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3기] [유라시아] - 나로다 팀 [역사의 숨결, 우리의 발길; 러시아 혁명의 현재적 의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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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7-03-14 16:26 | Read | 1,908 |
본문
탐사테마
저희 나로다 팀의 탐사 주제는 “역사의 숨결, 우리의 발길: 러시아 혁명의 현재적 의미 ”입니다.
러시아는 그동안 정치, 경제, 안보와 문화예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한국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적으로 그 가치와 숙명성을 덜 인식해 왔습니다. 과거의 사상적·이념적 차이는 러시아를 냉전적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제한하여 심리적인 접근에 일정한 한계를 가져다주었지만,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그 이후 러시아가 자본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우리는 한 층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와 명분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러시아를 소련이라 호칭할 만큼 대러 인식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례가 많습니다. 우리는 러시아를 철저하게 우리 국익의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회자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러시아의 신동방 정책은 충분히 양국의 경협 강화의 중심점이 될 수 있는 정책임에도 아직 그 성과가 미비합니다.
비교적 미국, 중국, 일본에 고정된 한국의 외교 정향이 그간의 교육 정책에 반영됨에 따라 대다수의 사람들은 러시아에 대해 깊이 있게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습니다. 지식과 정보의 부족은 러시아를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시켰고, 심지어는 러시아 사회와 문화는 낯설고 이질적이라는 고정관념을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양국의 발전과 관계 맺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내지 못합니다.
저희 나로다 팀은 바로 지금이 협화음을 낼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여 양국의 관계를 확실히 진전시켜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방법으로 양국을 이어주는 과거 역사를 돌아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과거 러시아가 연해주를 획득하여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양국은 지정학적으로 가까워지는 첫 발을 내딛었고, 이후 1937년에는 러시아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많은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하는 등 오랜 역사 속에서 필연적 관계를 지속해왔습니다. 이번 저희 팀의 탐사와 같은 상호간 이해의 노력이 기반이 되어 양국의 민중들이 아픔을 동감하며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기대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서로를 시장이나 투자 가능성 등의 이익적 측면에서만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전략적 파트너로 인식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저희 팀은 많은 역사적 사건 중에서도 ‘러시아 혁명’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러시아 혁명의 사회 변혁 분위기와 계몽의식은 러시아 내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비슷한 시기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많은 한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교육과정에서 이러한 이념적 차이를 충분히 다루지 못한 것이 오늘날 대러 인식의 부재를 불러왔습니다. 저희 나로다 팀은 러시아 혁명의 발자취 속에 자연스레 겹쳐지는 우리 민족과의 교집합을 직접 느껴보고자 합니다. 역사의 틈새를 메우고 교집합을 늘리는 일은 앞으로 양국의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분명 유의미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탐사목표
2017년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역사적, 연대기적으로 의미가 깊은 해를 앞두고 저희 나로다 팀은 오늘날의 러시아와 대한민국 형성의 주춧돌이 되는 ‘러시아 혁명’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그 혁명에 함께 살아 숨쉬는 우리 민족의 발자취도 함께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영국의 정치인인 윈스턴 처칠은 유명하고도 뼈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2016년 수교 26년을 맞아 한국과 러시아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도약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최근 러시아와 서방 간 대치상태의 장기화와 제4차 북한 핵실험 등의 요인으로 실질적인 성과가 미흡한 실정입니다. 이 때, 저희 나로다 팀은 양국 관계 발전의 획기적 전환점으로써 ‘과거’에 주목하여 러시아혁명과 그 속에 함께 자리하는 우리 민족의 흔적을 찾아 나섰습니다.
구체적인 탐사 목표와 예상되는 성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러시아 혁명 발생지를 직접 탐사함으로써 초중고 일반 교육 과정에서는 쉽게 배울 수 없었던 한-러 간의 역사를 심도 있게 학습합니다. 러시아는 과거 한국의 역사를 둘러싼 주요 4강(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중 하나로, 한국과 깊은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이지만 그동안 한·미 동맹이 강화됨에 따라 단단한 고정관념 속에서 서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교과 과정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은 탓에 대다수의 젊은이들에게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러시아를 ‘내부의 창’으로 바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탐사를 통해 문자와 그림으로만 만나 현실 너머의 것으로 잊고 있었던 그 곳에 자리한 역사적 사실을 눈과 귀로 직접 찾아가보고자 합니다. 100년 전 그들은 과연 무엇을 열망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문 밖으로 뛰쳐나갔는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그들의 필사적 투쟁은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바로 그 역사적 장소에 남아있는 흔적을 몸으로 배움으로써 양국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의 밑거름으로 삼고자 합니다.
두 번째는 오늘날의 러시아 민중들은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 사회모습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또한 그 속에 녹아있는 한국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살펴 볼 것입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적 대립 문제와 냉전적 시각에서 벗어나, 양국의 역사적이고 숙명적인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당시 많은 한인들은 1917년 2월 혁명 이후 시베리아 내전이 종결되는 1922년 말까지 변화무쌍한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받아 친 볼셰비키 정치노선을 비롯하여 친 백위파 정치노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또한 볼셰비키 당이나 사회혁명당에 가입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친 볼셰비키 노선을 취한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을 조직하기도 하였습니다. 저희는 하바롭스크를 찾아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 역사에서 러시아 영토가 얼마나 중요한 지리적·물리적 거점이 되었는지를 살펴 볼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 혁명 속에 살아 숨쉬는 우리 민중의 발자취도 찾아 가 볼 것입니다.
