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2기] [유라시아] - 엑스쿠르시야 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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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6-03-25 15:21 | Read | 3,098 |
본문
탐사테마
우랄산맥과 태평양 사이에 있는 광활한 시베리아는 현재 러시아 연방 영토의 3/4, 지구 면적의 1/12를 차지하고 있다. 시베리아의 광활함 만큼이나 예부터 다양한 민족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왔다. 현재까지도 다양한 민족들이 시베리아에 삶의 터전을 내리고 생활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한민족의 시원 또한 시베리아에서 내려왔다는 역사학자들의 설이 있을 만큼 시베리아는 결코 우리에게 있어서 멀리 있는 땅이 아니다.이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은 분단된 한반도에 위치해 있다. 대한민국이 훗날 통일된 한반도에서 반도로서의 이점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대륙권 패권세력과 결탁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때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시베리아의 도시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본 팀의 탐사테마로 선정하게 되었다.
현 우리 사회는 러시아와 시베리아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매우 부족하다. 반도로서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륙과 연계해야된다는 주장만 할 뿐 대륙패권세력에 대한 이해할러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일례로 이명박 정부 당시 러시아와 ‘자원외교’라는 이름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인은 러시아가 ‘자원’만 파는 나라라는 것에 큰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항공기술, 기초과학에 큰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원을 수출하여 나라경제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다고 한다. 이러한 러시아인들의 특징을 알지 못한 채 이명박 정부는 이를 알지도 못한채 상대방의 약점을 긇어낸 꼴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일례는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닌 우리 사회의 현 주소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외교관계를 만들기 위해 시베리아와 러시아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절실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리 엑스쿠르시야팀은 대한민국과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 간의 친밀한 외교관계의 작은 한 발자국이 되고자 하였다.
출발 전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많은 생각을 하였다. 우리 팀이 도출해 낸 생각은 ‘그 지역이 우리에게 있어서 다가오는 의미와 도시발전역사’를 중심에 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팀은 ‘지역문화 비교’라는 큰 주제 아래에 ‘한민족에게 다가오는 지역적 의미’와 ‘각 도시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특징’을 소 주제로 정하였다.
우리 팀은 블라디보스톡, 이르쿠츠크, 울란우데, 예카테린부르크, 카잔 5 도시를 돌면서 그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도시발전역사 속에서 찾아보았으며, 현재 이 도시들이 우리 대한민국에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 지도 같이 생각해보면서 탐사하였다.
탐사목표
우리 우리팀은 ‘지역문화 비교 : 한민족에게 다가오는 지역적 의미, 각 도시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특징’을 중심으로 탐사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러시아라는 나라, 러시아 내의 지역과 도시들과 좀 더 활발한 협력을 이루는데 작은 걸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잡았으며,사전에 학습하였던 이론적 생활양식 및 문화와 실체의 간격을 확인하고자 하였고, 더 나아가 아직 연구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각 도시들의 특징들이 매우 다르게 나타나 각 도시들의 탐사목표에 대한 비중을 달리 두었다. 먼저 블라디보스톡에서는 구한말부터 시작되어온 한민족들의 이주와 고려인, 일제감정기 시절 항일독립투사들의 독립운동 기지로서의 도시발전변천사를 중심에 두었다. 그 다음으로 예부터 연해주 지역에 살아왔었던 민족들에 대해서도 연구에 비중을 두어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탐사일정 당시 기록적인 폭설로 인해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일정을 대폭 축소하였고, 신한촌 기념비와 우수리스크에 위치해 있는 고려인문화센터 방문을 중점적으로 일정을 소화하였다. 이르쿠츠크에서는 ‘데카브리스트’들이 이르쿠츠크 지역발전에 끼친 영향과 한민족의 사원을 중심으로 탐사하였다. 울라우데에서는 브리야트 민족의 특징들과 한민족의 유사점, 브리야트 민족의 불교문화와 러시아 내의 불교문화 발전과정을 중점적으로 탐사하였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과 로마노프 왕조,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도시라는 특징을 중심에 두었다. 카잔에서는 타타르 민족들의 특징과 카잔 내의 이슬람 문화를 중점적으로 탐사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탐사내용
<블라디보스톡> 1월 17일 ~ 1월 20일
1월 17일 오후 4시 경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을 당시 굉장히 맑은 날씨를 띄고 있어서 굉장히 순조로운 출발을 예상하며 호텔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호텔로 이동하는 택시에서 현지 블라디브스톡에서 코트라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는 친구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블라디보스톡의 특징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현지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친구는 블라디보스톡과 인접해 있는 국가들이 많고, 인접국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그 예로 블라디보스톡에는 한국, 중국, 일본, 북한 식당이 타 러시아 도시들에 비해서 많다고 하였다. 그래서 도착 첫날 우리는 저녁식사를 북한식당에서 하기로 정하였다. 북한식당에서의 음식 맛은 한국에서 먹던 음식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맛이 미묘하게 달라 신기한 맛을 더 자아내게 했다. 음식도 대체적으로 맛있었다. 음식맛의 차이를 설명하면 경상도 토박이 사람이 전라도 한식당에서 한정식을 먹을 때의 느낌?? 같은 생각도 하였다.
다음날 1월 18일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았을 때 놀라움을 금치못하였다. 길거리에는 하얗게 눈이 수복히 쌓여있고 하늘에는 끔찍할 정도로 하얀 눈들이 내 눈의 시야를 가리면서 내리고 있었다. 흡사 자연재해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였다. 현지 티비뉴스에서는 기록적인 폭설이 내리고 있는 중이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침식사를 팀원들과 같이 먹으면서 애초에 계획하였던 일정대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신한촌을 방문한 뒤 점심을 먹은 뒤 그 근처에 있는 해양공원만 가기로 결정하였다.
