠스쿠스를 담은 그릇의 바닥이 보일 정도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페즈에서의 탐사는 모로코 전통 저녁식사로 마무리 되었고 우리는 다음 날 아침 두번째 탐사지역인 카사블랑카로 이동했다.
<카사블랑카>
2월 5일 일요일 기차를 타고 카사블랑카에 도착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역 앞에 사람이 별로 없고 한산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카사블랑카는 페즈와는 다르게 대도시같은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왜냐하면 빨갛고 거대한 트람이 그때 바로 지나갔기 때문이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니, 페즈에서 볼 수 없었던 승용차들이 많았고 건물도 모두다 현대식이었다. 숙소를 찾으려고 걸어 다녔으나, 집주인분이 주소를 제대로 표기하지 않아 15분 거리를 거의 1시간동안 찾아 헤메고 다녔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물어물어 숙소를 찾았는데 집주인과 연락할 방법이 없어 1시간 동안 서서 대책을 강구하다가 건물에 사는 주민이 나오 길래 1층문을 들어가서 3층인 우리 숙소를 들어가 보니 집주인이 있었다. 알고 보니 아래 현관벨은 고장이 나서 집주인이 못 듣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벌써 날이 저물었고 우리는 다음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본격적 탐사 시작>
2월 6일 월요일 아침 일어나 브런치를 먹으러 근처 식당에 갔다. 간판은 서구적인 스타일의 간판이고 프랑스어와 영어로 표기되어 있었지만, 식당 안의 직원들은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빨간 트람을 타고 하산 모스크로 향했다. 사전조사에 따르면 카사블랑카의 건물에 주로 사용하는 색깔은 빨간색이라고 한다. 하지만, 빨간색은 택시와 트람만 있을뿐 건물의 색은 대체적으로 하얀색이었고 서구적이었다.
거리 탐사를 하면서 간판에 대한 두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첫 번째 특징은 간판의 절반은 프랑스어 아랍어 표기를 해놓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랍어로만 써져있는 간판은 많아도 프랑스어로 써져있는 간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원인을 추정해보자면 점심때의 가게와 같이 프랑스어는 몰라도 아랍어만을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행자들을 위한 가게에는 꼭 프랑스어가 써져있었다. 식료품가게나 약국이나 기념품가게 주요여행지들은 프랑스어가 써져있었다. 반면에 현지인들이 거주하는 건물이나 공공기관 현지인들만 가는 가게들이나 지역들은 아랍어만을 많이 표기해 놓은 것 같다. 두 번째 특징은 그림 간판이 생각보다 많이 없다는 것이다. 모로코 사람들의 대부분이 문맹이라고 사전에 조사했지만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무역의 중심지이고 공공시설이 많은 도시이므로 문맹률이 극히 적은 것 같았다.
거리탐사를 하다가 어느새 하산 모스크에 도착했다. 하산 모스크는 모로코에서 가장 큰 모스크이자 세계에서 열세 번째로 큰 모스크라고 한다. 실제로 모스크는 내 생각보다 훨씬 컸다. 모스크뿐만 아니라 주변부속 건물들이 훨씬 많았고, 공터가 아주 넓었다. 그리고 관광객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많았다. 그곳으로 바람 쐬러 오는 것 같았다. 그 곳에서 설문 조사를 진행하면서 언어적 소통 문제로 어려움에 부딫혔고 윈터스쿨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된 카사블랑카 친구에게 부탁해 설문조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간판에 대한 만족도는 대략 4점이 넘었고, 불만족하거나 고치고 싶다는 내용은 없었다.
설문조사를 마치고 박물관에 갔는데, 우리 팀이 생각했던 박물관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그 곳에는 건축물의 역사에 대한 설명과 나무 장식품, 금속 장식품같은 고미술품들만 전시되어 있었다. 그래서 입장료만 내고 아쉬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샌드위치 재료를 사서 햄치즈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카사블랑카 공항으로 출발했다.
<매력적인 항구 도시, 마르세유>
마르세유의 아침은 숙소 근처 통신사인 ‘오헝쥬(Orange)’에 유심을 사러가면서 시작되었다. 기가(Giga)의 프랑스 발음인 ‘지갸’를 계속 연습해보는 우리를 보고는 직원분이 웃으며 발음을 도와주시기도 했다. 친절한 직원분과 채워진 데이터에 마음이 든든해진 우리는 항구로 거리 탐사를 하러 갔다.