보다 원활한 탐사를 위해 저희 조는 각 지역에 존재하는 혁명의 유적들을 미리 조사하여 자료집을 제작했습니다. 이는 저희 조 탐사 여정의 최종적인 결과물로서 2주간의 탐사 내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과거 한국과 러시아 역사가 남긴 교훈과 긴밀한 상관성을 바탕으로 향후 양국의 상호 협력 증진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917년, 위협적이었던 북극의 곰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여러 민족의 자유와 자결을 선포한 놀라운 변신이 동양의 민족주의자들에게 미친 커다란 감동과 용기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극동지역과 아태지역으로 키를 잡은 러시아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및 대러 네트워크 확대에 주력하는 한국이 만났을 때, 이러한 과거 사상적 교류를 통해 역사가 맺어준 인연의 끈을 바탕으로 중장기적인 전망을 내다보며 관계를 진전시키는 데에 나로다 팀의 이번 탐사가 소중한 기반이 될 것입니다.
저희 나로다 팀은 오늘을 살고 있는 민중으로서 당시 민중들의 간절했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고, 100년이 흐른 지금 그 목소리를 향해 갈리는 시선에 주목하고자 하며, 또한 러시아학 학문후속세대로서 한국과 러시아의 역사적 관계를 바탕으로 향후 양국의 상호 발전방향성을 엿보고자 합니다.
탐사내용
1일 차 - ХАВАРОВСК
하바롭스크(1월 18일~1월 20일)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이한 2017년 1월 18일 우리 나로다 팀은 러시아에서의 약 11일 간의 탐사를 위해 인천 국제공항으로 모였다. 사전에 구매하였던 방한용품들을 나눈 후 여행객들 사이로 출국장을 지나 탑승구역으로 들어섰다. 떠나기 전 아침식사와 함께 탐사를 위해 미리 제작하였던 핸드북의 내용을 다시 한 번 각자 점검하였다. 탐사지역에 대한 간단한 개괄, 한국과의 연관성, 탐사 도시에서 진행 될 설문조사, 우리가 가야 할 곳들에 대한 사전 조사 내용이 정리되어 있는 이 핸드북을 읽었다. 과연 사전 조사한 것처럼 우리가 이 많은 정보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 속에서 러시아와 한국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미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비행기 탑승시간이 시작되면서 주변에 앉아 있던 승객들이 기내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극동 연해주의 중심 도시이지만 바이칼호수로 유명한 이르쿠츠크나 최근 TV로도 많이 접할 수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하바롭스크이기에 대부분 승객은 러시아인들이었다, 3시간의 짧은 비행을 거쳐 하바롭스크에 도착하였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시기 많은 지식인과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은 미국, 중국, 러시아 각지로 흩어져 각자의 방식으로 대한의 독립을 바라며 활동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혁명을 기점으로 급속히 세를 넓히던 사회주의혁명 사상에 영향을 받은 독립운동가도 존재하였다. 우리는 왜 그들이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하바롭스크에서 찾아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협소하고 낙후된 국제공항의 여건상 활주로에서 버스로 승하차를 하였다. 동서로 긴 국토의 특성상 하바롭스크는 한국보다 더 동쪽에 있어 되려 한 시간의 시차가 빠르다. 공항과 시내로의 대중교통이 많이 발달해 있지 않기에 우리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길가에 쭉 늘어 서 있는 많은 대형 간판 대와 반대편에는 끝없이 이어져 있는 송유관. 가스관, 얼어붙어 있는 도로. 그제야 우리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겨울, 한국보다 높은 위도에 위치한 러시아의 특성상 해가 빨리 지며, 하바롭스크에서의 탐사 가능한 시간이 적기 때문에 빠르게 일정을 소화하기로 했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내려놓은 뒤 바로 탐사 일정을 시작하였다. 낡은 트램을 타고 러시아의 도시라면 어디든 있다는 레닌 광장에 도착하였다. 새해를 기념하기 위해 광장의 중앙부에는 작은 얼음 축제가 열려 있었고 아이들은 플라스틱 썰매를 들고 다니면서 얼음 미끄럼틀에서 썰매를 타고 있었다. 레닌광장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걸어가 골목골목을 헤맨 뒤 우리가 가장 처음 찾고자 하였던 김유체나 거리의 동판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과 러시아의 역사적 연결 고리를 찾고, 이를 재조명하려한 우리는 전공수업, 혹은 자료로만 보던 역사적 현장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감회가 깊었다.