거센 눈을 해치고 도착한 신한촌기념비에서 인터넷으로만 보았던 비석 3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연해주 신한촌 기념탐 문이 놓여있었고, 그 내용이 한글과 러시아어로도 쓰여있었다.기념탑문에는 ‘민족의 최고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며,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신인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당하자 국내외 지사들은 신한촌에 걸집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집사의 결의를 다졌다. 설명회와 권업회 길성, 한민학교 설립, 신문발간, 13도의군 찰설 등으로 민족역량을 배양하고 1919년에는 망명정보(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하여 대일항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한민족은 1937년 불행하게도 중앙아시아에 흩어지게 되고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이때 해외한민족연구소는 3.1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신인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재러.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며, 후손들에게 역사인식을 일개워 주기 위하여 이 기념탑을 세운다.“ 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역사를 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를 만들기 위해 수 많은 선조들이 희생하였고, 피를 흘렀으며, 수많은 땀과 노력이 모여졌고 민족의 아픔이 설여있을 것이다. 신한촌 기념비를 갔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자긍심이 한층 더 깊어졌다. 신한촌 기념비에는 큰 비석이 세 개가 놓여져 있는데 이는 대한민국 국민, 북한인민, 고려인을 뜻하고, 주위에 놓여진 8개의 작은 비석은 뿔뿔이 흩어진 해외동포를 의미한다고 한다. 70년 전 우리 선조들이 민족의 해방이라는 큰 역사적인 획을 그었듯이 오늘날 우리 민족이 처해있는 남북 민족 분단 또한 잘 해결되어 훗날 내 후손들에게도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도 하였다.
이 후 블린으로 점심을 먹고, 추운 날 얼어붙은 몸이 덜 풀려 근처 카페에서 좀 더 쉬었다 가기로 하였다. 블린과 카페에서 이곳은 아시아의 극동에 위치해있지만 아시아가 아닌 지역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물론 건물 내외벽은 동양의 양식들과는 차별화 되있었고 메뉴와 음식맛 또한 한국에서 먹던 맛, 동남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먹었던 현지음식에서 느껴졌던 맛과는 매우 차별화 되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의 추운 날씨 때문인지 음식 맛에서는 단 맛이 많이 났고, 우유에는 지방함유가 많아 유제품 또한 한국에서 맛보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19세기 이 전까지는 고구려, 발해, 명나라, 청나라 국민들이 살아왔지만 19세기 이 후 연해주를 러시아가 가져가면서 발전하게 되어 많은 러시아인들이 이주하엿고 그로 인해 지금과 같은 양식이 띄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다음날 우수리스크로 가는 열차표를 예약하기 위해 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역으로 가기위해서는 해양공원을 지나야만 갈 수 있었다. 그래서 눈이 많이 내리지만 해양공원을 지나 역까지 걸어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출발 후 10분 후 느끼게 되었다. 눈은 아침보다 더 많이 내리기 시작하였고, 눈 때문에 시야가 많이 가려져 있었다. 버스 정류장까지도 거리가 꽤 많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탐사 초반이라 체력이 많이 남아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금방 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19일 아침일찍 우수리스크로 전기열차를 타고 이동하기 위해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역으로 이동하였다. 전 날 내리던 눈이 다음날까지 이어져 역까지 이동시간이 길어질 것을 예상해 도착예정시간보다 1시간 일찍 출발하였는데 다행히도 교통체증이 우려했던 것보다 심하지 않아 무사히 역에 도착하여 여유롭게 열차에 탈 수 있었다. 우리 팀이 탔던 열차는 일반 시베리아 횡단열차와는 다른 ‘전기열차’로 블라디보스톡 인근만 운행하면서 지정된 좌석없이 빈 좌석에 앉아서 가는 시스템인 열차였다. 우리 팀원들 중에 러시아에서 열차를 타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 열차를 타는데까지 헤매고 여기저기에 물어보며 탔지만 눈 오는 날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떠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 계속 되는 폭설로 1시간 동안 걱정을 이루게 만들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다행히도 우리 팀은 우수리스크 역에 잘 도착할 수 있었고, 폭설로 인해 일정을 간소화하여 고려인문화센터만 방문하기로 하였다. 고려인문화센터로 가는 버스에서 지도를 잘 못보는 바람에 버스를 한정거장 지나 내렸다. 그래서 우리 팀은 러시아에서 히말라야 영화를 찍듯이 고려인문화센터를 찾아 나섰고, 고려인문화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듯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2시간동안 기차행과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히말라야 영화를 찍는 바람에 시간이 점심시간 대를 훌쩍 지나버린데다 체력이 많이 소비되어 고려인문화센터로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한 것은 점심식사였다. 점심을 주문한 후 간단히 고려인문화센터 내부를 둘러보고 액자에 담겨져 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느낀 점은 연해주에 이런 문화기관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 자신의 생각으로는 민족의 정체성은 그 민족이 가지고 있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그 문화라 함은 의식주는 물론 언어, 얼, 춤과 노래, 한 등이 모두 담겨져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문화가 민족을 지탱해주는 기둥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런 우리 민족의 문화가 연해주라는 땅에서 고히 지켜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참 다행이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고려인문화센터 식당에서 파는 된장찌개, 국수(국시), 비빔밥, 육개장을 먹고 고려인 문화센터 박물관을 견학하였다.
