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1기] [유라시아] - 꽃보다 유라시아 팀 | ||||
---|---|---|---|---|---|
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6-03-25 13:05 | Read | 3,457 |
본문
탐사테마
1. 선정 배경
역사 속에서 종교는 각 국가는 물론이고, 각 지역별로 공통된 특성을 형성하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왕권시대에서 종교가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 뜻을 하나로 모이게 하는 대표적인 통치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나아가 종교는 국가의 존망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역시 현재까지 정착되어 있는 종교가 존재하며 역사적인 이유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대공이 러시아민족의 정신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동방정교회에 주목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져 러시아정교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역시 이란-페르시아 쪽에서 올라온 민족들의 강인함을 얻고자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양국의 국가 운영과 생활 모습 속에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또 현재까지 이어지는 종교 영향력의 근원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관찰이 용이하다고 판단되는 종교 건축물과 국민들의 신앙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탐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현대와 과거를 불문하고 종교 건축물들은 시대적 배경과 그 당시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종교적 교의 및 신앙생활의 관찰을 통해 탐방의 내용을 더해간다면 단순한 ‘종교’를 넘어 해당 국가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나라가 필요에 의해서 갖게 된 두 종교가 필연적으로 낳게 된 종교건축물을 이곳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지역은 가장 발전해오던 시기에 같은 국가로서 존재하였기에 서로의 종교가 남아있습니다. 서로 배타적인 두 종교의 공존을 탐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러시아정교회 틀에서 이슬람의 모습과 이슬람 틀에서 정교회의 모습을 확인하며 또한 오랜 세원 동방정교회가 아닌 러시아 정교회로서의 모습으로 종교를 발전시킨 러시아와 이슬람을 하나의 종교적 특색이 아닌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자연스러운 생활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인 우즈베키스탄의 모습을 비교하고자 하여 위 테마를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2. 테마소개
테마는 세 가지 주안점을 두어 선정하였습니다. 각 관점을 구분하여 관찰하고, 후에 종합하여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의 종교문화를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첫째, 러시아정교의 영향력을 관찰합니다.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에 존재하는 정교회 사원을 방문하여 의식, 건축, 문화 속에 반영된 종교적 특색을 찾아냅니다. 정교의 모습이 두 나라에서 어떻게 비쳐지는지 확인하고 국가 간 공통점 및 차이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는 러시아로부터 우즈베키스탄에 유입된 정교의 모습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파악하는 것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둘째,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교 문화를 관찰함으로써 우즈베키스탄만의 고유한 종교적 특징을 찾아냅니다. 러시아정교와 구분되는 이슬람교의 영향력을 파악하여 우즈베키스탄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셋째, 우즈베키스탄이 종교적인 러시아화를 겪었음을 확인합니다. 우즈베키스탄에 러시아정교의 영향력이 잔재한다는 가정 하에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관찰합니다.
탐방을 통해 종교문화의 공존은 현재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 모습이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파악할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현지인의 신앙생활 및 관습 등을 관찰함으로써 외적, 내적인 종교의 영향력을 파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탐사목표
러시아정교 유입의 잔재 관찰 및 이슬람 문화와의 상관관계 파악
우리 팀의 탐사목표는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의 종교 특징과 건축 등을 비교하고 공부하여, 각 국가의 민족 특성과 문화 더 잘 이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특히 과거 소련의 지배가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사원의 건축 양식과 문화 등은 어떤 방식으로 남아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조사하려합니다.
러시아에서의 탐사 목표는, 러시아 정교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인의 약 80%가 정교를 믿고, 국가 원수가 정교회 축일을 기리는 등 정교회는 대다수 러시아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주어왔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러시아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러시아 정교회 사원들을 탐방하고, 정교의 특징과 건축을 관찰하며 공부하려합니다. 이를 위해 예카테린부르크의 피의사원, 블라디보스토크의 대정교회 사원을 상세히 둘러볼 계획입니다. 또 이 장소들은 종교적 가치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인들에게 중요한 곳이기에, 러시아 역사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과거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문화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한 ‘고스피탈라냐 체르코프’라는 러시아정교회 사원을 방문하여, 우즈베키스탄에서의 러시아정교의 특징과 입지 그리고 앞서 탐방했던 러시아의 정교회 사원과 건축양식, 문화 등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알아볼 계획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은 과거에 페르시아 민족과의 교류가 잦았고, 이로 인해 이슬람 종교가 유입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팀은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문화가 국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역사적으로, 과거 소련의 지배 때 이슬람종교 문화를 어떻게 지켜나갔는지 등에 대해서도 조사하려합니다. 이를 위해,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역사적 유적지이자, 종교 건축물인 타슈켄트의 하스티 이몸, 사마르칸트의 구르에미르 등을 탐방할 계획입니다.
탐사내용
※ 동해~블라디보스토크
8월 8일. 동해로 가는 버스 안, 우리는 모두 들떠있었다. 반년 넘게 계획하고 생각해온 챌린지를 떠난다는 사실에, 우리 5명은 저마다의 흥분으로 몸이 떨렸다. 이윽고 버스는 동해터미널에 내렸고, 하늘은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비를 쏟아 부었다. 참 아이러니하게 2주가 넘는 일정 속에서 우리 중 그 누구도 우산을 챙겨오지는 않았다. 숙소에 도착 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는 새벽이 넘어서까지도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다음 날, 8월 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크루저에 승선했다. 날씨는 다행히 화창하게 개어있었고 팀원 모두 컨디션은 이루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배에서 바라본 동해항과 바다, 그리고 구름이 낀 하늘의 조화는 보지 않는 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크루저다보니 관광객이 거의 대다수였다. 우리처럼 소수를 이루어서 가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러시아인들도 대략 40명 정도 있었다. 내심 러시아인들과 말을 섞을 기회가 오길 바랐지만 오지는 않았다. 우리가 좀 더 용기를 내서 먼저 말을 걸어야했나 싶은 후회가 든다.
크루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지만 그 내부는 생각보다 단출했다. 가장 인상깊이 남았던 점이라면 크루저 안에 사우나가 있는데 사우나 안에서 드넓은 바다가 보인다는 점이다. 그 점이 매력이었을까? 우리 모두는 2번이나 사우나를 했다.
밤에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끝을 알 수가 없어, 약간의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다 한 가운데,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서 오직 우리가 탄 배만이 무인도처럼 바다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배가 지나간 자리 뒤로 배는 자취를 남기고 하얀 거품이 일었다. 그리고 해가 지면 그 광경은 놀답도록 달라진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까만 바다에 무척이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저 검은 바다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가지게 된다.
1박2일을 크루저에서 보낸 후 우리는 드디어 러시아에 도착했다. 내심 긴장되는 마음을 억누르고 우리는 입국절차를 받았다. 러시아는 우리나라에서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다지 심하지 않은(뒤에 나오는 우즈베키스탄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한 수준의) 입국절차를 거쳤다. 팀원 5명 중 4명한테는 첫 러시아 땅이었다. 처음 느껴지는 이미지는 한국의 그것과 그다지 다른 점이 없었다. 그냥 ‘아, 여기가 외국이라서 외국인이 많구나!’ 정도의 극히 짧은 감탄사뿐이었다. 밖으로 나오고 우리는 항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여행에서 항상 항구나 공항 같은 크나 큰 이동수단을 거칠 때는 그것을 배경으로 하고 사진을 찍는 우리만의 습관 같은 것도 생겼다.
항구 밖으로 나오기 전에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지도를 샀다. 항구 안에 키오스크(러시아식 노점)에서 러시아어로 러시아 지도를 주문하고 계산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회화이지만 난생 처음 외국에서(그것도 전공언어를 쓰는 러시아에서) 물건을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커다란 이슈였다. 또 처음으로 러시아 택시를 탔다. 아직 루블(러시아 화폐단위)로 환전하지 않은 상태라 우리 수중에는 달러밖에 있지 않았다. 크루저의 1박2일 동안 우리는 이런저런 생활 러시아어를 단기속성으로 외웠다. 물론 택시기사가 친절히 영어로 답해주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원래 알기론 러시아 사람들은 영어를 거의 모른다고 배웠는데, 블라디보스토크가 관광도시이다 보니 만나는 사람 대다수가 영어를 조금 쓸 줄 알았다. 역시 교과서로 배우는 공부에는 한계가 있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다. 모름지기 배움은 필드(field)로 나가서 배워야 한다는 의견이 우리의 머릿속에 인식이 되었다. 10달러의 택시비를 요구했을 때, ‘이 정도면 싼 편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후에 알게 된 사실은 우리는 바가지를 당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와서 한 가지 놀란 사실은 러시아는 교통비가 무척이나 싸다. 차로 20분 정도 되는 거리를 우리나라 택시였으면 넉넉히 만 원 정도가 든다하면 여기 러시아는 300루블, 한화로 약 6천 원 정도가 들었다. 근데 바가지 택시기사는 10달러를 요구하다니. 역시 한번 겪어봐야 하는 것이다.
택시로 숙소까지 이동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내를 봐라봤다. 높은 건물, 넓은 도로, 일방적인 일방통행, 친절한지 불친절한지 헷갈리게 만드는 운전자와 보행자를 바라보자니 이 곳 러시아가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또한 이동하면서 우리의 일정에 있는 파크롭스키 공원의 정교회 사원도 봤다. 비록 택시 안에서 보았지만, 찰나의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색다른 웅장함은 모두가 느꼈다고 본다.