우리가 조사했던 첫 번째 러시아와 한국 간의 연결고리, 김유체나는 사실은 김유경이라는 이름이 러시아의 표기를 거치면서 김유천으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김유체나가 되었다. 중소전쟁 당시 소련군 장교로서 큰 정공을 세우다 전사하게 된 김유천을 기리기 위해 하바롭스크 레닌관장과 중앙광장 사이에 김유천의 이름을 딴 김유체나 거리를 만든 것이다. 시가지를 중심으로 남북을 관통하는 약 3km의 이 거리를 매일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이다. 더욱이 김유체나 거리는 러시아 전 지역을 통틀어 유일한 한국인 이름의 거리라고 한다. 타국에서 쓸쓸히 죽었을 옛 한인을 기리기 위해 우리는 잠깐 묵념을 한 후 길을 지나는 러시아인들에게 간단한 질문들을 하였다. 생각보다 친절하게 러시아사람들은 우리의 질문에 대답해주었지만 러시아인 중 김유체나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이 아니었냐고 묻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첫 인터뷰에서 우리가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였지만, 우리의 인터뷰에 흥미를 느끼고 컴퓨터로 김유체나에 대해 검색을 하던 러시아 젊은이와 인터뷰 후에 한참 동안 김유체나 동판을 바라봤던 러시아 할아버지를 보면서 우리는 비록 한두 명의 사람들일지라도 러시아에서 한국과의 역사적 교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들에게 일깨워줬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하였다.
2일 차 - ХАВАРОВСК
1월 19일 일정 두 번째 날, 다음 날 모스크바를 가기 위해 공항으로 일찍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하바롭스크 탐사의 마지막 날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일정을 소화하기로 하였다, 가장 먼저 아무르 강으로 이동하였다. 이 곳 아무르 강변 주변으로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 년 3월(러시아력 2월)에 러시아 한인들이 모였다. 러시아 극동인민위원회 의장 크라스노체코프가 주최하는 조선 혁명가대회가 열린 것이다. 이동녕, 양기탁, 안중근 동생 안공근 등 민족주의자들과 김알렉산드라, 오하묵, 유스테판, 오와실리 같은 볼셰비키 당원들이 참석하여 회의를 진행하였다. 이후 이곳 하바롭스크에서 5월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한글 기관지 <자유동>을 집필하고, 군사학교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3개월 뒤 하바롭스크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후 한인사회당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이인성, 김립 등의 민족주의자들은 백군들이 석방해주었지만 한인사회당의 창립자이자 혁명가이기도 했던 김 알렉산드라는 처형되고 말았다. 간절한 염원과 소망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우리의 독립 운동가들에 큰 안타까움과 감사함을 느꼈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이 가져다 준 오늘날의 자유와 행복에 감사함을 느꼈고,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몽골어로 "평화"라는 뜻을 가진 아무르 강에서 우리는 언젠가 남, 북, 중, 러가 협력하여 동북아 평화의 합수를 이루어 내리라 생각했다.
다음으로 아무르 강 강변에 위치한 하바롭스크 향토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박물관은 총 두 개의 관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하바롭스크를 비롯한 극동 러시아 지역의 지질, 매머드 뼈를 비롯한 동, 식물, 토착민족에 대한 전시실과 더불어 러, 청 조약, 러일전쟁 1, 2차 세계대전, 러시아혁명 등 러시아인들이 극동으로 진출한 이후부터 현대까지의 모든 역사를 다루는 박물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곳에서 극동지역의 한인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박물관 자체의 사료나 전시물 자체는 유익하고 다방면에 걸쳐 전시되어 있지만, 동북아 관련의 역사 사료와 전시물이 대부분 러, 일 전쟁과 1, 2차 세계 대전에 연관된 일본이나 중국인들의 극동지역 이주에 관한 것들이었다. 김알렉산드라나 김유체나의 흔적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적, 백 내전, 중, 소 국경분쟁 관련 역사관에서 자국의 슬라브인 출신의 위인 관련 자료가 대부분이었다. 혹시 몰라 박물관의 큐레이터에게 김유체나와 김알렉산드라에 대한 전시물이나 자료는 없는지에 관해 물었지만, 자신도 어렸을 적 이들에 대한 책을 읽어 이름만 알 뿐 이 박물관에는 없는 것으로 안다는 실망스러운 답변을 들었다. 소련의 관료이었을 것으로 예상하며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반(안) 중인이라는 인물의 사진을 찾았지만, 이 역시 큐레이터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답해 주었다. 한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얘기를 큐레이터분과 나누는 중에 우리는 과연 사학계에 종사하는 러시아사람은 소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소련의 역대 서기장 중 누가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지 궁금해서 소련의 역대 서기장 중 누구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지에 대해 질문 하였지만, “역사는 개인이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 역사가 흘러가 시간이 지난 후 자연스럽게 평가를 하는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예상과는 달리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얘기를 나눴던 큐레이터분들에게 우리가 준비해온 설문지를 바탕으로 질문하였다. 