고려인문화센터 박물관의 테마는 4가지 씨앗, 불꽃, 들꽃, 평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씨앗은 근대 한인 이주사와 연해주 정착시기의 모습을 소개하고, 들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하인 투쟁의 역사를 소개해주고 있다. 들꽃에는 1937년 시작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사를 담고 있으며, 평화에는 새로 쓰는 연해주 한인의 역사와 미래 지향적 비전을 그리고 있다. 1863년 시작된 한인의 이주는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까지 계속된다. 특히 구한말부터 연해주는 대외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자 희망의 둥지였다고 한다. 1910년 일제에 의한 조선 강점이 이루어지자 한인들은 조직적 항일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권업회’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는 가장 손꼽을 만한 당시 항일 조직이었다. 지방회를 조직해 학교를 설립하고 교원을 양성했으며, 신문을 발행해 교육 계몽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이들이 운영한 학교 중에서 ‘한민학교’는 최고의 시설과 규모를 갖추고, 근대 학문과 민족주의 전파로 항일 애국의 구심점이 되었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1901년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로 부임한 이범진,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가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그는 일본의 소환 명령도 거부한 채, 대한제국 황제의 특사로 항일 구국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1907년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을 헤이그 밀사로 파견했고, 연해주 항일 의병 조직인 동의회 결성에도 참여케 한다. 그러나 일제의 저선 강점이 완료되자 1911년 끝내 그는 목을 매 생을 마감했다. 최후까지 목숨으로 일제에 항거한 그의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우즈벤스크 묘지 제 8구욕에 안장되어있다고 한다. 이 이외에도 연해주에는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동의회, 성명회와 13도의군, 대한광복군정부, 권업회 등이 세워졌고, 이범진 외에도 이상설과 이동휘 독립투사도 연해주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이 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이 높은 한인들은 늘 경계 대상으로 분류 되었고 한인 민족주의자들이 속속 숙청됐으며, 결국 1937년 연해주의 한인 전체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현재의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 CIS국가에서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이루고 있다. 이제 연해주 지역은 동북아 발전의 비전을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해주 지역에는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으며, 오랜 전쟁과 반목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동북아시대의 평화 교두보로 부상하고 있다. 미래지향적 협력을 추구하는 한.러 정부와 동북아평화연대를 포함한 국내외 민간 단체들이 연해주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재정착하는 고려인 역사의 풍요로운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해주의 발전은 동북아 발전의 바로미터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후 우수리스크 역으로 다시 돌아와 블라비보스톡으로 향했고, 저녁식사 후 호텔로 돌아와 다음 날 두 번째 행선지 이르쿠츠크로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다음 날 민족의 아픔이 녹아있는 블라디보스톡 땅을 떠나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선조들 처럼 앞으로 가족과,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비행시간 동안 생각하게 되었다.
<이르쿠츠크> 20일(수)~22일(금)
1월 20일 수요일.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약 2시경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날씨가 영하 20도보다 낮았던 때라 상당히 추웠다. 숨 쉴 때 코 속이 얼어붙는 것이 느껴지며 두꺼운 바지 두겹을 입었지만 허벅지에 소름이 돋는 것을 보고 우리의 두 번째 도시,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우리 팀은 일정을 소화해내기에 앞서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여 짐을 풀고 늦은 점심식사를 호텔에서 해결하였다. 재정비후 향토박물관으로 향하였다. 버스를 타거나 걸어다니면서 본 이르쿠츠크는 내가 상상한 것과는 조금 달랐던 도시라는 것을 알았다.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미지도 물론 컸지만 소수민족에 관한 유물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다는 부분이 좀 더 인상 깊어 투박한 도시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직접 와서 본 이르쿠츠크는 생각보다 발달되어 있고 아름다운 건축물들도 많았다. 우리 일행 중 한명은 유럽에 가본 적은 없지만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유럽의 냄새가 많이 났던 도시라고 느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향토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이르쿠츠크에서 처음가본 이 박물관에는 우리들의 흥미를 끄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에벤키족, 브랴트족, 야쿠츠인, 돌궐족, 유까기르족 등 다양한 종족들의 의상과 사냥도구, 안장, 또는 아이들을 위한 도구 등을 구경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직접보고 오니 이 넓은 러시아땅에 우리가 오늘 본 민족들 뿐 만아니라 더 많은 소수민족들이 가정을 꾸리고 마을을 만들어 살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소수민족에 관한 문제가 작은 것이 아닐뿐더러 러시아를 이해하는데 빠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한번 더 느꼈다. 그리고 이 향토박물관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우리 팀이 박물관을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을 때 카메라를 든 기자분이 오셔서 우리가 박물관 전시품을 배경으로 셀카 찍는 것을 촬영해도 되는지 물어보셨다. 처음에는 약간 당황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기억에 오래 남을 추억인 것 같다. 동부시베리아의 사라진 역사를 볼 수 있다는 말에 참 기대가 되던 박물관이었는데, 비록 러시아어로 된 설명밖에 없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다양한 의상과 사진들 덕분에 시각적으로 볼거리가 많은 박물관이였다. 우리 팀이 마지막까지 남아 구경하고 가서인지 주변 할머니 분들이 흐믓하게 바라보시던 것이 생각난다. 박물관에서 나와 바로 앞 광장을 가니 앙가라강이 있었다. 이르쿠츠크에는 앙가라강에 관한 전설이 하나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바이칼 신에게 330명의 아들과 앙가라라는 한 명의 딸이 있었는데 딸, 앙가라가 예니세이라는 남자를 사모하여 아버지가 시집보내려던 남자에게 가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급기야 앙가라와 예니세이는 도망을 가게되고 격노한 바이칼이 던진 바위에 앙가라가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앙가라가 흘린 눈물이 강이 되어 앙가라강이 되었고 그 강이 유일하게 예니세이 강을 향해 흘러가게 되었다고 하는데..우리가 본 앙가라강 위에 수증기가 뿌옇게 떠있었다. 물 안에 비해 물밖이 너무나 춥기 때문이였는데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보니 죽은 뒤 강물이 되어 예니세이를 만난 자신을 안타깝게 여겨 슬프게 울다 힘이 빠져 지친 앙가라처럼 보였다.
이렇게 이르쿠츠크 첫 날에는 간단히 향토박물관을 탐사했다. 그 뒤 숙소 주변에 있는 마트에 잠시 들려 장을 보고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 후 다음날을 위한 일정 재정검과 회의를 했다.
이르쿠츠크 둘째날, 21일 목요일. 이 날의 첫 일정은 딸쯰 박물관 탐사였다. 이르쿠츠크의 딸찌 민속 박물관은 17~19세기 바이칼 호수일대에 거주한 민족(러시아인, 브리야트족의 건축물에 집중)들의 건축물 40여 채와 8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으로 가기 위하여 아침부터 서둘러 1시간 반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 이여서 이동하는데 불편함이 있었지만 박물관 안에 내용물이 알차서 간 보람 있었다. 하지만 딸쯰박물관은 70헥타르의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야외 박물관이었기에 구경하는 데에 있어 너무나 추운 날씨가 방해되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시베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러시아인, 브랴트인, 에벤키인 등 다양한 민족들의 집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책에서만 보았던 러시아인들이 살던 전통 목조건물인 이즈바와 부리야트족의 게르도 보았다. 짧은 시베리아 역사에서도 다양하게 혼재해있는 복합적인 건축양식과 주거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곳은 러시아영화인 뻐꾸기를 보았을 때 나왔던 다리가 아주 긴 식량창고였다. 뻐꾸기라는 영화에서도 사미족(북쪽 핀란드는 물론, 스웨덴, 노르웨이, 러시아에 걸쳐 사는 소수민족),여주인공이 나와 이 식량창고를 이용했던게 생각난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이 식량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사다리 없이 높이 올려놓은 지혜를 보고 놀라기도 했다.