숙소의 도착 후 방에 들어섰을 때 조금 당황했던 것은, 러시아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신발을 그대로 신고 들어가는 점이였다. 그 점에 익숙하지 않은 남자 3명은 결국 신발을 벗고 숙소에서 생활했다. 프런트에 있던 직원은 조금 불친절했지만 방은 나름 괜찮았다. 무엇보다 와이파이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안심했다. 다들 가족과 지인들에게 밀린 연락을 취하고 센터에 보고한 후 우리는 모여서 블라디보스토크의 일정을 논하기 시작했다.
도착한 날, 8월 10일의 일정은 간단히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내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우리 테마인 ‘종교’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단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친해져야 하는 시간을 두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도착했을 때 시간이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는 저녁시간이라 탐사를 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시내탐방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있다. 러시아학과 10학번 최재욱 학우이다. 최재욱 학우는 코트라 인턴으로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고 있다. 이 글을 빌어 그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가 있어서 훨씬 수월했던 블라디보스토크 탐방이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은인인 디마(드미트리)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디마는 이번 여름학교 때, 러시아에서 온 크세니아의 같은 과 친구로서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한다. 디마는 우리가 정교회 사원 탐사를 원활하게 할 수 있게 교통편과 한국어로써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두 명에게 정말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러시아의 첫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내를 표현하자면 이태원과 홍대를 섞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관광도시이다 보니 도시 전체에 젊음이 가득했고, 여름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옷차림은 시원시원했다. 또한 거리 어디에서나 자유로이 맥주를 마시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담배를 피워댔다. 문화충격인 점은 어린 아이가 옆에 뻔히 있는데도 아이 엄마가 태연히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었다. 러시아는 애주가의 나라뿐만 아니라 애연가의 나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가 교외지역에 있어서 동양인이 거의 안 보였는데, 시내 중심가로 오니 동양인이 꽤 보였다. 특히 중국인이 참 많이 보였다. 중국인은 세계 어디에 가도 많은 듯하다. 중심가는 우리나라의 로데오 거리처럼 일직선으로 바다까지 이어졌다. 거리 양 옆으로는 각종 음식점과 쇼핑몰, 그리고 한국 화장품 가게와 한식당도 간간히 보였다. 그 로데오거리는 아르바트 거리라 불리며 우리는 그 길을 걸었다. 이윽고 블라디보스토크 바다가 나왔다. 그 곳 날씨는 비가 오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우산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런 광경은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이 끝날 때 까지도 계속되었다. 아마 러시아 사람들은 비 맞는걸 좋아하나 싶다.
바다에 도착하니 양 옆으로 해양공원이 조성이 되어있고 놀이동산과 음식점들이 있었다. 마치 광안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해양공원을 거닐며 우리는 전망이 좋은 음식점(음식점이라고 하기 보다는 포장마차 느낌의)에 앉아서 샤슬릭(양꼬치 구이)과 맥주를 마시며 각자 느낀 점을 얘기했다. 맥주는 말도 안 되게 쌌다.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항구에서 샀던 지도를 펼치고 내일 갈 목적지를 체크했다. 아쉬웠던 점은 지도가 최신판이 아닌지 그다지 정확하지 않았다. 외국에서 외국음식과 외국맥주를 마시며 외국바다를 바라보자니 우리 모두는 외국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어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실감했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이 아닌 이국의 나라, 러시아에 있다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다행히 바가지를 당하지 않은 채 돌아갈 수 있었다. 커다란 땅 러시아의 일반통행 도로는 4차선이 넘는다. 가로등 불빛만이 비추는 거리를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 라디오 속 노래와 함께 우리는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다들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내 곯아 떨어졌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이 된다. 설렌다. 한편으로는 두렵다. 뭐든지 처음이 중요한 거겠지? 애써 자기위로를 하며 잠이 든다.
8월 11일. 해외에서의 첫 잠을 잤고 첫 기상을 했다. 부스스한 정신으로 아침을 먹었고 바로 실망했다. 아무래도 우리네 입맛에 이 곳 음식은 그다지 잘 맞지 않는 듯하다. 쓴 커피와 차, 발 냄새나는 치즈, 달달한 죽, 느끼한 계란말이까지. 안 먹어 본 사람은 못 느낄 느런 맛이었다. 여튼 우리는 부지런히 아침을 먹고 탐사 준비를 마쳤다.
처음으로 간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일 큰 정교회 사원이 있다는 파크로브스키 공원으로 갔다. 그곳 정교회 사원은 극동대학교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곳까지 우리는 러시아 버스를 타고 갔다. 다행히 디마와 함께 가서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디에서 내려야 하는지 편히 알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신기한 점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러시아에서 버스를 타면 안내방송이 안 들리고, 승차버튼도 역시 없다는 점이다. 전에 여름학교 때 크세니아가 러시아에서는 버스를 타면 아무도 안 잔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러시아에 와보니 이해가 된다. 만에 하나 잠에 빠지면 안내방송도 없는 버스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종착역으로 갈 것이 안 봐도 비디오이다. 특히 우리는 말이다.
버스에서 내리고 우리는 파크로브스키 공원의 정교회 사원으로 갔다. 어제 숙소로 가는 택시 안에서 보았던 찰나의 웅장함은 그 효과가 극적으로 비대해져 우리에게 다가왔다. 도대체 저런 건축양식과 색감, 이곳의 사람들이 내뿜는 조화는 낯선 동양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또 신기한 점은 우리가 갔던 날이 일요일이 아닌 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정교회로 들어가서 예배를 하려고 정교회를 방문하고 있단 점이다. 사전조사로는 일요일 오전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우리 눈앞에 정교회 사원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 우리는 간단히 정교회 사진을 찍고 안으로 입장했다. 입장함에 있어서 정교회 정문에 있던 사람이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정교회 안에서는 사진촬영은 금지라고. 우리는 알았다고 답한 뒤, 입장했다.
처음 느낀 그 곳의 느낌은 한국의 교회나 절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던 색다른 웅장함이었다. 이곳은 마치, 뭐라고 해야 할까? 신성함이 묻어나는 사원이랄까? 천장은 높게 올라가져 있고 정사각형 건물 속 우리는 그 가운데 멀뚱히 그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움직여 각 벽에 달린 그림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고대 끼릴 문자로 적혀진 그림을 보았다. 무슨 뜻인지 디마한테 물어봤지만 디마 역시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예배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 다 경건했고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었다. 감히 이 곳에서 그 어떤 소음조차 허용이 되지 않는 듯, 모두는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일정한 의식을 가졌다. 가만 보고 있자니 우리도 마치 해야 할 듯 한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디마는 정교회를 믿었고 그도 역시 같은 의식을 가졌다. 우리는 그저 멀뚱멀뚱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만 보았다. 그리고 나선 디마는 요즘 정교회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주로 믿고 젊은이들은 그다지 믿지 않는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젊은이들은 정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았다.
파크로브스키 공원 안 정교회에서 나온 후, 우리는 어제 갔던 아르바트 거리에서 간단하게 러시아식(?) 점심식사를 가졌다. 다행히 이 음식점은 그나마 우리 입맛에 맞았고 우리는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디마와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이 곳 블라디보스토크 얘기를 했고, 러시아 젊은이들의 얘기를 했으며, 우리는 한국을 얘기했다. 각자의 나라 얘기를 했으며, 각자가 배우는 언어로 얘기했다. 우리가 러시아어로 질문하면 디마는 한국어로 답했다. 어쩌면 의사전달의 효용이 제일 낮은 방법이지만 우리는 그 방법을 고수했다. 마치 그래야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듯이 말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다음으로 간 곳은 잠수함박물관이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도시자체가 굉장히 작은 도시이기에 일단 중심지로 들어서면 웬만한 거리는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이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대략 20분 정도 걸으면 잠수함박물관이 나왔다. 잠수함박물관은 2차 세계대전 때 쓰였던 실제 잠수함을 개조해서 만든 박물관이다. 소정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잠수함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난생 처음 잠수함 안으로 들어가니 신기했다. 우리는 그 안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해군이 된 것 마냥 신기하게 관람했다.