러시아와 한국 양국이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나, 극동지역에 활동한 항일 운동이나 한인 운동가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는 내용의 설문조사였다. 하지만 잠깐의 대화로는 우리에 대한 경계심이 풀리지 않았는지 혹은 자신의 의견이 기록지에 남기를 원하지 않는 러시아인들의 성향 때문인지 단 한 명도 우리의 설문조사에 응해주지 않았다. 탐사 초반 우리의 주제의 방향성을 잡는데 가장 중요했던 장소이자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은 많은 한인 운동가들이 활동했던 하바롭스크이기에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큰 성과를 건질 수 없어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이후 우리는 ‘KAPF’로 활동했던 사회주의 성향을 지닌 작가 조명희의 생가와 연해주 지역의 한인 학교에 배포하고자 한글 교과서를 만들었던 민족 출판사 보문사 터와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의 조직자 김 알렉산드라가 근무했던 활동 건물을 찾아갔다. 3곳 모두 하바롭스크 메인 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특히 보문사 건물터와 김 알렉산드라의 활동 건물은 작은 도로를 마주 보고 붙어 있다. 그 시절 황량한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하바롭스크 한 편에 모여서 조국의 밝은 미래를 그렸으리라 우리는 추측했다. 연해주의 한인 유지들로부터 돈을 빌려 김립, 이한영 등이 대한의 역사와 지리 교과서를 출판하기 위해 만든 민족 출판사 보문사는 초기 러시아와 사회주의 코민테른에 많은 지원을 받았다. 교과서의 출판을 위해 하바롭스크 주둔 러시아 군대 석판을 제공받았으며, 원동인민위원회 위원장 크라스느쇼코프가 인쇄기계와 인쇄비용, 종이를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만주, 연해주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가던 일본제국은 급진적인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확장세를 경계하였고 잔존 백군세력을 지속해서 지원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척점에는 항일 운동을 하던 대한의 독립 운동가들과 소련의 적군이 궤를 같이하였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처럼 일본에 대항하는 독립 운동가들을 물심양면 지원해주는 소련에 민족주의자 출신 독립 운동가들도 자연스레 소련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 것 아닐까 생각하였다. 또한, 20세기 초 제국주의, 왕정주의라는 낡은 구태를 타파하고 강대한 로마노프 제국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소련은 나라를 잃은 체 떠돌던 독립 운동가들에게 새로운 모멘텀을 제시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3곳의 유적지 모두 지금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특히 조명희 작가의 생가는 건물 터와 뼈대만 남아있어 그 황량함을 더 하였다. 보문사 터와 김 알렉산드라 활동지 역시 건물은 남아있지만, 현재 상점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사전 조사에서 김 알렉산드라 활동건물 벽면에 김 알렉산드라의 얼굴 부조와 20세기 그가 이 건물에서 일하고 1918 년 백군에 의해 희생 됐다는 동판이 부착되었다고 했었다. 하지만 김 알렉산드라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 동판만 존재할 뿐 그의 얼굴 부조는 철거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기타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후 우리는 늦은 밤까지 챌린지 일정과 탐사 방법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하바롭스크에서 행하였던 설문조사에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기에 우리는 향후 일정에서 인터뷰를 하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설문 대상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러시아 혁명에 관심이 생겨 러시아로 탐사를 온 한국의 대학생들임을 밝히고 간단히 대화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생각하는 중요한 질문들을 하나씩 던지기로 했다.
아쉬움이 크게 남은 하바롭스크였지만, 역사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우리 나름의 생각들을 정리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먼 훗날 하바롭스크가 한-러 역사 속 유의미한 장소로 재조명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모스크바 일정을 위해 아침 일찍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3일 차 - ХАВАРОВСК--> МОСКВА
모스크바(1월 20일~1월 22일)
러시아의 심장, 모스크바. 우리의 탐사 주제에 있어서도 그리고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나라의 수도를 가본다는 점에서도 기대와 설렘이 가장 컸다. 1월 20일 하바롭스크로부터의 장시간 비행을 끝내고 공항철도와 지하철로 숙소로 이동하니 예상했던 시간보다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짐을 두고 숙소에서 재정비 시간을 최소화 한 뒤 시내로 이동하여 저녁식사를 해결하였다. 이동 소요시간이 길었고 늦은 시간에 도착한 까닭에 모스크바에서의 일정을 부득이하게 수정해야했고 저녁을 해결하며 남은 시간동안 탐사계획에 따른 이동루트를 재구성하였다. 또한 하바롭스크에서 설문조사 진행경험을 바탕으로 보완해야할 부분을 참고하여 설문조사 장소와 방식을 서면조사가 아닌 대면조사로 진행하는 방향으로 논의하였다. 실제로 이렇게 방향을 바꾸고 난 이후 설문조사에서 보다 더 심도 있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고 기록을 남기는 데 있어서도 용이하였다.