이곳에서 러시아인들의 집구조도 볼 수 있었다. 가는 집마다 집한쪽 구석에 이콘들과 꽃이 있어 기도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만했다. 그리고 러시아인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의 집은 한국에 비해 창문이 굉장히 작았다. 아니면 창문이 아예 없던 집도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여서 그런지 원시적인 집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많은 집들이 뾰족한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나 추웠던 박물관 구경이었지만 무사히 마치고 딸쯰 박물관에서 나와 리스트비앙카행 버스를 타러 떠났다. 버스가 자주 오는 것이 아니여서 고속도로에서 세찬바람을 맞으며 기다린 끝에 바이칼호수를 볼 수 있는 리스트비앙카로 떠났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호수를 빼놓을 수 없는 도시이다. 겨울이여서 호수가 꽁꽁얼어 눈이 덮혀있었다. 호수의 한 쪽 면은 호수인지 광활한 평원인지 알아볼 수 조차 없었다. 얼어붙은 바이칼호수를 보았을 때 끝이 안보여 놀랍기만 하였다.
도착하자마자 들어간 곳은 리스트비앙카의 한 식당이었다. 이곳, 바이칼호수에서만 볼 수 있다는 생선인 ‘오물’을 가지고 한 요리들을 맛보았다. 오물 회와 오물 구이 등 다양한 요리법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입맛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추위와 싸우느라 힘들었던 몸을 풀어주는 시간을 가졌다.
22일 금요일. 이르쿠츠크 삼일째. 이 날의 첫일정은 즈나멘스키수도원 방문이었다. 이르쿠츠크와 울란우데, 치타지역까지 관장하는 동시베리아 정교회의 본산인 즈나멘스키 수도원에는 유명인사들이 묻힌 공동묘지도 함께 있었다.
이르쿠츠크는 19세기에 들어와서 유형지로 변모하며 제카브리스트들과 그 부인들에 의해 시베리아 동토에 자유와 근대 문명이 불어닥쳤다. 따라서 이곳은 시베리아의 파리로 위상 변화가 일어났다. 주택들을 비롯한 건물들은 크기나 외양에서 같은 것이 거의 없고 다양한 색과 문양은 기괴할 정도로 다양하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이곳만의 개성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지 이곳에서는 ‘시베리아 바로크’형식의 독특한 건물이 있었다. 샤머니즘과 러시아 정교회가 추구하는 전통양식과 유럽의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시베리아 바로크 양식’은 바야가블레니어 사원을 통해 알수 있다. 지금까지 봤던 양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건물을 통해 이르쿠츠크의 개성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든다.
마지막 일정은 제카브리스트 박물관 방문이었다. 이곳의 방문을 통해 제카브리스트들이 이르쿠츠까지의 여정에서 힘든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온 부인들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배를 왔지만 맨손으로 그들이 이뤄놓은 이르쿠츠크의 유럽풍은 참으로 놀라웠다.
이렇게 마지막날에는 제카브리스트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이르쿠츠크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우리 팀원 중 한 명은 이르쿠츠크의 모습을 보며 다른 대도시에 전혀 꿀리지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는 도시라며 극찬하였다. 나는 그 이유를 제카브리스트들이 만들어준 이르쿠츠크의 개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울란우데> 1월 23일 ~ 1월 25일
출발 전 우랄항공사에서 메일을 받았다. 원래는 26일 울란우데에서 예카테린부르크로 이동할 예정이었지만 26일 경유지인 모스크바행 비행기가 돌연 취소되면서 다른 항목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그래서 급히 예매사 airtichet24에 전화하여 25일에 울란우데를 떠나는 것으로 일정으로 급히 수정하였다.
22일 22시 이르쿠츠크에서 열차 ‘쿠페’를 타고 울란우데로 출발하였다. 10시간 가까이 열차로 이동하였지만 침대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니 금새 도착할 수 있었다. 울란우데에 도착 후 보았던 풍경은 사뭇 낯설지가 않았다. 역 안의 사람 대부분이 한국사람들과 인상이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착 후 팀원들은 낯설지 않은 풍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새벽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택시를 잡아 숙소로 이동하였고, 미리 체크인 시간을 알려준 덕에 순조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원래 계획은 23일에 도착하여 일정없이 하루종일 쉬면서 자유시간을 갖는 것이였지만 울란항공의 급작스런 일정변경으로 인해 새벽기차로 인해 쌓인 피로만 풀고 울란우데 중앙시장으로 향하였다. 울란우데의 중앙시장은 다른 러시아 도시의 시장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전체적으로 동양권 나라의 시장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부랴트 민족의 특징답게 불교물품이 다른 도시들에 비해 많았으며, 꿀을 판매하는 모습 또한 굉장히 많이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지인들에게 선물로 줄 꿀도 구입하였고, 구입하면서 주인아주머니께서 맛보라면서 꿀을 찍어주어 종류별로 한입씩 맛볼 수 있었다. 한번 맛을 보니 한국 시중에서 판매되는 꿀과는 다른 깊은 토종 꿀 맛이 느껴지자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시장에서 돌아올 때 꿀을 한봉지 가득 사오게 되었다. 최근 필자(10학번 전영민)의 아버지 회사에서 아무르 지역 꿀을 수입하는 사업을 시작하여 시베리아 꿀이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울란우데 시장에 특히 많은 꿀들이 판매되고 있는 줄을 몰랐다. 그래서 울란우데의 시장 풍경이 더욱 더 신기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후 네이버에 ‘울란우데 꿀’이라고 검색해보았지만 검색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시베리아의 자작나무처럼 꿀 또한 시베리아 토종 꿀 전체가 유명한 것 같다는 생각도 하였다.