야경이 아름다운 줄만 알았던 마르세유 구 항구(Vieux Port)는 아침에 보는 모습도 밤만큼 아름다웠다. 바닷가 앞 광장에서 열리는 생선 장터라든지 전철을 타러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과 그 사이를 여유롭게 거닐며 풍경을 즐기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 모두 항구 도시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런 곳의 간판은 또 어떤 매력을, 역사를 가지고 있을지 더욱 궁금해졌다.
이곳의 간판들은 대체적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판넬 형식보다는 입구 주변 테두리를 모두 장식한 후 이에 맞게 상호명을 한 글자씩 올려두는 경우가 많았다. 항구에는 널찍한 광장과 그 안에 전철역 입구가 있어 아무래도 그 지역 내에서는 제일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편이다. 그래서 그곳 주변에는 맥도날드와 같은 유명 체인점들과 호텔들이 모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휙휙 지나가버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간판들도 한껏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고 다양한 색들이 주를 이루었다. 파리에서는 색에 대한 엄격한 규제로 인해 맥도날드도 그 특유의 빨간색을 사용 못하고 하얀색 간판을 쓴다고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렇게 까지 색에 대한 규제가 심하지 않았다. 항구 도시였기에, 예전부터 외부 문화를 수용하는 역사적 태도가 가져온 결과였다.
<진정한 French fries(프렌치 프라이)를 만나다!>
비교적 프랜차이즈가 많은 광장에서는 간판 관찰보다 다음날 설문조사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노트르담 성당 쪽으로 들어가면서 골목 구석구석을 살펴보기로 했다. 성당으로 가기 전 아침도 안 먹은 채로 탐사를 하다 보니 지치는 것 같아 중간에 오페라 버거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각자 버거를 골라 한참을 잘 먹고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갑자기 주방에서 나오시더니 옆 테이블의 프랑스인에게 영어로 통역을 부탁하여서 큰일이라도 난줄 알고 걱정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준 감자튀김이 잘 안되었으니 새로 튀겨주시겠다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다. 원래 감자도 맛있게 잘 먹던 우리는 새로 나온 감자튀김 맛에 놀랐고 아저씨의 장인정신에 또 한 번 감탄했다. 그 정성에 남은 감자튀김도 남기지 못하고 챙긴 뒤 우리는 마저 성당 쪽으로 향했다.
<무채색이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우리가 주목했던 점은 전철역 부근에서 노트르담 성당에 가까워질수록 간판들의 색이 빠져나간다는 점이였다. 실제로 항구 주변의 간판들은 색감도 화려하고 각자의 개성보다는 눈에 띄기 위한 특징들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이에 비해 골목 안쪽의 간판들은 매우 화려하다거나 색채가 강하지는 않지만 저마다의 개성을 보였다. 간판을 통해 시선을 끌고 주의를 집중시킨다기보다는 상점, 혹은 그 주인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잘 표현하려는데 포커스를 맞췄다. 심지어 간판 없이 유리창 또는 어닝 (비 또는 햇빛 가림용 천막)에 조그마하게 상호명을 적어둔 곳도 있었다. 이 곳에서 간판에 있어 특별대우를 받는 곳은 약국과 호텔이었다. 우선 약국, 이 지역에서 화려하게 깜빡이는 네온사인 간판을 쓰는 곳은 약국뿐이었는데, 급한 상황에서 약국을 쉽게 찾을 수 있게 하려는 세심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호텔 간판을 제외하고는 2층 위로 올라간 간판을 찾을 수 없었다. 사전 조사를 할 때 프랑스는 2층 위로 간판을 올리는 것을 규제함을 알게 되었는데 실제로 보니 보통은 2층위로 상점이나 사무실은 거의 없고 가정집이 입주해있었다. 간판의 높이에 대한 규정은 엄격하게 이루어지는 반면 훼손된 간판에 대한 후속조치는 신속하지 않아보였다. 하루 동안 탐사를 하는 동안에도 3,4개의 간판이 글자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형형색색의 간판에서부터 차분하면서도 개성 가득한 간판들까지 다양한 특징들을 지나 우리는 노트르담 성당에 도착했다. 성당부근에는 주거지가 모여 있어 간판을 찾기는 힘들었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건물과 분위기에 왜 이곳으로 들어올수록 간판들이 차분해졌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성당에 올라가니 바다와 마르세유의 경치를 한눈에 다 들어왔다. 성당의 분위기에 빠진 우리는 평소라면 잘 보지 않았을 작은 꽃 하나에도 관심을 갖으며 곳곳을 둘러보았다. 사진도 찍고 바다도 감상하다가 이내 올라오는 길에 봐두었던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의 첫 탐사에 들떠 팀원들과 한참을 얘기하다 다음날은 어떨지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프랑스와 대화하기>
전날 먹던 시리얼을 아침으로 먹고 구 항구의 광장으로 설문조사를 나갔다.