4일 차 - МОСКВА
1월 21일 모스크바 둘째 날, 충분한 휴식 후에 본격적인 일정 소화를 계획했지만 숙소의 안전문제로 인해 급하게 다른 곳으로 숙소를 옮겨야했다. 이후 레닌 묘를 보기위해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이 날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군중들이 광장에 모인 날로 챌린지 탐사 주제를 선정하는데 있어 주목했던 날이다. 때마침 역사박물관 주코프 동상 앞에 많은 인파가 구 소련의 국기와 카네이션을 들고 모여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준비했던 설문에 따라 혁명에 대한 현대 러시아인들의 생각을 듣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고 서면조사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상당히 추운 날씨였음에도 예상보다 오랜 시간동안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비록 서면조사보다 절대적인 시간 소요는 컸지만 질적인 면에서나 실제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에서 탐사를 준비한 시간이 빛을 발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 다수가 혁명을 자랑스레 여기고 있었으며 그 중 노년층은 혁명에 대한 의견과 더불어 소련시대의 러시아가 더 나은 삶을 보장해 주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곳에서의 인터뷰 중 팀원 모두의 기억에 남은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로, 할아버지께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대립의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는 실패로 끝났고, 자본주의가 세계의 지배적인 이념이 되었다. 이를 자본주의의 승리였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그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너희는 사회주의는 나쁜 사상이라는 관점을 배웠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 이기고 졌는가를 떠나 본질을 보려 한다면 우리 세대의 의견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런 시도 자체가 참된 공부이다.”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건넸다. 4대 열강 중 한-미 동맹이 강화되면서 여태까지 우리는 고정관념 속에서 러시아를 바라봐왔고, 일반 교과과정에서 러시아와의 역사를 소홀히 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이 인터뷰가 끝나고서야 내부의 창에서 러시아를 바라보는 데에 큰 가치를 두었던 탐사과정이었음에도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잠시 잊고 있었음을 돌아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많은 러시아인들의 역사적 자부심에 놀랐다. 역사적 결과물, 평가에 치우치지 않고 러시아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냈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을 답변 한마디 한마디에서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평가하되 역사를 기리는 태도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었다. 광장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후 레닌 묘에 다녀왔다. 레닌은 러시아 및 국제노동운동의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연방국가의 창설자로,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혁명가이다. 큰형의 암살로 인해 마르크스 사상에 빠져 이후 마르크스주의 신문 ‘이스크라’ 발행 및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립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이다. 러시아역사의 큰 획을 그은 인물을 직접 본 것만으로도 그 카리스마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레닌 시신의 60%는 밀랍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새로웠다. 또 러시아에서 국가적으로 레닌을 기리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재정적 측면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으로 붉은 광장 못지않게 유동인구가 많은 아르바트거리로 향했다.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한 뒤 젊은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붉은 광장에서 마주했던 분들은 상대적으로 연세가 있으셨다. 그래서 그들의 견해가 한편으로는 자신의 젊음에 대한 추억이자 그리움이기에 다소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상대로 젊은 층의 시각은 조금 달랐다. 러시아 언어 연구소의 교사로 재직 중인 안나(24)는 혁명이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짐에는 동의하지만, 만약 역사가 되풀이 된다면 국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지에 있어서는 확실한 답변을 주지 못하겠다고 했다. 국민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용기를 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점에서였다. 그녀는 사회를 사과에 비유하여 혁명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사과의 일부가 썩었다고 해서 사과 전체를 버리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고 하였다. 그리고 썩은 일부를 도려내기 위해서는 전체의 아픔과 고통이 뒤따른다고 하였다. 혁명 및 사회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로서 찬성과 반대 그 어떤 관점에도 완벽히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전했다. 설문지를 만들 때 혁명의 ‘결과’에 초점을 두는 바람에 혁명의 ‘과정’에서 발생한 고통들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말하는 혁명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러시아 근현대사 박물관에 가던 길에 혁명광장역으로 이동했다. 다행히도 새로 잡은 숙소는 시내에 위치해있어 주요 탐사지로 이동하기에 편리했다. 둘째 날에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첫날의 여파가 있었기 때문에 기차에서 쉰다는 생각으로 서둘렀다. 혁명광장역에는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의 동상이 있다. 이곳에는 노동자들의 동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혁명 당시 노동자들을 기리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개 동상의 콧등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하철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쁜 와중에도 코를 문지르며 한걸음 쉬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의 콧등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근현대사 박물관에서는 제정 러시아부터 러시아 혁명,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러시아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중에서 우리는 제정 러시아 말미부터 러시아 혁명의 전시를 관람하는 데에 주로 시간을 보냈는데 탐사 일정 전체를 되돌아보았을 때 이 박물관에서 탐사 주제와 관련된 여러 전시물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당시 군인들의 모습, 사회주의 포스터와 사진들을 보며 그 시대의 사회 분위기를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또한 오로라 전함 모형과 같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계획한 탐사일정과 관련된 자료들을 보며 우리의 탐사주제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세계사의 어느 시기와 맞물리는 전시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후 주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붉은 광장의 야경을 감상하였다. 모스크바 첫째 날에 견학하지 못한 장소들까지 넣어 둘째 날을 보냈기 때문에 붉은 광장의 광활함과 아름다움을 느껴볼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드넓은 공간에서 누군가는 연설을 하고, 또 누군가는 그 연설을 듣기위해 모여 있었을 상상을 하며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였고 다음날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5일 차 - МОСКВА-->САНКТ-ПЕТЕРБУРГ