둘 째날, 우리는 아침 일찍 택시를 예약하여 이볼긴스끼 다짠으로 이동하였다. 부랴트 민족의 특징 중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라마교라고 할 숭 있다. 전날 울란우데의 중앙시장에서 불교물건들을 보면서 울란우데의 불교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졌었다. 그래서 우리 팀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불교사원인 이볼긴스끼 다짠을 울란우데 탐사의 가장 중요한 테마로 잡았다. 이볼긴스끼 다짠은 시내에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택시를 타고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이볼긴스끼 다짠으로 가는 시외버스 정보가 사이트 별로 제각기 다를 뿐더러 영하 30도의 날씨에서 이동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팀원들의 체력과 건강에 영향을 줄 수 있겠다는 판단으로 편도 750루블을 지불하고 이볼긴스끼 다짠으로 이동하였다.
이볼긴스끼 다짠에 도착해 제일 먼저 우리 앞에 서있는 정문을 보자 불교사원에 와있다는 느낌을 한번에 받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절과 다르게 이볼긴스끼 다짠은 불교사원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한 팀원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 절이 좀 더 고풍스러우며 울란우데의 불교사원은 생각보다 조잡한 감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이는 울란우데의 불교사원에는 우리나라 절과는 달리 화려한 색을 많이 사용하였고, 울란우데 불교사원사제들의 예복 또한 우리나라 스님의 예복과는 다르게 밝은 색이 들어가 있어 아무래도 같은 불교라도 이질적이고 낯선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울란우데의 불교사원이 티벳 지방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인지 손으로 돌리면서 기도를 하는 기구들과 스님들의 기도를 외우는 의식이 신선하였다. 우리 팀이 갔을 때 우연히도 울란우데 스님들이 법회를 하고 있어서 잠시 들어가 보았는데 우리나라와는 불경을 읊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달랐다. 먼저 피리와 같은 악기와 북, 징을 연주하는 것이 가장 다른 점이였던 것 같고, 목탁을 사용하지 않아 의외라는 생각도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절에서는 절 안에서 스님을 만나면 합장을 하지만 울란우데의 불교사원에서는 스님을 만나도 합장을 하지 않아 다소 어색하였다.
게다가 이곳에 몽골인이 많이 오는지 사람들이 우리팀원들에게 몽골어 혹은 부랴트어로 많이 물어보았고, 어디서 왔냐는 물음과 함께 몽골에서 왔냐는 질문도 같이 따라 붙었었다. 몽골인이 많이 오는 구나를 눈으로 느낀 것은 사원마다 모금함같은게 있는데 그곳에 몽골화폐가 많이 놓여져 있었다. 울란우데가 몽골과 많이 인접해 있고, 소련시절 부랴트 공화국이란느 이름이 생기기전 몽골-부랴트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었던 만큼 몽골과의 접점도 많다고 느꼈다.
이 후 이볼긴스끼 다짠 안에 있는 기념품 점으로 발걸음을 향하였다. 기념품 점에 진열된 물품들 대부분이 우리나라 불교물품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달랐던 것은 법회장면에서도 보지못했던 목탁이 없었다. 그리고 신기하게 보았던 물건이 ‘구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을 가리고 있는 동승 3명의 인형’이었다. 이를 보면서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전체적인 가르침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이볼긴스끼 다짠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태국문양’을 보면서 확신을 이루얻다. 이는 불교에서 갖아 중요시하는 ‘중도의 가르침’을 부랴트 공화국의 라마교에서도 가르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건물 내부는 촬영이 일절 금지 되있어 사진으로 담지 못했던 것이 아쉬운 부분 중 하나였다.
부랴트 민족의 전통음식을 먹기 위해 중앙광장으로 이동하여 울란우데에서 가장 유명한 레닌두상을 보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제 1학년을 끝낸 팀원 중의 한명이 왜 여기에 레닌 동상이 있냐고 묻자. 러시아 도시들마다 레닌 동상이 하나씩은 다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럼 왜 울란우데에는 레닌 전체 동상이 아니라 레닌 머리만 있는 거에요??라고 묻자 나도 그에 대한 답변이 궁금하여 한국에 돌아온 후 이에 대해 설명해주는 서적을 찾았지만 찾는데에 실패하여 아쉬움을 달래야만 하였다. 이 후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울란우데의 일식집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일식집이지만 일본음식보다 중국음식, 몽골음식, 부랴트 음식, 한국음식이 더 많은 곳이었다. 이 곳에서 종업원에게 부랴트 전통음식 중에서 추천해달라고 요구하였고 그에 주문을 하였다. 처음 맛본 맛은 먼가 몽골스럽다 였다. 만두와 불고기와 흡사한 음식이였는데 만두 내의 육즙이 많았고, 불고기와 비슷한 부랴트음식은 된장 맛이 비슷하게 났었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부랴트 민속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그 곳에서 전통 옷을 입는 체험도 있어 여팀원 두 명이 입어보기도 하였다. 흡사 몽골의상과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기도 하였다.
다음 날 간추려진 일정 때문에 목표했던 탐사목표를 미처 채우지 못하고 예카테린부르크로 이동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동하는 당일 눈이 내리는 바람에 한 시간 연착이 되어 걱정이 많았었지만 무사히 이륙할 수 있었다.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른 부랴트 민족. 앞으로도 우리 한민족과 더 많은 교류가 발전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예카테린부르크> (1월 26 ~ 1월 28 일)
26일 오후 7시 가량 일정대로 울란우데에서 모스크바를 경유해 도착하는 항공편에서 제공하는 기내식을 먹은 후 저희는 무사히 예카테린부르크공항에 도착하였다. 장시간 체류 및 비행으로 지쳐 첫날 도심 한 바퀴를 둘러보는 일정을 소화해내지 못할까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숙소로 가는 택시를 타는 동안 동양의 문화에 관심이 많고 친절하셨던 택시 기사님께서 숙소로 가는 길에 있는 예카테린부르크 도심의 유명한 건물 및 장소를 소개시켜주시고 설명해 주셔서 일정을 간단히 소화할 수 있다. 추가로, 숙소주변을 둘러보면서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의 위치를 확인하고 근처 마켓에 들러 장을 본 후 숙소로 돌아와 다음날 일정을 정리하고 각자 정비할 시간을 가다.