설문조사 초반에는 모로코에서의 설문조사처럼 험난할까하는 걱정이 아직 남아 주춤대는 듯 했다. 하지만 용기 내어 처음으로 설문조사를 부탁드린 아주머니께서는 흥미롭다는 듯 응해주셨고 우리가 감사의 표시로 드린 초코파이에 “C'est gentil!(친절해라!)" 라며 기뻐하셨다. 생각보다 순조로운 첫 시도 덕분에 이후로도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양한 분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다 광장에서 갑자기 시작된 비눗방울 퍼포먼스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우리보다 더 열정적인 모습으로 촬영을 하는 현지인이 있어 관심이 갔다. 설문조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어 보니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소개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이 곳을 사랑해서 매일 매일 촬영을 나오신다고 했다. 아저씨는 우리 조사 주제가 마음에 든다며 오히려 우리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까지 하셨다. 화기애애하게 설문조사를 마친 후에는 우리 사진을 다른 작품들처럼 정성껏 찍어서 보내주셨다. 저녁에 탐사를 마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만난 아저씨는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며 같이 있던 딸이 한국을 좋아한다며 소개해주셨고 우리는 새로운 인연을 한명 더 만들고 설문조사도 한 장 더 할 수 있었다.
잠시 서서 다음 계획을 확인하던 중 우리가 들고 있던 학교 파일을 보고, 어느 나라 말이 쓰여 있는 거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어라고 대답하자 우리보다 신이 나서 한국어와 한국에 대해 얘기했다. 한국어는 배우기 어려운지, 한국 사람은 정말 게임을 많이 하는지……. 또 자신은 마르세유에 온지 6개월이 되었고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고 설문조사도 흔쾌히 응해주었다. 처음으로 우리에게 먼저 대화를 거는 사람을 만나 당황스럽기도, 재밌기도 했지만 프랑스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쁜 마음이 컸다.
중간에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을 겸 상점용 설문 조사지를 준비해서 한 식당을 들어갔다. 사실 한껏 기대했던 프랑스에서의 첫 파스타는 우리의 한국인 입맛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지금은 바쁘니 설문지를 두고 가면 작성해서 돌려주겠다는 친절한 사장님을 만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간판과 역사, 역사와 간판>
어떤 할아버지께서는 간판과 역사에 대해 조사한다고 설명 드렸더니 옛날 간판들이 모여 있는 전시장이 있으니 따라와 보라고 하셨다. 도착한 곳은 간판 전시장이 아닌 ‘마르세유 역사 박물관’ 이었는데, 이곳에서 옛날 간판과 포스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역사 박물관이라고해서 우리가 찾는 형태의 간판을 찾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들어갔는데 간판 또한 역사의 한 형태로 여기고 보존해두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박물관에는 항구 그림이나 배의 모형 등을 주로 전시하고 있었는데 박물관 뿐 아니라 성당이나 식당 어디를 가도 배 모형, 항구의 풍경, 바다 사진과 같은 장식을 찾아볼 수 있었고 이는 간판에도 영향을 주어 종이배가 그려진 간판 등으로 나타났다. 지금의 간판이 직접적으로 역사적 요소는 갖고 있지 않더라도 ‘항구 도시’로써 갖는 자의식이 주는 통일감은 역사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박물관에서 나와 만난 또 다른 할아버지는 ‘본인이 거주하는 지역 간판에 불만족스러운 점이 있나요?’ 라는 질문에 광장 바로 옆 2층에 커다랗게 걸려있는 현수막을 가리키시며 저런 것이 바로 ‘시각적 공해’라며 아무런 역사도 갖고 있지 않은 미관만 해치는 간판이라고 말씀하셨다. 간판도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야한다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다시 한 번 우리 탐사에 대한 동기부여를 받았다.
<마르세유 총평>
마르세유에서 간판에 대한 만족도는 평균 3.3이 나왔다. 주변 간판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으로는 ‘알아보기 쉽다’ 등이 있었고 부정적인 반응은 ‘환경적이지 않다’, ‘형태와 내용이 안 맞는다(연관성이 없다)’등이었다. 옛 간판과 현대 간판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전보다 보편적이 되었다’ ‘더 예뻐졌다’ ‘전기를 사용한다(네온사인이나 불이 들어오는 간판)’ 라는 의견이 있었다. 한편 상점 주인들은 거의 별다른 의견 없이 다 만족한다는 의견이었다.