모스크바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었던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하기 전 남은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맡겨둔 뒤 키예프스카야 역에 들려 혁명과 관련된 벽화 및 작품들을 감상하였다. 모스크바 지하철은 서울의 지하철과 다르게 예술 작품들이 넘쳐흐른다. 벽화는 물론이거니와 동상, 장식유리로 각각의 개성을 자랑한다. 사전조사에 따라 방문한 키예프스카야 역에는 혁명 당시 연설하는 레닌과 혁명 동지, 병사, 민중의 모습이 곳곳에 걸려있으며 레닌의 초상 또한 존재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러시아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적 인물을 기념하고 있는지를 보며 국경일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가 부끄러웠다. 무엇을 기리는 날인지 조차 잊어가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다르게 일상생활에서 잠시나마 역사를 접할 수 있도록 기념하고 있는 모습이 바람직해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1월 22일~ 1월 24일)
10살에 왕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의 꿈을 실현시킨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북방의 베니스’, ‘유럽을 향한 창’ 다양한 별칭을 가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러시아를 보여주는 곳이다.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이 그러하듯 우리가 도착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첫인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잿빛 하늘에 진눈깨비, 질척이는 바닥, 심지어는 암울해보이기까지 했다. 기차로 이동한 탓에 시간이 꽤 소요되었기 때문에 박물관이나 성당을 탐사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위치 및 개방시간을 확인하고자 숙소에서 가까운 이삭성당과 겨울궁전을 들리기로 하였다. 먼저 넵스키대로에서 멀지않은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한 후 겨울궁전으로 갔다. 겨울 궁전은 러시아 혁명의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삶이 고달픈 노동자들은 가뽄이라는 신부의 주도 하에 황제에게 탄원을 하고자 동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는 그곳에 없었고, 그의 부하들이 시위대에게 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시위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하얗던 광장은 피로 물들었다. 이 동궁 광장 앞에 서 있으니 역사적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6일 차 -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다음 날인 23일 아침, 청동기마상이 있는 광장을 거쳐 가장 멀리 떨어진 핀란드역과 오로라 전함을 향했다. 성 이삭 성당 앞쪽으로 가면 볼 수 있는 광장의 중심에는 표트르 대제의 청동기마상이 서있다. 이곳을 지나 향한 곳은 핀란드 역이다. 핀란드 역은 레닌이 스위스에서 ‘봉인열차’를 타고 도착한 곳으로, 실제로 그가 타고 온 기차가 전시되어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의 역명을 지을 때 목적지 기준으로 지어지기 때문에 핀란드 역이라는 점이다. 레닌과 관련된 장소를 보여주는 것처럼 핀란드역 앞 광장에는 레닌의 동상이 서있었다. 당황스러운 기억으론 팀원 모두가 몇 번이고 역사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열차는커녕 레닌과 관련된 팻말하나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직원과 청원경찰에게 몇 번이나 물어서야 승강장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분들께 따로 부탁해서야 봉인열차를 마주할 수 있었다. 293 번호를 단 열차를 타던 해, 1917년 레닌은 취리히에서 난민신분이었다. 전쟁과 민생고에 지친 노동자와 군인들이 니콜라이 2세를 몰아냈고 이 열차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해 7월 그는 다시 핀란드로 도피하지만 이내 돌아와 임시정부 타도를 선포하고 소비에트 의장이 된다.
핀란드 역을 뒤로하고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을 알린 순양함 오로라호로 발길을 돌렸다. 오로라호는 러일전쟁에 참가했다가 살아남은 순양함으로 1917년 황제가 살던 궁을 향해 포를 발사하여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오로라호를 보고 있자니 모스크바 근현대사 박물관에서 오로라호의 모형과 러일전쟁과 관련된 지도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궃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갑판 위에는 해군이 함대를 지키고 있었다.
넵스키 대로로 돌아가던 길에 스몰늬 학원을 들렀다. 이곳은 레닌이 볼셰비키 국가의 탄생을 선포한 곳이자 볼셰비키의 본부로 레닌이 지위를 확립한 이후 정부소재지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다. 당초 여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학교였는데, 마침 이곳이 방학 중이어서 혁명의 거점으로 삼게되었다. 스몰니 학원은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기기 전, 1918 년 3월까지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내부에 레닌이 사용했던 의자, 책상 등이 남아있는 집무실과 다른 방들이 박물관으로 있는데 이는 혁명에 바쳐진 기념관 중 아직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있는 드문 예 중 하나이다. 현재 스몰니 학원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런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건물내부를 견학할 수 없었다. 레닌이 실제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는 근무실을 방문 할 수 있다는 것에 기대를 걸었었지만 이 바람은 프스코프 레닌박물관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마침내 넵스키로 돌아와 점심을 해결하며 잠시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모스크바와 다르게 날씨가 좋지 않아 여기서 발생하는 체력 소모도 컸고 탐사 장소들이 제각각 떨어져있어 이동 경로가 길었다. 다음 탐사장소는 푸틸로프 공장이었다. 현제 키로프 공장으로 명칭이 바뀌어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거리인 넵스키로부터는 한참 외곽지역에 떨어져 있었다. 과거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곳의 총파업이 도시 전체의 파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니 공장에서 나오는 노동자 한명 한명의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평화적 가두시위를 하고자 하였지만, 결과는 처참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혁명 당시 이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는 약 1만 2천명이며 기관차를 만들던 곳이라고 사전조사를 했었는데, 실제로 우리가 공장 주변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노동자들이 퇴근을 하고 있었다. 공장 앞에 세워진 안내 자료를 훑어보며 오늘날 기관차뿐 만 아니라 다양한 산업기계, 군수업을 기반으로 함을 알 수 있었다. 혁명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상공업의 90%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런 도시의 노동자들의 파업은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빵을 달라’, ‘전제 타도’와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파업을 시작했고 총파업을 통해 스스로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이끌어냈다.