27일 오전 8시경에 일어나 준비한 후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고 당일 탐방을 시작했다. 우선, 일정에 따라 과거 예카테린부르크가 ‘처형’의 도시가 된 계기와 관련 있는 피의 성당 및 로마노프 처형장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꽤나 작은 예배당과 폭설로 인해 처음에 입구를 찾지 못하여 조금 방황했지만 이내 주변인의 도움으로 입구를 찾아 피의 성당으로 들어갔다. 피의 성당 내부는 다른 도시에서 보아왔던 여느 예배당처럼 아름답고 경건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비록 차별화된 느낌이 크게 드는 성당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예카테린부르크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성소인 이곳은 1918 년 로마노프 왕조이자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2세 일가가 볼셰비키 혁명군으로부터 처형을 당한 사건을 기리면서 세워진 성당으로, 성당 곳곳에 그리고 성당 밖 또한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사진과 그의 가족사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카테린부르크 첫 번째 탐방지인 피의 성당이 기리는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는 처형 당시 사회개혁에 있어 필수적이었던 전제군주제를 변화를 두려워하여 도입하지 않고 이에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생활고와 그들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그들의 민족운동을 무력진압으로 대처하면서 민중들과 볼셰비키들로부터 엄청난 반감을 이끌게 된다. 그리고 민중운동으로 생존권을 쟁취하고자했던 노동쟁의로 이어진 2월 혁명, 임시정부를 급습한 볼셰비키 세력들 주축의 10월 혁명으로 인해 로마노프 왕조는 무너지고 사회주의 기반의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된다. 그 후 니콜라이2세는 유배지로 이동하게 되지만 결국 총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의 유배지이자 그가 잠들었던 탐사지로 살벌하거나 무거울 것 같았던 예상과는 달리 피의성당은 너무나도 평화로운 시골의 작은 예배당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의외였고 한편으로는 조금 신기하기도 했으며,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 역사가 자연스럽게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생각 또한 들어 꽤나 만족스러웠던 탐사지였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피의성당, 그 뒤의 자그마한 목조 예배당으로 니콜라이 2세의 삼촌인 세르게이 대공의 부인이자, 황후 알렉산드라의 언니 수녀의 신분이었던 자가 황제 가족의 처형 이후 인근의 탄광에 던져져서 매장을 당했는데 그녀를 기리면서 세워진 조그마한 목조물이라 한다. 깊게 쌓인 눈으로 인해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못해 조금 아쉬움이 남아있다. 한 장소에 이렇게 여러 처형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과거 예카테린부르크 지역의 이미지는 가히 ‘처형의 지역’이라 일컫을 만 하다고 생각했던 탐사 이전의 생각과는 달리 직접 다녀와 보니 예카테린부르크는 비록 과거 처형이 난무했던 곳이지만 그 흔적이 너무나도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그 중심에 깃들어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간단히 근처 중국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지역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해결한 후 다음으로 탐방했던 명소는 도보로 10분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는 예카테린부르크 역사박물관이다. 계획도시로 명성이 높은 예카테린부르크의 분위기와 걸맞게 박물관 또한 저희가 탐방한 박물관 중 가장 최신식이었다. 러시아 근대역사와 예카테린부르크라는 도시가 세워지게 된 배경과 그 과정들을 3D영상으로 설명해주었고 그 안의 유적들과 그림들 또한 보관상태가 매우 훌륭했고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각 도시마다 역사박물관을 들러 왔었기에 예카테린부르크에서도 굳이 역사박물관을 탐방해야할까? 라는 의문점을 잠시 지녔었지만 예카테린부르크 역사박물관을 탐방한 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는 영토가 넓은 만큼 각 도시마다 고유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 특색이 매우 뚜렷했기 때문에 도심의 역사박물관은 중요한 탐사지 임을 깨달았다. 예카테린부르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지시 하에 건설된 도시로서 계획도시로 유명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본받아 만든 도시로서 예카테린부르크 또한 계획도시다. 그 말에 걸맞게 예카테린부르크의 도심을 걷다보면 체계적으로 거리가 잘 정비되어있다는 느낌이 가득 들었다.