박물관을 나와서 박물관 바로 뒤에 있는 무명용사의 조각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지만 현재 수리 중인지 칸막이 쳐져 있어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전쟁 당시 전사했던 군인들을 추모하는 조각인 것 같다. 조각을 끼고 앞으로 좀 더 오면 ‘꺼지지 않는 불꽃(Eternal flame)’을 볼 수 있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각지에 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은 정말 글자그대로 꺼지지 않고 계속 불타올랐다. 당시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박물관 바로 옆에는 작은 정교회 사원이 위치하고 있었다. 앞서 본 것과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앞에 표지판에는 ‘내부사진 촬영금지’라고 쓰여 있었다. 참 신기한 점은 러시아 정교회 사원 건축양식인데, 어떤 면이 신기하냐면, 동서남북 어디에서 보아도 똑같은 모양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오른편에서 사원을 보든, 왼편에서 사원을 보든, 그 모양은 똑같다는 말이다. 또한 십자가의 모양도 특이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회의 십자가와는 다른 모양을 띈다.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 아래 작은 나선의 가로선이 하나 더 붙여져 있다. 이를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 십자가(Russian Cross)’ 또는 ‘슬라브 십자가’라 하여 가로 3줄, 세로 1줄로 이뤄진 모양의 특별한 십자가를 사용한다. 그 의미는, 맨 위의 가로막대는 예수님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천사들의 모습이 그려지거나, 죽음을 무찌르고 죽음을 승리로 승화한 예수 그리스도란 의미의 글을 새겨 넣고, 중간의 긴 막대에는 못 박힌 그리스도의 양팔이 놓이고, 맨 아래 기울어진 가로 막대에는 그리스도의 발이 놓이는 곳이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까 첫 번째 정교회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몇몇 사람들은 예배를 하고 있었다. 또한 이름 모를 성인들의 숭배한 그림들도 걸려 있었다. 문득 종교라는 것이 인간생활에 이처럼 많이 관여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가졌다. 비단 종교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한 번 되돌아보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정교회 사원을 나오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는 간단히 근처에서 식사를 했다. 쁠린이라는 러시아식 빈대떡을 먹었다. 영어로는 Russian pancake라고 한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숙소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것도 역시 버스를 타고 갔는데 우리 중 몇몇이 조는 바람에 내릴 때 조금 위험했다. 숙소로 돌아와 각자 개인정비를 취한 후 다시금 모여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뭔가 다들 상기된 표정으로 각자의 생각과 느낌을 쉴 틈 없이 쏟아냈다. 몇 시간 얘기를 마친 후 잘 시간이 되었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취침을 취했다. 창문 밖으로 러시아 아이들의 뜻 모를 함성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우린 지금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8월 12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마지막 일정 날이다. 오늘 가볼 곳은 중앙광장, 독수리전망대, 정교회 사원들이다. 먼저 숙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후 밖으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비가 오고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우산 따위는 쓰고 다니지 않았다. 대단한 사람들. 우리는 택시를 불러 첫 번째 장소로 이동했다. 중앙광장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각종 행사가 주로 열리는 장소이며 금요일과 토요일에 이 곳에서 재래시장을 연다. 아쉽게 우리가 간 날은 수요일이라 재래시장은 볼 수가 없었다. 중앙광장에 도착하고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은 징그러운 비둘기 떼였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커다란 조각상이 있었는데 알아보니 러시아 조국전쟁 당시 공을 세운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어제 오늘 느낀 점은 러시아에서는 전장에서 공을 세운 무공들을 위한 기념비가 많다는 점이다. 중앙광장이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과 항구, 시가지 사이에 위치해서 그런지 유동인구가 많은 편이였다. 가만히 앉아서 사람구경만 해도 꽤 재미가 쏠쏠했다.
잠깐의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걸어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시가지를 통해 걸었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진면모를 볼 수 있었다. 과히 관광도시인 만큼 건물마다 있는 쇼핑센터와 은행들, 그리고 중국인들이 있었다. 우리는 지나만 가기 그래서 쇼핑센터 한 곳을 들어가서 구경을 했다. 우리 딴에는 루블화의 가치가 떨어졌으니 상품가격도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백화점에 와보니 또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조금 아쉬웠다. 대충 백화점 구경을 마치고 다시 부지런히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다음 장소는 독수리전망대로써 거기에 올라가면 블라디보스토크 시내가 다 보인다. 그 곳에서 가려는 이유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는 점도 있지만 꼭대기에 그 곳에 있는 키릴로스와 메소디오스 형제상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에서 사용하고 있는 키릴문자는 글라골 문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인데, 글라골 문자를 고안해낸 사람이 동방 정교회의 선교사였던 성 키릴로스와 그의 형 성 메소디오스라고 한다. 특이하게 십자가를 들고 있는데 이유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두 군데서 모두 성인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 곳에 가려 한다. 정교회의 뿌리 같은 역할을 한 사람들을 보기 위함이랄까.
사전조사에서 분명 꼭대기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했는데 막상 가보니 케이블카가 수리 중이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결국 우리는 두 다리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 높지는 않은 전망대였지만 올라가는 길이 고단했다. 힘겹게 올라가니 올라간 보람은 있었다. 시원한 바람과 훤히 내려다보이는 시내, 그리고 형제상까지. 어려움을 참고 올라온 보람이 느껴졌다. 저 멀리 루스끼 섬이 보였고 항구도 보였다. 또한 어제 갔었던 정교회 사원도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형제상이 있었다. 밑에 조그맣게 뭐라고 쓰여 있었지만 정확한 해석은 하지 못했다. 아마 이 두 형제를 기리는, 뭐 그런 내용이겠거니 싶었다. 우리는 한 동안 그 곳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힘들어서 내려오지 못한 것도 있지만 왠지 높은 곳에 올라오니 다시금 내려가기 싫은 마음이 들어서 일까. 아무런 말도 없이 저 먼 도심의 빌딩숲만 바라보았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상점에서 물을 사마셨다. 러시아에서는 탄산수를 많이 마시는데 처음에 뭣도 모르고 그냥 물을 달라 해서 마셨더니 탄산수로 혼났다. 그 다음부턴 항상 탄산이 없는 물을 주문했다. 시간여유가 조금 생겨 우리는 해변공원에 다시 들리기로 했다. 조금 걷다보니 첫 날에 봤던 해변공원이 나왔다. 다시 봐도 정말 아름다웠다. 날이 조금 개였는지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고 아이들은 바다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간단히 점심식사 겸 간식을 챙겨 먹은 후에 보트를 탔다. 생각보다 무서웠다. 농담으로 이거타고 다시 동해로 가자라는 말이 나왔다. 말이 안 되는 농담이다.
옆에 놀이동산이 있어서 러시아 놀이동산은 어쩐지 보러 한 번 들어갔다. 조금 특이한 결제방식을 통해 몇몇 놀이기구를 탈 수 있었다. 바이킹 비슷한 놀이기구를 탔는데 다 타고 나니 우리 중 몇몇은 속이 굉장히 안 좋았다. 아무래도 러시아 놀이기구는 우리 체질에 안 맞는 듯하다.
재미나게 놀이기구를 탄 후 우리는 잠시 공원을 걷기로 했다. 날씨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빗속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걸으면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각자가 느낀 러시아 얘기, 이 곳 날씨 얘기, 훗날 유학을 온다면 어느 도시를 가는지, 우즈베키스탄은 어떤 나라일지, 한국은 지금 어떨지 등 많은 얘기를 두서없이 나누었다. 어떻게 보면 꽤 뜻 깊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전과 그 후에도 무수히 많은 얘기들이 오갔지만 그렇게 서로 얘기했던 적은 아마 그 곳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지나가다가 정교회 사원이 보여 우린 보러갔다. 러시아에는 도시 곳곳마다 정교회 사원이 있는 듯 했다. 이번 정교회 사원은 중간 크기의 사원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노파가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왔다. 우린 한국에서 왔다하였고, 노파는 남한이냐 북한이냐고 되물었다. 우리는 남한에서 왔다 했다. 노파는 알았다, 라고 답 한 뒤, 여자는 머리에 두건을 써야함과 사진 촬영은 금지라는 말을 남기고 물러섰다. 여자들은 처음으로 머리에 두건을 썼다. 제법 잘 어울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여느 정교회 사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풍경이 나왔다. 간단하게 내부를 살핀 후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나오는 길에 노파에서 간단히 인사를 한 후 우리는 서둘러 빠져나왔다.
다시 길을 걸었고 슬슬 저녁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푸쉬킨’이라는 러시아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그 곳 종업원은 이전의 우리가 겪었던 종업원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친절했다. 가격은 조금 나갔지만 종업원의 친절 때문에 마음이 가벼웠다. 주문해서 나온 음식은 예상대로 우리 입맛에 조금 안 맞았으며 느끼했다. 그래도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돌아오는 길 이제 내일이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생각을 하니, 택시 밖으로 보이는 이 풍경이 조금은 그리워지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일 예카테린부르크에 가면 이 기분 또한 바뀌겠지? 숙소로 돌아오는 길, 마트에 들려 맥주 몇 캔과 안주거리를 사들고 왔다. 간단히 세면세족을 하고 한 방에 모여 소소하게 블라디보스토크 쫑파티를 했다. 다들 힘든 일정에 피곤할 법도 하지만 힘든 내색 없이 따라와 줘서 무척이나 고마웠다. 간단히 마신 후 내일 새벽 비행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여. 재밌고 즐거웠다. 우리에게 좋은 기억만 남기게 해준 이 도시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 예카테린부르크
블라디보스톡에서 비행기를 타고 13일 오후 8시 경에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예카테린부르크의 전경은 푸르고 여유로우며 고요했다. 같은 러시아지만 땅덩어리가 넓어서 그런 걸까? 시끌벅적하며 빠르게 돌아가는 블라디보스톡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넓다란 길에 사람이 많지 않았고, 마치 시간이 느리게 가는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제일 컸던 차이는 그 많던 동양인을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공업도시로 알려져 있는 예카테린부르크가 과연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을까 하는 걱정과 기대를 동시에 안았다. 저녁에 도착한 관계로 호텔 체크인을 한 뒤 다들 쉬었고, 14일 아침 11시부터 탐사를 시작했다. 누구든 마찬가지겠지만, 낯선 곳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길을 찾는 것은 상당한 지리적 감각이 필요하다. 참고로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교통이 굉장히 편리했다. 이러한 이점을 고려해서 호텔을 예약하긴 했지만,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 기차역, 지하철역이 도보 3분 내로 다 있었다. 이 중에 가장 만만했던 것은 지하철이었다. 한국처럼 여러 개의 노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3개의 노선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복잡하지도 않았고, 하차역의 수도 많지 않아서 노선을 딱 한 번 보고 바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지하철 요금은 1인당 23루블. 한화로 대략 460원정도이다. 루블 값의 폭락이 한 몫 했지만, 한국의 대중교통 비용보다 훨씬 싸다. 여담으로 지하철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하자면 다른 도시도 똑같은지 모르겠으나, 이곳은 지하철이 상당히 빠르다. 우리는 속도에 굉장히 놀랐다. 무서울 정도로 혹은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게끔 빨랐다. 에스컬레이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면 느린 속도 때문에 일부러 계단처럼 걸어가는데 여기는 그럴 필요가 없다.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우리의 테마는 ‘종교’이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사원을 보아야했다. 그 중에 제일 유명한 사원은 바로 ‘피의 사원’. 러시아에는 피의 사원이 딱 두 도시에 있다. 한 곳은 누구나 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또 하나는 바로 이 곳 예카테린부르크이다. 차이점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피의 사원은 알렉산드르2세가 죽은 곳에 지어졌고, 예카테린부르크는 마지막황제 니콜라이2세가 죽은 곳에 지어진 사원이다. 피의 사원이 위치한 곳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중심부인 1905년 광장에서 멀지 않다. 사실 1905년 광장에서 이세티강을 따라 걸어 다니다보면 대부분 명소들을 볼 수가 있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매일 1905년 광장에서 내렸다. 그 곳이 우리의 탐사 시작점이었다. 이세티강 강변에 산책로가 있는데, 그 곳에 서면 저 멀리 건너편 피의 사원이 보인다.