우리는 이곳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곳의 노동자들 역시 자신의 근무지가 한때 나라를 뒤흔든 발원지라는 사실에 의미를 두고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시내 중심지보단 확연히 삶의 현장의 색이 강했지만 인터뷰에 친히 응해주셨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은 공장 노동자들로 1917년도의 혁명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10월 혁명이후 러시아가 자유, 여성의 지위, 그리고 교육적인 측면에서 보다 나은 국가가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학교에서 혁명에 관해 어떻게 배웠나 라는 질문에는 ‘높은 수준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문구를 강조하셨다. 이 대답에서 모스크바에서 인터뷰한 분들과 같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낸 역사에 대해 자랑스러워함이 느껴졌다. 한 여성 노동자 분은 혁명 당시를 살아 보지 않아서 혁명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며, 당시의 삶과 현재의 삶 중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인지 비교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전했다. 내부를 확인할 순 없었지만 노동자들을 통해 매년 공장 내에서 러시아 혁명을 기념하는 행사가 작게나마 이루어진다고 전해 들었다.
이틀 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시간에 쫓겨 보지 못한 장소들은 26일 일정에 두며 프스코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7일 차 -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ПСКОВ
프스코프(1월 24일~26일)
프스코프는 러시아의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며, 지정학적 측면에서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한다. 러시아연방의 북서쪽 국경지대에 있고 서쪽으로는 발트 3국이 남서쪽으로는 벨라루스가 위치해 있어 예로부터 중요한 군사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중세시대 폴란드와 스웨덴의 침공을 막는 요새 도시로서 위용을 떨쳤었다. 레닌의 동료이자 혁명 운동 가담자였던 판틸레이 레페신스키는 프스코프를 ‘작은 부르주아 동네로 이곳에는 큰 공장도 찾아볼 수가 없고 노동자들의 반정부시위나 데모 역시 거의 일어나지 않는 동네이다’라고 평가할 정도 조용한 서쪽 변방의 작은 도시였던 프스코프는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회주의자들의 유배지가 되면서 점차 역사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게 됐다. 레닌이 프스코프에서 3년간 망명생활을 하면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기관지 ‘이스크라’와 마르크스 이론을 다루는 신문 ‘자라야’를 편찬했으며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2월 혁명을 피해 이곳 프스코프로 피신을 왔지만 몰려드는 노동자들에 길이 막혀 결국 자신의 열차에서 제국의 종말을 선언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곳에서 혁명의 초석을 다졌던 레닌의 아파트와 이스크라의 집을 방문해 그 당시 레닌의 생각과 고뇌를 엿보고 흔적을 찾고자 했다.
5시간의 긴 버스 이동을 거쳐 도착한 프스코프는 우리에게 변방의 낙후된 도시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큰 규모의 도시였으며 굉장히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라는 느낌을 주었다. 또한, 군사도시라는 말답게 프스코프로 가는 버스에서부터 시내 곳곳에 러시아 군인들이 존재했다. 계속된 빡빡한 일정 탓에 조원 모두가 지쳐있었고 몇몇 조원들은 피곤이 누적돼 컨디션이 크게 저하됐다. 따라서 우리는 이동일인 오늘은 별다른 일정을 소화하지 않고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탐사 일정 중 가장 친절했던 숙소 주인아주머니는 밝고 유쾌하게 우리를 대해주었다.
8일 차 - ПСКОВ
우리는 숙소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일정을 소화하기로 하고 맨 처음 프스코프 강변에 있는 프스코프 크렘린으로 이동하였다. 수요일 아침 결혼식 혹은 수요 예배를 드리는 날인지 프스코프 크렘린은 꽃다발을 들고 경건한 표정으로 정교회 성당을 들어서는 러시아인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는 이러한 신성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프스코프 정교회의 본산이자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던 크렘린과 프스코프 요새를 천천히 둘러 본 후 다음 일정지로 이동하였다. 레닌 광장과 프스코프 대학교를 천천히 본 후 길을 따라 걸어가니 20세기 초 레닌이 3개월간 망명 생활을 하던 실제 아파트가 나타났다.
실제 아파트의 한 층을 통째로 박물관으로 개조한 레닌 아파트 박물관을 들어서자 박물관 관장님이 우리에게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왔는지에 대해 계속 물어보았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대학생이며 이곳이 레닌이 실제 거주한 아파트라는 사실을 알고 찾아 왔다고 하니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리고 궁금한 게 있으면 자기에게 어떤 질문도 해도 된다고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혁명 잡지 ‘이스크라’와 ‘자랴’를 쓰던 발코니 자리는 들어갈 수 없어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기는 데 만족을 하였다. 박물관은 레닌이 러시아 혁명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또 이곳 프스코프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레닌의 조각상이나 레닌의 말이 새겨진 석판과 더불어 레닌이 살았던 방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해 두어 감회가 새로웠다. 관장님은 평소 지역 학교에서 학생들의 현장 학습 정도로만 찾아왔는데 오늘은 먼 타국에서 온 학생들이 레닌에 대해 알고 싶어 박물관을 찾아온 것에 많이 기뻐하였다.