다음으로는 예카테린부르크 도심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유럽-아시아 경계비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었다. 이곳에는 말 그대로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경계비가 세워져있는데 이 고원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를 기준으로 유러피언 러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이 나뉜다. 유럽-아시아 경계비는 실제로 가 보았을 때 근처에 눈에 띄는 동서양의 문화의 결합된 특색이 보이지는 않아 아쉬웠지만, 나름의 의미성과 지역적 특색을 소개하는 장소로 유명하여 꽤나 사람들이 찾는 장소 같았다. 바로 옆에 기념주화를 만들어주시는 상인 한분이 계셨는데 커다란 망치로 주화를 만들어주시는 모습을 보고 다들 신기해했었다. 또한 유럽-아시아 경계비 옆에는 샤머니즘적인 동양의 특수성이 묻어나오는 조그마한 사원으로 러시아 민족적, 지역적 문화의 특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 민족문화 또한 다양함을 보여주는 장소인 유럽-아시아 경계비 탐방을 마치고 다시 시내로 돌아와 숙소 근처에 위치해있는 패스트 푸드점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은 후 숙소로 다시 돌아와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28일 오전8시경 기상하여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고난 후 당일 일정을 시작한다.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 탐사지 규모 때문에 기존 일정과는 다르게 새로운 탐사지를 몇 군데 추가하여 진행하였다. 우선, 숙소 근처에 위치해있는 우랄스카야 역으로 이동한 후, 지하철을 이용하여 15분정도 후인 1905역에 내려 5분정도 걸어 1905광장을 둘러보았다. 실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의 발생지였던 광장은 아니지만, 그 사건을 기리면서 작게 만든 광장은 꽤나 평화로웠다. 간단히 광장을 둘러본 후, 도심의 중심에 위치한 도시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인 븨소치키타워로 이동하였다. 타워에서 내려다본 예카테린부르크의 전경은 마치 바둑판처럼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도시의 전반적인 모습이 계획되어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드는 구조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타워에서 도시를 한 바퀴 둘러보며 저희가 들렀던 탐방지를 찾아보면서 마무리 한 후, 유명한 지중해 음식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를 타고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지중해 음식점은 지중해 요리를 러시아식으로 잘 풀어 만들어 놓은 것 같아 신기한 느낌을 받았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술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예술 박물관은 우랄의 조각들과 다양한 미술품들을 볼 수 있었는데 상당히 수준이 높다고 다들 흥미롭게 보았다. 그림 뿐 아니라 인형, 조각, 예술품, 우랄의 광물들을 전시해 놓은 큰 규모의 예술 박물관으로 한 바퀴 둘러보는데만 시간이 꽤나 걸렸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10분 정도 버스로 이동하면 위치해 있는 우랄연방 대학교 맞은편에 위치한 예카테린부르크의 오페라, 발레극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예술인 발레는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볼 수 있는 대중문화로 자리 잡고 있어 관람해보자는 의견을 모아 전날 예매한 표로 발레공연을 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발레는 러시아의 대중문화라는 말에 걸맞게 공연 시작 전에 극장은 관객으로 꽉 찼었다. 보는 내내 러시아에 와서 발레공연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좋았고 공연 또한 굉장히 우아하고 멋졌다. 다들 러시아의 발레에 푹 빠진 것 같아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문화 체험을 하면서 간단히 저녁식사를 한 후 공항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2박3일간 탐사했던 예카테린부르크는 정제되고 체계적인 도시였다. 계획도시, 건설도시인만큼 세련된 느낌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이 후 대한민국이 시베리아를 통해 유럽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예카테린부르크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고도 느꼈다.
<카잔> 1월 30일 ~ 1월 31일
볼가강 유역에 위치한 카잔이란 도시는 상당히 아름답고 역사가 오랜 도시이다. 10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해서 ‘밀레니엄 파크’ 라는 공원도 있다. 이 곳 카잔은 옛날 ‘볼가 불가르’란 나라의 수도인 ‘불가르’에서 북쪽의 요새를 만들면서 역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카잔은 이 곳 말로는 솥이라는 뜻이다. 분지지형이기도 하지만, 전해 내려오는 전설로는 당시 다른 나라에 침략을 받은 볼가 불가르에서 왕자가 피난민들과 함께 여러 고생을 겪으며 카잔지역까지 도망을 쳤고 아름다운 지역에 이르러 정착하려고 했는데, 가장 가치있는 것을 바치란 예언자의 말을 듣고선 도망칠 때 모든 이들이 음식을 해먹던 커다란 솥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그 자리가 카잔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카잔은 카잔한국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1500년대에는 뇌제란 이름으로 유명한 이반4세의 침략을 받았고 그 때부터 러시아의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카잔은 현재 따따르스탄 공화국의 수도이며, 러시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이다. 특이한 점은 많은 수의 타타르인들이 거주중이기 때문에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게 카잔은 이슬람의 색깔이 짙다.
카잔이 수도로 있는 타타르스탄은 1990년 8월 31일 주권선언을 한다. 이는 체첸을 제외하면, 1992년 연방조약을 거부한 유일한 공화국이다. 공화국 대통령 샤이미예프(Shaimiyev)는 1994년에 연방 정부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여, 석유자원 및 산업시설에 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대부분의 세입에 대한 권리·독자적인 대외 무역 정책을 추진할 권리 등을 얻어냈다. 이처럼 타타르스탄은 자신들만의 색깔을 강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때문에 스스로 힘을 믿고 있기에 이들은 러시아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대통령은 민티메르 샤예이미예프이다. 2005년 3월 25일 러시아 연방 대통령 푸틴에 의해 지명되었다. 타타르스탄 공화국은 지역 경제 자율성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와 내구성 있는 협상을 이루어 왔고 국제적인 마인드까지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카잔에서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할 수 있다.
“자치 공화국들이여, 가져갈 수 있을 만큼의 모든 권리를 가져가시오. 만일 감당할 수 없는 권력이 있다면, 그것만 중앙정부에 남겨두시오”
타타르스탄 공화국은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이 당시 민티메르 샤예이미예프 대통령이 첫 번째 대통령으로 선출 되었으며 보리스 옐친 대통령도 러시아 연방의 첫 번째 대통령으로 선출 되었다. 이 당시부터 모스크바와의 안정적인 정치적 관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이에 힘입어 민티메르 샤예이미예프 대통령은 타타르스탄 공화국 내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누려 지금까지 임기를 계속해오고 있다.
또한 카잔은 과거부터 쭉 이어온 교통의 중심지이자 상업지역이였다. 과거에는 볼가강을 이용한 해상운송의 중심지였다. 때문에 이반4세의 침입 당시 따따르인들이 자시들의 금은보화를 카반호수에 숨겨놓았다는 전설은 매우 유명하다. 또한 현재는 횡단열차가 지나가는 도시 중 하나이고 모스크바와의 거리도 상대적으로 가까운 편이기 때문에 큰 영향력을 가진다.
따따르스탄은 또한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다. 러시아에서도 손꼽히는 산유지역으로 유명하고, 인적자원 역시 훌륭하다. 카잔에는 카잔연방대학교가 있는데, 이 대학은 상당한 명문대로 유명하다. 이러한 자원들의 결합은 따따르스탄을 상당히 수준 높은 생활양식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은 따따르스탄만의 자율권에 있어서도 상당히 큰 힘을 갖게 한다. 그리고 카잔은 계속해서 스포츠 경기를 유치하면서 성장하고 있다. 2013년도에는 카잔 유니버시아드, 그리고 작년에는 세계 수영선수권 대회, 그리고 2018 년에는 러시아 월드컵까지.