한번쯤 이 도시의 여행을 계획해 본 사람이라면 예카테린부르크에 있는 사원들의 정보가 인터넷에 많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무조건 빠른 발을 이용해서 구석구석 최대한 다 찾아내겠다는 것이 우리들의 포부였다. 지도나 어플의 도움 없이 발이 닿는 대로 움직였다. 그게 바로 탐사의 묘미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의도치 않게 우리 팀은 이번 탐사에서 대단한 체력을 보였다. 강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바로 첫 번째 사원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나오는 모든 사원들이 그렇지만, 굉장히 웅장하고 아름답다. 사진으로는 차마 담아지지도 않는다. 처음 보는 실물에 5명은 모두 입을 떡 벌리고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사원의 명칭은 ‘Большой Златоуст(발쇼이 즐라또우스뜨)’ 1876년에 지어져 1930년에 무너진 후, 2006년부터 2013년까지 재건한 교회이다. 그러니까 개방한지 겨우 2년째인 셈이다. 러시아 사원들의 외관을 보면 위쪽에 둥그렇고 위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모양으로 꼭대기를 십자가로 마무리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사원은 타원형이 살짝 각이 져있다. 색감은 흰색과 금색의 조화로 이루어져있어 깔끔했다. 처음으로 내부를 들어가는 순간,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되는지부터 시작해서 혹시 정교회인이 들어가는 것은 금지인 것인지, 어떤 준비를 하고 들어가야 하는지 등 머릿속이 복잡했으나 일단 들어갔다. 사전조사로 여자들은 긴치마와 머리에 두건을 써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들어 가보니 입구에 공용으로 입고 쓸 수 있도록 구비가 되어있었다. 모든 사원에 구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를 마친 후 들어가야 한다. 그냥 들어가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러시아에 왔으니 러시아를 따라야 하지 않는가. 또한 이것이 예의이다. 내부에는 평소 강의시간에 PPT로 보았던 이콘들이 가득했다. 이콘이란, 성상화를 뜻한다. 가장 대표적인 이콘의 형태는 어머니와 아들 상이다. 강의 때 배웠듯이 항상 어머니가 더 크게, 눈에 띄게 그려져 있다. 사람들은 이콘 앞에 가서 한국의 성당에서 기도 하듯이 기도를 한 후, 이콘에 이마를 맞대거나 혹은 입술을 붙였다 뗀다. 그리고 초를 하나 켜두고 그 다음 이콘으로 가서 또 기도를 한다. 그래서 이콘마다 초의 개수가 다르다. 차갑게 보이는 러시아 사람들이 이 안에서는 다들 따뜻하게 보였다. 아직 어려 정교회가 무엇인지 잘 모를 것 같은 꼬마도,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할 것 같은 건장한 청년들도, 길을 가다가 눈도 못 마주칠 것 같이 도도하게 생긴 예쁜 여자들도 이 안에서는 다 똑같았다. 우리는 조용하며 신성한 분위기에 모두 압도당한 듯 했다. 사원을 나와서 모두 숨이 막혔었다는 듯이 후 하고 숨을 뱉었다.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이게 바로 러시아 정교구나 라는 것을 모두가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다시 강을 따라 걸어 지하로 내려가니 빅토르 최의 벽화가 지하도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빅토르 최는 한국계 러시아인으로 러시아에서는 전설적인 가수이다. 윤도현밴드는 그의 노래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우리의 탐사테마와는 거리가 멀지만 러시아 문화를 공부하면서 수 없이 들었던 인물이기에 벽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마구 셔터를 눌러대니 지나가는 러시아인들이 우릴 보며 웃는 것을 느꼈다. 글에는 다 담지 못했지만 이때까지 우리는 대략 6시간을 걸은 상태였다. 다들 허기에 지쳐 식당을 찾다가, 러시아 전통 음식점이 있어 바로 들어갔다. 러시아의 평범한 식당의 시스템은 다 같나보다. 블라디보스톡에서도 그랬지만 음식들이 쭉 나열이 되어있고, 우리가 지목하는 음식들을 뷔페식처럼 직원이 그릇에 담아준다. 대략 3~4개 정도를 담고 마지막에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는 형태. 그래서 양 조절을 잘해야 한다. 괜히 욕심 부려서 담았다가는 반도 못 먹는다. 메뉴를 보면 다들 고기와 스프는 꼭 고른다. 스프는 보르쉬와 쌀룐까 두 가지를 먹었는데, 빨간 보르쉬에 러시아식 생크림 스메따나를 넣어 저으면 분홍색의 국이 된다. 외관상 썩 맛이 좋을 것 같은 비주얼은 아니다. 그러나 맛은 기가 막히다. 우리 모두 연신 맛있다며 스프를 먹었다. 보르쉬는 한국의 소고기무국 맛, 쌀룐까는 부대찌개 맛이 난다. 그 뒤로 우리는 식당에 스프가 있으면 무조건 고르고 본다. 배를 든든하게 채운 뒤에 다시 길을 나섰다. 광장 쪽으로 가니 동상이 보인다. ‘Памятник Татищеву и де Геннину(타티쉐프와 게닌 동상)’ 예카테린부르크 건설을 지휘한 분들이다. 이 동상 아래에서는 웨딩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 강가 주변에서 웨딩촬영만 총 5번 보았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정말 예쁜 부부들이 나와서 촬영을 한다.