대체적으로 젊은 층의 사람들은 평소 간판에 대해 생각해보거나 신경 쓰지 않는 편인 반면 나이가 꽤 있으신 분들은 변화를 아쉬워하거나 간판이 전통적인 면을 잃지 않길 바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문조사를 하면서 우리가 간판이라는 뜻으로 썼던 ‘enseigne’라는 단어를 이해 못하고 다시 설명해 달라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우리는 이에 새로운 단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설문지의 ‘enseigne’ 밑에 ‘panneau comercial(상업적 판넬=간판)’이라는 보충 설명을 달았다. 이렇게 설문조사를 마치고 마르세유에서 꼭 먹어보고 싶었던 생선 스튜인 부이야베스(bouillabaisse)를 먹으며 저녁을 마무리했다. 식당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에게도 거리낌 없이 친근하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보니 프랑스에 와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변화를 맞이하는 역사>
카르카손으로 가는 아침, 마르세유를 떠나는 것은 아쉬웠지만 이번엔 어떤 곳일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기차를 탔다.
오후 4시 쯤 도착해서 배도 고프고, 오늘은 이대로 쉬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 가장 짧은 일정을 잡은 카르카손에서의 탐사를 계획대로 다 마치기 위해 중세 성으로 다시 출발했다. 성으로 가는 길은 굉장히 조용하고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는데 간판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우리가 예상했던 것만큼 중세적인 느낌이 드는 간판은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이곳이 중세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게 맞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성으로 가니 중세 도시가 맞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 안 좁은 길 양 옆에 중세 관련 물건들을 파는 상점이 쭉 늘어서있는 모습을 보니 페즈의 구 메디나가 떠올랐다. 메디나에서처럼 간판 없이 상점 앞 진열되어있는 물건들이 간판 역할을 하는 상점도 꽤 있었다.
물론 간판에서도 중세 시대의 특징을 살린 것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한옥 마을이라고 모두 기와집에 서예로 쓰인 나무간판은 아니듯, 모든 간판이 중세식은 아니었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 식당가가 나오자 현대적인 간판들이 꽤 있었다.
역사를 간직하더라도 변화는 피할 수 없었다.
저녁으로 숙소 근처에서 빵을 사가지고 와 먹고 이 빵 맛만큼은 다시 프랑스에 올 때까지 변하지 않길 바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 간판은 내가!>
우리의 마지막 탐사지인 파리로 이동하는 날, 우리는 기차역으로 가는 길의 간판들을 관찰하며 중간 중간 설문조사를 하였다.
전날 성을 탐사하러 가면서도 생각했지만 성 바깥, 특히 기차역 부근은 이곳에 성이 있냐는 듯, 중세적인 특징이 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르세유의 간판들보다 더 색채가 짙은 간판들이 많았다. 여러개의 프랜차이즈 간판과 별다른 의미가 없는 간판들을 지나치다 귀여운 일러스트가 그려진 미용실이 눈에 띄어 사장님께 설문조사를 부탁드렸다. 아주머니는 우리의 질문에 반가워하시며 본인의 간판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셨다. 미용실 안쪽에 구비되어 있는 명함에도 같은 그림이 사용 되었는데, 이 명함을 건네주시며 자신이 일러스트를 배워 직접 펜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자랑스럽게 설명하셨다. 비록 깊은 역사를 담고 있진 않았지만 아주머니의 미적 감각과 미용실에 대한 애정이 간판에 영향을 준, 특별한 의미와 소소한 역사를 지닌 간판을 만나 반가웠다.
<카르카손 총평>
카르카손에서의 만족도는 평균 3.9 정도로 마르세유보다 높았다. ‘조악하다(보기 흉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변질되었다.’ 와 같은 부정적인 관점과 ‘조명방식(빛의 묘사)가 좋다’ ‘잘 꾸며져 있고 매력적이다.’와 같은 긍정적 관점이 있었고 예전과 비교한 변화에 대해서는 ‘전보다 많은 정보를 담는다.’ ‘네온사인을 이용한다.’등이 있었다. 마르세유에서와 같이 간판에 있어서 조명(혹은 네온사인)의 유무를 변화로써 많이 인식하고 있다는 점, 생각보다 간판과 자연과의 조화를 신경 쓰는 의견이 많다는 결과를 얻었다.