지금의 카잔은 2013 유니버시아드 이후로 상당히 많이 발전된 거라고 얘기를 들었다. 카잔대학교의 기숙사 건물 역시 유니버스아때 쓰던 선수들의 기숙사였고, 축구장인 카잔 아레나 역시 2018 년의 월드컵을 위해서 새롭게 만든 건물이다. 자신들만의 뚜렷한 길을 갖고 발전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항상 기특하다.
물론 이번 탐사일정에서 카잔에 할당됬던 일수가 너무 짧았기에, 그리고 당일날의 날씨 또한 너무 안 좋아서 예정보다 많은 일정을 취소해야 했다. 때문에 나의 유학시절과 함께 결부하여 조금 내용을 보태려고 한다.
우리 로컬리티 탐사단 ‘엑스쿠르시야’ 팀이 처음 카잔에 도착해서 돌아다닐 때 느낀 것은 슬라브계 민족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따따르인이 절반이라고는 했는데, 중심가 부분이라 그런지 금발과 갈색머리의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물론 가끔 보이는 수염이 가득한 남자들과 검은머리와 검은 눈썹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자들은 상당히 러시아인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또한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다니는 할머니들과 국그릇같이 생긴 모자를 쓰고 다니는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카잔의 특징으로 카잔이란 도시는 항상 활기차고, 경쾌하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스스로 따따르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다.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쓰이기는 하지만, 항상 방송이나 가게에는 따따르어가 같이 쓰여져 있다. 마치 구 소련지역에서 벗어난 독립국가연합 중 하나에 온 듯한 기분이다.
또한 1000년의 도시라고는 보기 힘들정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자동차와 버스, 트람과 트롤레이부스가 다니는 도로는 항상 바빠보였다. 그렇지만 차들은 신호준수도 잘 해줬고, 사람이 있으면 먼저 지나가게 해주는 등 그래도 차보다는 사람이 먼저였다.
그리고 과거부터 러시아 이슬람의 중심지라고 해서인지, 보통의 러시아 정교회 건물보다도 이슬람 사원이나 미나렛이라고 하는 사원의 탑들을 교회의 십자가보다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가장 유명한 크렘린에 있는 꿀 샤리프 사원도 건설 당시 주변 이슬람국가에 지원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자연사 박물관에도 가보았는데, 러시아 박물관들은 어찌나 다 시설이 좋은지, 설명해주시는 어머님들도 친절하고 해서 같이 사진도 찍을 정도였다. 설명도 상세하고 다양한 장치들은 직접 우리가 눌러보고 움직이면서 배울 수 있게 해놓았다. 그 후 들어간 꿀 샤리프 사원은 생각보다도 규모가 훨씬 컸다. 안에는 상점도 있고, 전자책처럼 해놓은 코란, 그리고 기도하는 곳이 있었다. 기도하는 곳은 보통사람들은 못 들어가고 실제 신자들만이 드나드는 곳이었는데, 보통의 이슬람 사원처럼 우상숭배가 금지되기 때문에 신이나 성자들, 동물들의 모습조차 없었다. 다만 10개의 글씨가 써져있고, 뜻하는 게 알라와 무하메드, 그리고 각 4명의 왕과 성인을 뜻한다고 한다.
그 후에 찾아간 수태고지 교회에서는 또 정교회만의 경건함을 잔뜩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곳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서로에 대한 악의나 무시는 전혀 없었다. 카잔의 지하철, 여기 또한 따따르의 문화를 잔뜩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나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뚜까야 광장역과 크렘린역은 이슬람스러운 분위기의 타일 모자이크가 잔뜩 되어있어서 상당히 멋졌다. 다른 여러 명소들도 밤에 아름다움을 뽐냈고, 기념품 상점에서도 카잔만의 특징이 담긴 마뜨료쉬카를 팔기도 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본 카잔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문화와 인종, 종교들이 서로 반목하지 않고 다채롭게 공존한다는 점이다.
러시아인과 타타르인의 전쟁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전승기념으로 테트리스 궁전으로 유명한 성 바실리 성당을 짓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슬람 사원의 이름인 꿀 샤리프는 이반4세의 카잔정복 전쟁 당시 죽은 이맘(이슬람교의 성직자)의 이름이다. 이곳 주민들의 종교는 서로 다르다. 타타르인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고, 러시아인들은 정교회를 믿는다. 헌데도 카잔에서는 민족분쟁이나, 종교와 관련된 내분이 없다. 이는 카잔 지어진 만교 사원의 뜻에 충실하다. 러시아의 예술가로 유명한 ‘일다르 칸오브’는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뜻으로 한 지붕 아래 모든 종교가 함께하기를 희망하는 뜻으로 이런 사원을 설계했다. 요번 탐사로 가지는 못했지만, 일다르 칸오브는 카잔에서 자란 예술가로 이 같은 분위기를 몸소 느끼고서는 만교사원을 설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주민들은 따따르인과 러시아인 이렇게 둘로 나뉘어 있다. 과거에는 사는 곳이 구분이 되어있었고, 잘 사는 곳에는 러시아인들이 살면서 구역을 넘어오는 따따르인을 처형시키기도 했다는 소리를 선생님한테 듣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상관없이 살고 있다. 카잔이 교육을 중점적으로 투자한 도시가 되면서 외국인들의 유입도 상당해졌지만, 난 10개월을 살면서 카잔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느낀 경험이 없다.
따따르스탄은 스스로의 힘으로 많은 것들을 이룩했다. 자국 내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위치로 봐도 우리나라에만 안 유명할 뿐이지 상당한 높이에 위치해 있다. 따따르스탄의 대통령인 민티메르 샤예이미예프는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바꿔나가야 한다. 그리고 나라와 우리 공화국은 우리와 함께 바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뱉은 말들을 실천하면서 스스로를 바꿔나가고 있다.
사실 최근 한국에도 다양한 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많은 새로운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다양한 국적의 부모를 가진 다문화 가정이나 조선족의 범죄로 인한 불안함과 IS의 무차별한 테러로 인한 이슬람교에 대한 반발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이런 때에 평화롭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카잔의 모습은 우리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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