두 번째 사원이 보인다. ‘Часовня во имя Святой Екатерины(차소브냐 바 이먀 스뱌토이 예카쩨리늬)’. 사원이 아니라 예배당이었다. 설명서를 읽어보니 18세기 예카테린부르크에 처음으로 지어졌던 교회의 자리에 지은 예배당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크기가 다소 작은 모습이었다. 물론 외관의 생김새는 사원과 다를 것 없지만, 마치 축소를 해 둔 느낌이었다. 예배당이라고 해서 사원과 다른 점은 없다. 똑같이 이콘들이 있으며 옷차림새를 갖추고 기도를 한다. 아무래도 면적이 넓다보니 이런 정교회 건물이 기도를 멀리 가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도록 곳곳에 위치해 있다. 어딜 들어가도 항상 사람들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드디어 피의 사원을 마주했다. 그저 압도적이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굉장히 거대한 크기로 시선을 끌고, 번쩍번쩍 빛이 나는 금색의 건축물이 또 한 번 시선을 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수리 중이었다. 워낙 러시아의 사원들이 지어진지 오래되어 보수 및 수리를 하는 일이 적지 않게 행해지고 있다. 사실 니콜라이2세가 죽었던 그 순간은 아름답지 못하다. 그는 유배를 보내져 예카테린부르크에 오게 된 것이었고, 단지 유배 와서 살았던 자리가 여기였던 것 뿐. 볼셰비키 세력들에 의해서 처형당했다. 그리 명예롭지 못했던, 오히려 폭군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니콜라이 2세가 현재는 정교회의 성인으로 여겨진다. 아이러니한 부분이지만, 짜르였던 권위를 이렇게나마 보여주는 것일까. 피의 사원 옆에는 니콜라이2세 식구들이 동상으로 세워져 있으며, 처형된 장소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고, 그 뒤편에는 나무로 지어진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엘리자베타 페오도로브나 예배당. 옐리자베타 페오도로브나는 니콜라이 2세의 삼촌인 세르게이 대공의 부인이자, 황후 알렉산드라의 언니라는 것은 사전 조사 때 알아 갔으나, 자세한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예배당에 들어서자 예배당을 지키고 있던 할머니가 어서 두건을 쓰라며 주시곤, 우리들에게 질문 공세를 하셨다. 당황했지만 열심히 대답을 해드렸고, 이어서 할머니는 예배당과 엘리자베타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하셨다. 할머니는 정말 엘리자베타, 그녀를 사랑하고 독실한 정교회 신자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대단했던 그녀의 용감함과 총명함을 칭찬 하시고 사진을 보여주시면서 굉장히 아름다웠다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또한, 우리의 모든 행복과 사랑은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항상 감사하게 살고, 그것들을 억지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정교회의 이야기도 들었다. 피의 사원 옆에 있기 때문에 대부분 예배당에는 걸음을 주지 않는 듯 했다. 니콜라이2세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공부를 했으며 관심이 많으나 엘리자베타 페오도로브나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예배당 안에 사람이 없었기에 우리는 편하게 설명을 들었고, 긴 설명 끝에 할머니는 남자팀원들한테 ‘엘리자베타같은 똑똑한 여자랑 결혼해라, 남자는 여자 말을 잘 들어야 한다’라는 조언을 하셨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한국을 다녀오셨던 경험도 듣고, 짧게 배우신 마사지도 받고, 우즈베키스탄어를 할 줄 아는 권오섭 팀원이 한국인을 닮은 우즈베키스탄인이 아니냐는 둥 재미있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마지막 포옹을 하고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대화를 나눴고, 많이 웃어서 너무 아쉬웠다. 이 뒤로, 4개의 사원을 더 보았다. 사원마다 건축양식이 저마다 다를 뿐, 내부는 전부 같았다. 물론 이콘은 다르다. 그러나 기도하는 방식과 분위기가 다 같다. 점점 정교회의 분위기에 익숙해져 갔다. 처음에는 숙연한 분위기에 모두 어쩔 줄 몰라 하며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면, 이제는 제법 이콘을 하나하나 따라 다니며, 오래 관찰한다. 참고로 우리는 러리아 정교회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초를 붙이거나, 이콘에 이마를 맞대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피해가 갈까봐 조용히 이곳저곳을 관찰했다. 사원 안에 성수가 있는 곳이 있고, 없는 곳도 있었는데 크게 스테인리스통에 성수라고 적혀있던 것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사원이 클수록, 이콘이 많고 사람도 그만큼 많다. 그러나 한 가지 신경 쓰였던 것이 있다면 사원 앞에 집시들이 많다는 것이다.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외국에서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븨소츠키 타워’의 전망대에 올라가서 예카테린부르크의 전경을 눈에 담고서 탐사를 마무리 했다. 우리가 쭉 걸었던 길들과 관찰했었던 사원들이 한 눈에 다 들어왔다. 멀리서보니 하루 동안 대중교통 없이 걸었던 길들이 꽤나 거리가 멀었던 듯한데, 누구 하나 힘들다고 하지 않은 우리 팀원들은 블라디보스톡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체력이 믿음직스럽다. 탐사가 끝난 후, 호텔에서 카드게임까지 잊지 않았으니 말이다.
8월15일 이 날 한국은 광복 70주년으로 인해 떠들썩했다. 우리 역시 뉴스를 통해 한국을 보았고, 우리끼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곳은 예카테린부르크. 절묘하게도 이 날은 예카테린부르크가 생긴지 292주년이 되던 날이었다. 즉, 예카테린부르크의 생일! 사실 전 날부터 축제준비로 여기저기 분주했고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어 알고 있었다.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예카테린부르크를 왔었는데, 운이 좋게도 이 곳에서 가장 큰 축제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4일에 무리해서 탐사를 했기 때문에, 이 날은 우리도 이들과 함께 즐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앞전에 땅은 넓은데 사람은 적다고 써두었다. 그런데 다들 어디에 숨어있었던 것인지 이 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인구가 몰렸다. 당연히 차도는 모두 통제가 되었고, 무대 설치만 따로 떨어져 총 3개나 되어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자신의 도시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깊을 줄은 몰랐다. ‘예카테린부르크 생일 축하해! 난 예카테린부르크를 사랑해!’ 등의 말을 거리에서 100번은 넘게 들었던 것 같다. 가장 큰 무대를 중심으로 많은 노점들이 즐비해있고, 재미있는 게임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리는 일단 다 같이 페이스페인팅을 하기로 했다. 이 때 아니면 언제 또 얼굴에 색칠을 하겠어? 라는 생각이었다. 권오섭 팀원의 두 눈덩이에 러시아 국기 페이스페인팅으로 인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없었다. 신나게 사람구경, 경치구경을 하며 길거리음식도 먹고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순식간에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저녁이 올 때 쯤, 큰 무대에서 시작된 클래식음악연주의 향연. 러시아인들의 클래식음악 사랑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우리도 무대 앞에서 1시간이상 떠나지 못했다. 정말로 웅장했고,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음악에도 미동 없이 음악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이 곳 사람들이 신기하기도 했다.
이 날 저녁에는 신승주 팀원의 깜짝 이벤트로 인해, 러시아인들과의 약속이 있었다. 얼떨결에 레닌 동상 앞에서 두 명의 러시아 여자 친구들을 만나 한식집을 향했다. 알고 보니 언어교환어플을 통해서 만난 사이라고 한다. 한국에 관심이 많아서 혼자 한국어 공부를 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려주려 많이 노력했다. 나이가 우리와 비슷한 또래였기 때문에 더 편했다. 한국과 러시아의 학교 시스템, 또 평소에 무얼 즐겨 하는지, 각 나라의 중요한 예절은 무엇이 있는지 등 기본적인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저녁을 대접했고, 그 친구들의 안내를 따라 우리가 몰랐던 건물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처음으로 러시아를 밤늦게까지 거느릴 수 있었다. 소중한 인연이었다.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고, 다시 가서 그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역시 정교회 이야기에 가장 반응이 빨랐으며 우리들의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젊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만남 후에 헤어짐은 늘 아쉽다. 사진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며 다음을 기약했다. 노는 일이 제일 힘들다고 이 날 우리는 기막힌 꿀잠을 잤다.
8월16일 이른 아침부터 바빴다. 이유는 오늘의 탐사는 예카테린부르크가 아닌, 근교에 있는 작은 마을 ‘Невьянск(녜반스크)’이기 때문에 기차를 타러 가야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타는 기차고,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몰라서 마음이 급했다. 그래도 다행인건 호텔 바로 앞이 기차역이라는 것이었다. 기계로 표를 살 수가 있어서 표를 사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기차 탑승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언제 어떻게 타는지 아예 몰랐다. 기차역 온 곳을 누비며 관리자 같은 사람들한테 각자 계속 물어보고 다니다가 모였다. 기차 출발시간은 모스크바시간을 표준 시간으로, 전광판을 보면 시간과 게이트, 어디로 가는지 다 나와 있었다. 물론 네뱐스크가 큰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전광판에 적혀 있지 않았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시간에 딱 맞게 기차를 탈 수 있었다. 테이블 없이 마주보는 형태의 기차다. 사전 조사 때 미리 그 곳에 큰 사원과 피사의 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획해 두고 있었다. 실제로 예카테린부르크의 학생들이 네뱐스크로 견학을 자주 간다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권으로 견학 가는 느낌인 걸까? 다들 너무 일찍 나온 탓인지 기차 안에서 비몽사몽이다. 분명 1시간30분~2시간 소요라고 알고 탔는데 거의 3시간 넘게 탔다. 다행히 지나치지 않고 네뱐스크역에서 잘 내렸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또 고난의 시작이었다. 도대체 사원까지 어떻게 가는지가 막막했다. 역에 있는 안내원한테 물어봐도 나는 여기서 표를 팔 뿐이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신경질적인 대답뿐이었다. 택시를 타려고 해도 다 떨어져가는 택시 승강장 간판 앞에는 택시가 단 한 대도 없었다. 버스를 타는 것이 원래는 맞다. 그런데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고, 버스가 와도 우리의 목적지로 가는 버스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택한 방법, 가진 건 체력이라는 것 밖에 없다고 자부하는 5명의 끓는 피는 말도 안 되게 그냥 걷기를 택했다. 그 때의 환경을 회상하자면 건물이라는 것은 역밖에 없었다. 전부 나무였다. 길도 비포장이었고, 겉에서 보기에는 이게 과연 마을인가? 숲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지도로 대략적인 방향만 확인을 한 후 걷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모험이라면서 다들 긍정적이었다. 너무 무작정으로 걸음을 시작했기 때문에 물론 걱정이 되는 모습이었지만, 이 모습은 정말 얼마 가지 못했다. 주변에 보이기 시작하는 작고 허름한 건물들과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 예카테린부르크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 눈이 바빠져서 오히려 점점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풀려 다니는 대형견들, 길목에서 한국의 비석치기 같은 놀이를 하는 꼬마들 등 색다른 느낌이었다. 이 순간을 남기고 싶어, 동영상촬영을 하면서 걸었다. 대략 40분정도 걸었을까? 믿을 수 없게도 멀리서 사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대 없이 이 길이 아니면 반대 길로 돌아서 가자하고 걸었기 때문에 정말 신기했다. 빠르게 사원에 도착했고, 역시나 우리를 압도하는 외관은 사진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옆에는 박물관과 피사의 탑이 있는데, 여기에 있는 피사의 탑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일부러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었다. 일단 박물관에 먼저 들어갔다. 실제로 견학을 온 학생들, 가족단위가 많았다. 박물관 안에는 의류부터 시작해서 식기, 무기 등의 다양한 장르의 역사들을 모아뒀다. 박물관 안내원 아주머니께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더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사원과 박물관, 탑을 한 곳에 모아둔 곳이 굉장히 넓었기 때문에 사원도 그에 맞게 정말 컸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던 순간이다. 노란색, 금색, 흰색으로 이루어진 사원은 마치 올림포스 궁전처럼 생겼다. 건축이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건너편에는 큰 강이 펼쳐져 있다. 그 앞에 앉아 다 같이 잠시 쉬는데 순간 우리의 눈을 의심했다. 웬 어린 남자아이가 혼자 강에서 배를 타고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강가 주변에 낡은 집들이 몇 채 있는데, 그 집에 사는 것 같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인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 아이를 모델 삼아 멋있는 사진을 찍어냈다. 다시 한 번 사원을 빙 돌고나서 기차를 타러 발을 돌렸다. 기차의 마지막 출발 시간이 생각보다 빠르기 때문에,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글을 읽다 눈치를 챘겠지만, 그렇다. 우리는 이 날 이때까지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다. 이유는 일단 네뱐스크에 밥을 먹을 만한 식당이 없었다. 오후 4시 정도였을 것이다. 모두 배를 부여잡고 기차역으로 가다가 마트를 발견해서 뛰어 들어갔다. 다들 사정없이 먹고 싶은 것을 집었다. 힘이 들었는지 다들 당류를 골랐다. 초콜릿의 개수를 세자면 대략 20개였고, 거기에 달달한 빵과 과자 및 음료 등을 양껏 들고 있었다. 사실 우리 팀이 체력이 좋지만,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두들 굉장히 잘 먹는다는 것. 러시아에 와서 입맛이 맞지 않는다는 말을 아무도 한 적이 없다. 저 많던 주전부리는 기차역까지 걸어가면서 다 해치웠다. 기차를 한 번 타봤다고 다시 예카테린부르크로 가는 기차는 쉽게 탔다. 그리고 그렇게 걷다가 왔음에도 아까 네뱐스크로 올 때와는 달리 기차에서 쉼 없이 웃고 떠드는 동안 눈 깜짝할 사이에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을 했다. 분명 시계를 보니 3시간 넘게 탔는데도 말이다. 올 때와 갈 때가 바뀐 것 같은 느낌... 호텔에는 밤에 도착을 했고, 바로 옆에 맥도날드가 있어서 간단히 햄버거로 저녁을 해결했다. 다음 날 타슈켄트로 가는 비행기가 오전6시로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다들 들어가자마자 일찍 잠에 들었다.