우리는 관장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로, 혁명이 당시 배고픈 민중의 외침이자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듣고자 했다. 이에 대해 관장님은 “혁명 당시 배고픈 민중의 외침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러일전쟁 등으로 인해 사회전체가 이미 폐허가 되고 병든 상태였다. 단순한 삶의 고달픔보다는 폐허가 된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의 소리였을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로,레닌이 프스코프 지역에서 3개월간 머물었던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레닌이 이곳을 기점으로 혁명 활동을 한 것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프스코프주 차원에서 많은 지원과 레닌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는 데 도움을 주어 박물관을 건립할 수 있었다고 대답했다.
이후 추가적인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다음 레닌이 프스코프에서 머물면서 사회주의 정당지인 ‘이스크라’와 ‘자라야’를 편찬했던 잡지 출판서 ‘이스크라의 집’으로 이동하고자 주소지를 물었다. 이곳 ‘이스크라의 집‘에서 레닌은 ‘이스크라’와 ‘자라야’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규합해 사회민주노동당을 만들고자 했고 러시아 지식인들을 혁명 운동에 포섭하고자 하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곳이 레닌이 러시아 혁명의 초석을 닦았으며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이 중추적인 역할을 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스크라의 집이 현재 내부 공사와 외부 전경 정비에 들어가 관람을 할 수 없다는 레닌 아파트 박물관 관장님의 말을 듣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프스코프역으로 이동하였다.
1917년 3월 300년간 러시아를 지배해왔던 로마노프의 짜르 니콜라이 2세는 2월 혁명을 피해 프스코프로 도망쳐 왔다. 하지만 몰려든 군중들과 노동자들의 시위에 기차는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고 주변의 권유에 따라 니콜라이 2세는 이곳 프스코프 역에서 퇴위를 선언하고 그 성명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현재에는 이 역사적인 장소에 그때 당시의 사건들과 그 기록을 간략히 적은 동판만이 조촐하게 역 한쪽 벽면에 현판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는 프스코프까지 오는 긴 여정 동안 많은 사람과 혁명에 관해서 얘기했고 때로는 논쟁도 펼쳤다. 러시아의 젊은 세대들은 큰 혼란과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불러오는 혁명을 꺼린다고 말하였고, 반대로 우리는 사회가 이미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혼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전하기도 하였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을 발견하며 서로의 의견을 이해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앞으로 한국과 러시아, 양국의 역사와 문화의 교류를 확대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후대에 우리가 혁명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 이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것은 잠시 접어둔 채, 혁명 당시 프스코프역에 서 있던 러시아의 군중들과 노동자들은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과 혁명의 마침 점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프스코프의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9일 차 - ПСКОВ-->САНКТ-ПЕТЕРБУРГ
상트페테르부르크(1월 26일~27일)
프스코프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놓치고 최대한 빨리 새 버스를 잡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오후 3-4시 경,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것이 사실이지만 ‘Это Россия!(이게 러시아지!)’의 의미로 웃어 넘기곤 일정을 시작했다. 다시 돌아온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여전히 그 모습, 그 분위기 그대로였다. 앞선 탐사때 시간관계상 견학하기 못한 겨울궁전이 남아있었으므로 외관만 보던 곳의 내부로 향했다. 겉으로 보이는 웅장함만큼이나 내부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이었고 러시아 혁명뿐만 아니라 역사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 인물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에 큰 건물이기 때문에 모두 세세히 관람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이곳에서 탐사주제와 관련된 것 뿐 만아니라 다른 예술작품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다.
숙소로 돌아와 탐사 마무리를 하였다. 우선 세계사적 전환점이었다고 평가되는 1917년 10월 혁명의 현재적 의미를 우리는 과연 찾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인터뷰를 진행하고, 혁명의 유적지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느낀 바를 서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시간을 가졌다. 우선 레닌의 혁명은 볼쉐비키가 일으킨 무장 쿠데타였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이상에서 시작된 혁명이었지만 소수였던 멘쉐비키의 의견을 묵살한 채 이루어졌기에 이미 모순을 안고 시작되었고, 그 모순은 적군과 백군이라는 분열을 낳았다. 이 의견에 모두가 동의했다. 다음으로 막스는 역사의 5단계론을 제시했고, 이 이론에 입각했을 때 러시아 혁명은 역사의 합법칙성에 따른 필연의 결과물이었다는 점이다. 노동자와 농민의 힘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던 소비에트 시기의 사회주의는 근대화의 또 다른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러시아 땅에서 활동하던 조선의 독립운동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한 러시아 혁명의 현재적 의미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라는 냉전 진영의 논리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지배 사회가 타개되고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이상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아직까지도 유의미하다. 당시의 이상이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졌기에 모순이 많았던 혁명이었지만, 결국 인간은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발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러시아 혁명의 현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10일 차 - САНКТ-ПЕТЕРБУРГ-->한국
마지막으로 영수증 점검 및 귀국 일정을 재검토 한 뒤 한국으로 향할 채비를 마쳤다. 돌아오는 순간까지 화창한 적 없었던 러시아였지만, 11일간의 탐사가 우리에게 준 역사적 시사점과 값진 경험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과 기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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