설문조사를 하는 동안 다음에는 파리로 간다고 하니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카르카손 아주머니의 말에 긴장이 되었지만 그래도 부푼 기대감은 버리지 못한 채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갔다.
<박물관 수난시대>
사전조사 당시 모로코의 간판은 중세적인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세적인 특징이란 간판에 글자 대신 그림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며, 그 그림은 가게에서 취급하는 물건들을 그려 넣은 것이다. 식민지에 의해 프랑스와 많은 것들을 닮은 모로코 간판의 현주소가 중세시대라면, 프랑스 간판의 중세때의 모습은 어떤 양상을 띄었는지를 알아보기위해 파리에 위치한 한 중세박물관을 들렀다. 그러나 그 박물관에서는 간판에 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없었고 두 번째로 다시 둘러보던 중 한 그림에서 아주 작게 중세때의 간판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가뭄의 단비가 이런 것일까 싶었다.
다음 날, 우리는 중세박물관에서 충분한 자료를 얻지 못한것을 얻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사전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선택이었고 판단미스였다. 루브르에서 역시 만족할만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두번의 실수로 인해 저녁시간에 갖는 팀 회의를 더 정확하고 신중한 자세로 임하게 되었고 계획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한가지 다행이었던 점은 카르카손에서 얻었던 중세 간판의 정보와 설문조사들로도 충분한 양을 확보했다는 것이었다.
<오 샹젤리제>
우리의 탐사도 이제 중세를 벗어나 현대로 들어왔고, 쇼핑의 메카 마레지구와 샹젤리제 거리를 탐사하게 되었다. 마레지구와 샹젤리제 거리는 눈에 띄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것과 같이 모두가 알고 있는 체인점, 즉 ‘브랜드’의 간판들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간판들이었고, ‘브랜드’가 아닌 간판들 역시 특이한 점은 없었다. 다만 프랑스의 간판 법률에 맞게 2층 이상에는 간판이 설치되어있지 않았고 우리나라와 같이 각기다른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지 않았다. 특히 밤에 네온사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벽에 글자를 새겨넣거나 심플한 디자인이 대다수였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이었고 한눈에 상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모로코와 비교하자면 디자인면에서 뛰어나지만 어떤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인지 간판만을 보고서는 알 수 없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팔찌로 유명한 ‘Merci’가 어떤 곳인지 모르고 갔다면 정말 생필품, 의류, 악세서리 등을 파는 편집숍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상점들이 가게안을 밖에서도 잘 볼 수 있게끔 되어있었고 그 가게가 어떤 가게인지 아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마지막 탐사, 마지막 파리>
우리의 탐사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계획했던 파리에서의 설문조사와 간판 탐사도 모두 마쳐 뜻하지 않게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졌다. 탐사를 위해 샹젤리제 거리를 다녀왔지만 간판 탐사와 설문조사 때문에 개선문을 그냥 지나쳤던 아쉬움이 남아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개선문으로 향했다. 먼곳에서 얼핏 보았던 개선문은 생각보다 더 크고 뜻깊은 곳이었다. 파견학생으로 리옹에서 공부 중인 선배가 개선문에 올라가 파리를 내려다 보는 것을 추천해 저녁에 다시 오기로 기약하고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걸었다. 탐사하면서 보지 못했던 간판들을 재발견할 수 있었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보니 수많은 사람들과 화려하고 깔끔한 거리가 다시 보였다. 그 거리를 보고 있자니 처음 탐사를 계획했을 때가 떠올랐다. 학교 앞 카페에서 탐사주제를 정하기 위해 팀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 창밖의 모현 거리모습이 눈에 보였고 고등학교때 읽었던 신문기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한국의 무질서한 간판문화. 샹젤리제 거리를 걸으며 다시한번 비교하게 되었고 프랑스의 간판 법률과 디자인 문화를 본떠 한국에 적용시키면 거리가 좀 더 정돈돼보이지 않을까 싶었고 우리 탐사의 결과가 엄청난 성공적인 결과물이 아니더라도 조금은 뜻깊은 결과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에는 개선문을 가는대신 에펠탑을 가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에펠탑에서 정각마다 5분씩 반짝거리는 에펠탑을 네번정도 보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와 떠날 채비를 했다. 잠에 들기 전, 우리는 꼭 다시 에펠탑 아래에서 모이기로 약속했고 잠이 오지않아 밤을 지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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