※ 타슈켄트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Yekaterinburg)에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Tashkent)로 출발하기 위해 우리팀(꽃보다 유라시아)은 일찍 호텔에서 잠을 청한다. 새벽 6시 비행기이기 때문에 3시간 전에 일어나서 3시 30분에 콜택시를 타고 예카테린부르크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3명(이태건, 신승주, 최하은), 2명(이정현, 권오섭)으로 나누어서 택시를 탔다. 모두 새벽에 일어난 터라 차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20분정도 택시를 타고 가는 도중 공항으로 향하던 차량들끼리 차 사고가 났다. 앞선 차량의 사고로 인해 우리 택시들도 급정거를 하게 되었고 앞차랑 약간의 충돌을 하였다. 공항까지는 아직도 멀고 우리도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많이 당황하였고 택시 기사 아저씨들도 당황하셨다. 그러고 나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경찰들이 도착하였고 경찰들은 사고 난 차량주인들에게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사고 경위를 조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들은 차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당황하여서 택시기사 아저씨의 나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만 알아듣고 차에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다. 경찰들의 조사는 맨 앞쪽 사고 시발점에서 가장 오랫동안 조사가 진행 되었고 그러면서 점점 우리들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 다행히 우리 차량이 연쇄충돌사고에서 끝에 위치하였기에 몸이 다친 팀원은 없었다. 점점 안정이 되고 우리 차량도 경찰의 조사를 받았지만 우리는 외국인이고 다친 사람도 없어서 택시 기사에게 몇 가지만 물어보고 끝이 났다. 경찰 조사가 끝나고 파손된 차량들을 견인해가고 다친 사람을 후송해 갔다. 그 후 다시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공항은 사고 때문인지 더 많은 차량으로 붐볐다. 우리 팀은 부랴부랴 뛰어서 티켓을 발권 받으러 갔지만 이미 30분전에 티켓 발권은 다 끝났다고 더 이상 안 된다고 했다. 우리는 5시에 공항에 도착하였기에 발권은 안 되고 한 사람당 벌금 2000루블을 낸다면 가능하다고 했지만 지금 루블로 그만큼도 없을뿐더러 지금 당장 카드에서 돈을 뽑고 그 돈을 환전하고 해야 되는데 5분안에 못하니 우리는 비행기를 포기하였다. 우리는 바로 로컬리티에 우리가 비행기를 놓친 사유를 전하고 나서 우리들끼리 회의를 시작하였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타슈켄트로 가는 비행기는 일주일에 한 대만 있고 그 한 대를 지금 놓쳤으므로 우리들의 탐사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테마를 약간 수정하여 러시아 정교회만 집중적으로 탐사를 하러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로 가는 쪽과 늦었지만 타슈켄트로 가는 것, 이 두 방향으로 의논을 하였다. 그러면서 이정현 팀장은 계속 센터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우리들을 상황을 알려주었다. 두 방향에 대해 고민하던 중 그래도 조사한 방향과 원래 테마를 살리는 것을 더 좋다고 판단하여 8월 17일 06시 비행기 대신 당일 23시 비행기를 예약하고 타슈켄트로 출발 하였다. 이 와중에 로컬리티 많은 교수님들이 비행기 값을 내주시면서 무사히 예약과 탑승을 완료하고 8월 18일 02시에 타슈켄트 국제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은 비자가 있는 나라이며 자국인을 보호하는 정책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들어가기 전에 계속 검문을 하였다. 새벽인지라 팀원 모두 피곤한 몸을 이끌고 Sodlik Palas 라는 호텔로 택시를 타고 이동하였다. 그런데 도착을 하고 나서 택시기사는 우리들에게 한 사람당 5달러의 택시비를 내라고, 하였고 우리는 너무 피곤하고 아직 환율도 몰라서 그냥 내고 호텔에서 잠을 잤다. 나중에 알고 보니 25달러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정말 큰 화폐였고 그 택시기사는 우리가 달러(Dollar)와 숨(Sum)을 안 바꿔주자 갑자기 말을 바꾸고 돈을 더 내라고 한 것이었다. 처음에 공항에서는 전체 5달러로 가자고 했는데 택시기사가 도착하고 나서 말을 바꾼 것이다. 그날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나서 정신 차리고 다니면서 항상 협상할 준비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너무나 피곤한 하루였으므로 팀원들에게 낮 12시까지 잠을 자라고 하였다.
8월 18일 아침 9시에 이정현 팀장과 권오섭 팀원이 우즈베키스탄에 비자를 받게 도와준 여행사 전무님을 만나서 약간의 숨을 교환하고 현지 사정에 대해 간략하게 듣게 되었다. 12시에 팀원들과 함께 가스피달리 시장(Gaspidali bozor)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식당에 들려서 우즈베키스탄의 전통 음식으로 샤슬릭(Shashlik), 빵(Non)과 차(Choi)를 먹었다. 확실히 이슬람 국가라서 그런지 식당에서 술은 팔지 않고 있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 외에는 그 모습을 형상화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동물이나 사람의 문양으로 된 자기나 양탄자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그릇과 찻잔은 이슬람 형식의 식물 모자이크로만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식당에서 가볍게 배를 채우고 나서 우리는 가스피달리 시장으로 향했다. 가스삐달리 시장으로 향하던 중 중간에 우리는 독립광장과 아무르 티무르 공원을 지나갔다. 독립광장은 굉장히 큰 광장이었는데 이곳에는 소련시기에 핵실험에 대한 위로비, 독립박물관과 정부 관리 건물이 있었는데 두 건물은 보수공사중이라서 들어가지 못했다. 독립광장을 지나서 아무르 티무르 공원으로 들어갔다. 아무르 티무르라는 인물은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손꼽히는 역사적 인물로서 우즈베크인들의 첫 번째 제국의 창시자이다. 소련에서 독립 후 국민적 의식을 모으기 위해 우즈베크인들의 영웅을 위한 건물을 많이 세웠는데 그 중 한 곳이 아무르 티무르 공원입니다. 아무르 티무르 공원에는 아직 러시아식 건물이 남아있었는데 작은 규모의 러시아 식 궁전이 하나 남아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현재는 폐쇄되어 있어서 들어가서 볼 수는 없었다. 우리가 아무르 티무르 공원을 걸어 갈 때에는 15시에서 16시 정도 때라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장 더운 시간이기도 하고 해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밖에 잘 안 돌아다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공원 주변역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의 14시 이후는 굉장히 더운 날씨지만 기후 자체에 습도가 없는 건조한 날씨라서 그런지 땀은 안 나는 기이한 날씨였다. 하지만 40도에 가까운 햇볕 때문에 일단 나무 그늘 속에 들어가서 우리 일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 피곤이 덜 풀린 상태이고 너무 더운 날씨에 돌아다니는 건 안 좋다 여겨서 잠시 나무 그늘아래에서 열을 식히고 건물 안에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도 탐사에서 쉬운 일만 찾을 수는 없다는 의견도 나오고 모두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서 우리는 바로 가스피달리 시장으로 택시를 잡고 출발하였다. 가스피달리 시장은 그렇게 큰 시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물건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고 있었다. 학용품부터 시작해서 향신료, 고기, 과일 등을 시장에서 팔고 있었다. 우리는 시장에서 100달러를 환전하고 나서 바로 옆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를 탐사하러 갔다. 이슬람 국가로서 알려진 우즈베키스탄에서의 교회는 정말 크고 웅장했다. 마침 사람들이 예배를 하러 들어가서 우리도 따라 들어갔지만 짧은 반바지랑 치마는 들어갈 수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문 앞에서 눈으로만 확인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건물을 보니 처음에는 어색할 줄 알았는데 굉장히 잘 어울리고 조화로운 모습이었다. 중간 중간 보이던 모스크 역시 지붕은 둠 형식이고 푸른색을 보였는데 가스피달리 시장 옆에 위치한 교회 역시 푸른색과 황금색의 조화와 러시아에서도 많이 보았던 돔 형식의 지붕을 보았다. 해가 진후에는 서늘한 날씨가 되었고 우리는 저녁을 먹고 잠을 잤다. 다음날 8월19일 사마르칸트 행 열차 아프라시압을 타고 출발하였다.
※ 사마르칸트
우리가 사마르칸트에서 방문했던 곳은 시압 바자르, 비비하눔 모스크, 하즈렛 히즈르 모스크, 아프라시욥 박물관, 다니엘 영묘, 쇼히진다, 울르그벡 천문대, 레기스탄 광장이고, 총 1박 2일의 일정으로 이곳들을 둘러보았다.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서 2시간 정도, 한국의 KTX와 비슷한 ‘아프로시압’이라는 이름의 고속열차를 타면 사마르칸트에 도착한다.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의 큰 도시 중 하나로, 옛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을 만큼, 문화와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곳이다. 우리 ‘꽃보다유라시아’ 팀은 이 곳 사마르칸트에서 풍부한 우즈베키스탄의 건축과 종교적 건물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이 곳으로 출발했다. 열차를 타고 오면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사막을 볼 수 있었다. 한층 더 중앙아시아 같은 풍경들을 보며, 우리 팀 모두 기대감이 가득했다.
8월 19일 오전 10시 30분 경, 사마르칸트 역에 도착했다. 열차를 타고 사마르칸트에 도착하여,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로 나갔다. 기차역에서 우리가 묵을 호텔까지는 차로 10분 정도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감안하여 택시를 잡으려했다. 하지만 택시 기사들이 외국인들에게 돈을 더 비싸게 받으려 한 탓에, 몇 대의 택시를 보냈다. 결국 8000숨에 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우리가 묵게된 호텔의 이름은 '카밀라 호텔‘이다. 우즈베키스탄의 화폐 단위인 ’숨‘이 필요했던 우리는 환전을 위해 시압 바자르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처음 오는 곳에서, 2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시장을 지도만 보고 찾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큰 도로로 나와, 길을 지나가는 한 소녀에게 시압 바자르에 가는 길을 물었다. 그 소녀는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는데, 수줍게 웃으며 자신도 지금 시압 바자르에 가는 중이라 말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길을 안내해주겠다며, 함께 갈 것을 이야기했다. 함께 시압 바자르에 도착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환전을 하러 나섰다. 지금 생각하면, 그 소녀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것, 그리고 한국에 대한 물건이나 이야기를 하지 못했던 것도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시압 바자르의 정문에 가니, 한 중년 남성이 ’달러‘를 말하며 환전할 것을 요구했다. 환전은 우즈베키스탄 언어를 공부하는 권오섭 오빠가 맡아 진행했다.
오늘 하루를 지낼 생활비를 환전한 후,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한 우즈베키스탄 전통음식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서 샤슬릭(양꼬치), 삼사(빵 안에 고기를 넣고 튀긴 빵), 논(우즈베키스탄의 주식인 둥근 모양의 빵), 우즈베키스탄 전통 수프, 녹차, 콜라를 주문했다. 우리의 옆 자리엔 노부부가 우즈베키스탄 전통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고 한국에 관해 이야기하며, 우리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사마르칸트의 식당에서 신기했던 점은, 우즈벡 사람의 대부분이 손으로 식사를 한다는 것이다. 난 인도에만 이런 문화가 있는 줄 알았는데,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손으로 밥을 먹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우즈벡 음식의 맛은 러시아 음식보다 맛이 강하고, 간이 되어있는 탓에 한국사람들 입맛에 맞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시압 바자르를 구경한 뒤, 우리는 바자르 옆에 위치한 ‘비비하눔 모스크’로 향했다. 비비하눔은 중국에서 온 여자였으며, 아무르 티무르 왕이 가장 사랑했던 왕비이다. 이 모스크는 그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모스크에는 예로부터 내려져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아무르 티무르왕은 사랑하는 비비하눔을 위해 이 모스크를 지었다. 그때 이 모스크를 설계한 건축가가 비비하눔 왕비를 본 뒤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티무르 왕이 인도원정을 떠났을 때, 건축가는 비비하눔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비비하눔은 건축가의 구애를 거절했지만, 그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결국에는 건축가가 자신의 볼에 짧은 입맞춤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하지만 이 입맞춤 흔적이 지워지지 않아, 인도 원정 후 돌아온 티무르 왕에게 이 사실이 발각된다. 질투심에 눈이 먼 티무르 왕은 건축가를 사형에 처하고, 비비하눔을 그 모스크의 미나레트(탑) 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이게 된다. 그 뒤 왕비의 유해는 이 모스크 옆에 위치한 ‘비비하눔 무덤’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비비하눔 모스크는 웅장한 모습을 자랑했으며, 푸른색의 모양들이 인상적이었다. 비비하눔 모스크는 건축 당시에 철골을 이용하지 않고 벽돌로 지어졌다는 이유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음으로 하즈렛 히즈르 사원에 방문했다. 이 곳은 무슬림들이 예매를 드리는 사원으로, 마침 우리가 방문했을 때 예배실처럼 보이는 곳에서, 사제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사제가 기도를 이끌었으며, 옆에 앉은 여자와 어린이들이 함께 기도에 동참하고 있었다. 엄숙한 기도하는 신자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사원 밖으로 나왔다. 나오니 또 다른 사제가 앉아있었다. 우리는 그 사제와 우즈베키스탄과 이슬람에 대해 궁금했던 점도 물어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그 사제의 모든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우즈베키스탄 현지인과 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뜻 깊은 시간이었다.
하즈렛 히즈르 사원에서 20분간 걷다보니, 우리의 세 번째 목적지인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도착했다. 우리가 박물관에 방문한 이유는, 과거 고구려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벽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 벽화에는 과거 우즈베키스탄에 방문한 각 나라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 중 2명의 사람이 고구려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주 먼 옛날에, 국가 간의 교류를 위해 이 곳 사마르칸트까지 온 고구려 사신들의 노력과 체력에 놀랐고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박물관을 관람할 때 생긴 일이다. 박물관을 지키는 아주머니들은 관람하고 있는 우리를 계속 따라다니며, 기념품의 구매나 박물관과 관련된 영상 관람권 지불을 달러로 요구했다. 더운 날씨라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기에 이해는 할 수 있다만, 아주머니들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호객행위를 하는 것에 많이 당황했다.
박물관에서 10분간 걸어 선지자 다니엘 영묘에 도착했으나, 입장료가 너무 비싸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근처에서 열리는 우즈베키스탄 인들의 결혼식을 볼 수 있었고, 현지인과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현지인 할머니였는데, 어디서 왔냐고 물어봐주셨고, 자신의 친구가 한국에 살고 있다며, 한국을 좋은 나라라 말씀하셨다. 이 짧은 대화는 더운 날씨와 계속되는 일정으로 지친 우리가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하기에 충분했던 시간이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느낀 건 한국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좋다는 것이다. 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한민국은, 돈이 많은 나라, 기회의 땅으로 여겨진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점이 오히려 한국인에 대한 편견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택시를 타거나, 음식을 먹을 때 그리고 관광지나 유적지에 입장할 때, 우리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예상했던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내야했으며, 바가지를 자주 쓰기도 했다. 이는 우즈베키스탄의 자국민 보호 정책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라 알고 있다. 사실은 한국인을 ‘돈 많은 사람들’로만 생각하는 모습에,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을 많이 느끼기도 했다. 그때 한국에서 공부하는 우즈벡 고려인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그 친구도 한국에서 택시, 미용실, 식당 등에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함은 물론이고, 가끔 차별을 받기도 한다고 내게 이야기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는 외국인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 잘 감이 오지 않았지만, 직접 내가 외국인이 되어 그런 대접을 받아보니,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북쪽으로 25분간 걸어, 울루그벡 천문대에 도착했다. 울루그벡은 아무르 티무르의 손자이며, 우즈베키스탄의 3대 위인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울루그벡은 수학, 천문학 역사, 문학에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문화와 과학 등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처음에는 울루그벡을 기리는 방문관에 방문했다. 그 곳에서 울루그벡이 설계한 이슬람 건축관련 모형을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울루그벡이 만든 세계지도와 책 등을 볼 수 있었다. 아쉬웠던 점은 낮이라 그런지 박물관 안의 불을 켜놓지 않았다. 그래서 관람이 힘든 부분이 있었고, 전시품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의 3대 위인 중 하나인 울루그벡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했다.
다음 목적지인 ‘쇼히진다’까지는 걸어서 50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40도를 웃도는 우즈베키스탄의 날씨로 지친 우리는 걸어서 이동하기에 힘들다고 느껴,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쇼히진다는 아무르 티무르 왕 시대의 주요 귀족이나 가족들이 묻혀있는 묘이다. 그리고 이 주변에는 일반 사람들의 묘가 쭉 둘러있다. 이것은 쇼히진다 뿐 아니라 비비하눔 모스크, 하즈렛 히즈르 사원 등 선지자의 무덤 근처에서는 항상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전조사에 의하면, 큰 업적을 세운 위대한 사람 혹은 이슬람 선지자와 가까운 곳에 묻히면, 죽어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 이슬람 기본 율법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것은 우상 숭배의 이유로 금지 되어있다.) 쇼히 진다에 들어서니, 무덤처럼 보이는 큰 사원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고, 그 사원의 문양과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우리는 아무르 티무르의 부인, 친척, 장군 등의 무덤을 보았고, 그 중 몇몇 무덤의 위에는 돈이 놓아져 있었다. (이는 사전조사 자료에 입각해보았을 때, 그들에게 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쇼히 진다의 내부를 다 둘러본 뒤, 외부로 나가니, 일반 사람들의 무덤 비석과 함께 열을 지어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조문객들도 몇몇 있었고 주로 꽃을 가져와 고인을 애도했다. 다음으로 레기스탄 광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일 있을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의 방문으로 오후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우리는 쇼히 진다에 방문함으로써 사마르칸트의 첫 번째 날 탐방 일정을 마쳤다.
더운 날씨 속에 하루 종일 걸어 다닌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을 먹으러 식당을 찾고 있었다. 한 거리를 지나던 중, 7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우리를 상대로 식당을 홍보했다. 라그만(우즈베키스탄 국수)과 샤슬릭이 먹고싶었던 우리는, 그 아이에게 라그만과 샤슬릭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남자아이는 라그만과 샤슬릭이 있으니 어서 식당으로 들어오라했다. 남자아이가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가니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식당이라 하기에는 쓸쓸한 분위기였다. 배가 고픈 우리는 라그만과 샤슬릭을 시키려 했지만, 그 남자아이는 갑자기 말을 바꿔 라그만과 샤슬릭이 없으며, 현재 주문이 가능한 음식은 삼사뿐이라 했다. 크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우선 삼사 5개를 시켰다. 슬프게도 삼사는 딱딱하게 굳어 맛이 없었다. 그러다 그 남자아이가 삼사에 찍어먹는 토마토 소스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소스를 시킨 적이 없기에, ‘서비스로 주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소스를 먹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소스는 남자아이가 임의로 추가한 것이였다. 서비스인줄 알았던 소스는 3000숨의 가격이었으며, 삼사 하나로 배가 차지 않은데다, 많이 걸어 지친 우리는 화가 났다. 주문하지도 않았지만, 외국인이니 순순히 계산할거라 생각하고 음식을 가져다주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 크게 서운한 마음을 느꼈다. 어쩔 수 없이 계산을 하고, 다른 식당으로 가서 많은 양의 음식을 시켜, 배가 부를 만큼 제대로 된 저녁식사를 했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사마르칸트의 마지막 날 아침, 우리는 마지막 목적지인 레기스탄 광장으로 향했고, 다행히 입장할 수 있었다. 레기스탄 광장은 사마르칸트의 중심지로 각종 대규모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레기스탄 광장에는 세 개의 메드레세가 세워져 있는데, 메드레세는 중세에 이슬람 신학교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국가주요 행사들이 열리고 기념품을 파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메드레세 중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쉬르도르 메드레세였다. 이슬람의 교리 특성상 동물이나 사람을 건축에 그려넣는 것을 금지하는데, 이 메드레세의 앞면에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사마르칸트의 중심지였던 레기스탄 광장의 메드레세에 기본 이슬람 교리와 반대대는 사람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이 의아했던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쉬르도르 메드레세에 대해 더 조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알아보니 ‘쉬르도르’라는 의미가 ‘사자가 그려져 있다’라는 뜻이었고, 당시 사마르칸트의 왕이 자신의 권위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그려 넣은 것이었다. 이로 인해 상당히 많은 논란이 있기도 했다하니, 역시나 사마르칸트에 이슬람교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르칸트의 탐방은 앞서 탐방했던 러시아와 타슈켄트보다 체력적인 한계를 크게 느꼈다. 습기가 없는 40도의 낮 날씨에 1시간 이상씩 걸어야했던 우리는 꽤 힘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한국의‘ 돈 잘버는’ 이미지로 억울함을 느낄 때도 많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한국인을 ‘돈 많은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도통 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에게 악의를 품고 다가온 우즈베키스탄 사람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웃는 얼굴로 다가오고, 한국이란 나라를 친근하게 여겨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마르칸트에서 놀랐던 점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모두가 러시아어를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러시아어를 들을 수는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러시아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이 탐방을 가기 전에는, 제2외국어로 카자흐어 혹은 우즈베키스탄어를 배워야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러시아어로 모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은 수도인 타슈켄트와 달리,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등 다른 도시들에서는 러시아어만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앞으로 제1전공어인 러시아어 뿐 아니라, 제2외국어인 중앙아시아 언어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동기가 되었다. 다음에 사마르칸트에 다시 갈 기회가 생긴다면, 좋지 않던 기억들은 떨쳐버리고, 오히려 현지인들의 시선으로 사마르칸트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타슈켄트 ~ 인천공항
아프라시압을 타고 사마르칸트에서 타슈켄트로 출발하였다. 타슈켄트에서의 마지막 날이고 우리 탐사의 마지막 날인 8월 21일 우리는 Rabsan Hotel에서 조식을 먹고 12시에 짐을 갖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여행사 전무님이 짐을 맡아 주신다고 해서 우리는 여행사에 짐을 맡겨 놓고 초르수 시장(Chorsu bozor)로 출발했다. 초르수 시장은 타슈켄트에서 가장 크고 가장 번화한 시장이다. 사람도 엄청 많은 곳이라서 우리는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환전하고 구경을 하였다. 너무 넓어서 다 구경도 못했지만 그래도 가전제품 빼고는 다 여기서 사면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초르수 시장에서 나온 뒤 바로 옆에 있는 쿨케다쉬 마드레세로 향했다. 쿨케다쉬 마드레세는 이슬람 사원 역할과 더불어 이슬람을 공부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페인트칠과 더불어 내부 공사 중이어서 입장이 불가하여 밖에서만 관측하게 되었다. 쿨케다쉬 마드레세 역시 겉에 푸른색과 황토색의 조화가 이루어져 있고 모든 문양은 식물 모자이크로 되어있었다. 들어가질 못하니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때 에리크 라는 우즈베크 사람이 다가왔다. 한국의 금호공대에서 경영을 공부하고 있다는 에리크씨는 우리들에게 쿨케다쉬 마드레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과거 이슬람 경전을 공부하던 곳이라는 쿨케다쉬 마스레세는 신학생들을 많이 배출하던 곳이라고 한다. 다 같이 경전 공부하고 기도 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으나 소련시기 지난 후 점점 관광건물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하게 되었지만 지금도 가끔 무슬림들은 와서 기도를 드리고 간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 좋았겠지만 들어갈 수 없어 안타까웠다. 쿨케다쉬 마드레세에서 택시를 타고 우리는 하스트 이몸에 갔다. 하스티 이몸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모스크로서 현존하는 코란 중 가장 오래된 코란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모든 사원에 있는 미놀렛에서 예배 시작을 알리는데 아쉽게도 우리 팀이 갔을 때에는 예배를 시작하지 않아서 시작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그래도 하스티 이몸은 실제로 사용하는 모스크라 기도를 드리는 무슬림들이 많이 있었다. 가족들끼리 온 무슬림들이 기도를 하면서 아랍어로 노래를 하는데 너무 엄숙해서 그 자리에서 가만히 그 노래를 듣고 나왔다. 밖에서 본 하스티 이몸 역시 이슬람 양식으로 푸른 돔과 푸른색 식물 모자이크가 모든 벽에 그려져 있었다. 하스티 이몸을 다 보고 우리는 타슈켄트의 현대식 백화점인 사마르칸트 다르바자로 출발하였다. 사마르칸트 다르바자는 현대식 건물로서 한국이라 정말 비슷한 양식이었다. 사마르칸트 다르바자에서 간단하게 커피 한잔 하고 고려인들이 하는 국수집에 가서 국수를 먹었다. 고려인들이 만들어서 그런지 한국인 입맛이었다. 그 후 우리들은 짐을 챙기고 나서 타슈켄트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타슈켄트 공항에서 역시 많은 검문을 거쳐서 들어갔다. 그러던 중 신승주 팀원의 화폐 신고서가 약간 잘못되어 항공사 직원들의 검문을 받는 등 약간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들어갔다. 무사히 모든 여정을 맞추고 비행기를 타고 대한민국 인천공항으로 출발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