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4기] [유라시아] - 누리 팀 (1) [동상(同床)이몽: 동상(銅像)으로 꿈꾸는 유라시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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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로컬리티센터 | Date | 17-11-06 11:21 | Read | 1,478 |
본문
탐사테마
오늘날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다양한 동상들이 공원, 광장 등 일상적인 공간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교환학생 시절, 한국인인 우리에게 이러한 동상문화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동상을 세우는 것이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가 아니며, 우리나라의 공원이나 집 주변에서 동상을 많이 접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 하나의 이유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중앙아시아 전공자로서, 이슬람을 종교적 바탕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동상 문화가 정착한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질감은 종교적 이유를 넘어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동상 문화가 중앙아시아 지역의 전통 문화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 여행에서 힌트를 얻어 이러한 문화가 중앙아시아 지역에 들어오게 된 계기를 중앙아시아의 소비에트 연방 체제 편입으로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냉전시기 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은 그레이트 게임(러시아 어로는 турнир теней)이라고 불리는 영국과 러시아 간 패권 다툼의 대상이 되었을 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에도 이 지역을 둘러싼 각 국의 전략적 경쟁이 신 그레이트 게임(The New Great Game)이라는 정치적 이해관계로 표현되면서 이 지역의 중요성은 계속해서 커지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개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탐사에서 다룰 중앙아시아 지역은 소비에트 연방의 공화국이었던 5개의 국가(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를 포함하는 협의적 개념으로 한정됩니다. 이 국가들은 소비에트 연방 체제로부터 독립 25주년을 맞았지만, 아직 그 체제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으며, 현재에도 CIS(독립 국가 연합)와 같은 협력 하에 정치 경제, 사회의 다방면에서 러시아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 전반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소비에트 시기 이전부터 시작되어 온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연결성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누리 팀의 조사는 이러한 연결성에 초점을 두고 그 연결고리로서 동상을 선정하였습니다.
동상은 단순한 예술적 가치 그 이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상은 조형 미술의 한 분야이지만 그 제작 목적이나 효과는 예술성이라기보다는 정치나 역사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은 그들이 점령한 정복지 곳곳에 자신을 형상화한 조각상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예술적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위엄을 과시하고 이를 통해 정복지 시민들을 통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민들은 도시 곳곳에 설치된 동상을 바라보거나 지나치면서 동상의 외형적 조형미를 감상하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 속에 녹아 있는 함축된 과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상은 제작된 배경에 대한 역사를 담고 있고 그 형상화된 인물을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동상을 살펴보는 것은 비단 그 동상의 외적인 측면만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당시의 사회와 생각을 바라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탐사목표
2017년은 한-중앙아시아 수교 2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동안 중앙아시아는 한국에서는 많이 생소한 지역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와 우리나라는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를 비롯하여 역사적으로도 깊은 관련이 있으며 언어와 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는 실크로드로 상징되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하며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위치해있고, 최근에는 다양한 광물 자원과 풍부한 석유, 천연가스를 바탕으로 신흥 경제국으로서의 발전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지역에 대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지금, 그동안 저평가되어 왔던 중앙아시아 지역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역사적으로 동서양 교류의 현장이었고, 그 증거로 현재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얼굴에는 동양인과 서양인의 모습이 공존합니다. 그만큼 중앙아시아는 다양한 민족의 무대이자 터전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이전까지의 중앙아시아에는 이렇게 다양한 민족들에 대한 인식은 있었지만 이들을 명확히 구분 짓는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 경계와 국가라는 개념도 부족했습니다. 이러한 지역에 근대적 국가의 개념을 도입하고 인위적이긴 하지만 민족에 따라 경계를 획정하여 각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은 다름 아닌 소비에트 연방의 주도 하에 의해서였습니다. 비록 이 시기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관계는 지배와 예속의 개념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속에서도 분명 상호작용을 하며 끊임없는 교류가 이어져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양 지역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여 정치 경제와 같은 다방면에서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 지역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과 러시아와의 관계에 주목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 누리 팀은 특히, ‘중앙아시아의 동상 문화는 소비에트 연방 체제의 산물’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동상이라는 거울을 통해 중앙아시아 지역과 러시아의 과거를 비추어보고자 합니다. 동상의 나라라고 불리는 러시아는 거리를 걷다 보면 골목마다 동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동상들을 세워왔고 이렇게 세워진 동상들은 오늘날 그 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많은 역사적 의미와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소비에트 시기 중앙아시아로 유입되어 또한 많은 동상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동상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당시의 역사와 배경은 두 지역의 관계를 학습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단순히 과거를 살펴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과거의 연결고리를 통해 현재 두 지역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지를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Carr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언급했듯이,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사실 인식이 아니라 그 연장선에서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전개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저희 팀은 앞서 언급한대로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상들의 기원에 의문을 갖고 중앙아시아 동상 문화의 출발점을 러시아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를 탐사 지역으로 선정하고, 블라디보스토크,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의 주요 도시에서 다양한 동상들을 직접 살펴보며 러시아의 동상 문화를 중앙아시아와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러시아의 동상 문화가 들어오게 되었는지, 중앙아시아의 동상들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도 살펴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당시 사회주의라는 공통된 이념 하에서 중앙아시아 지역과 러시아 사이에 어떠한 정신적, 문화적 가치의 공유와 교류가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방향으로 탐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2015년 EEU(유라시아 경제 연합)의 출범으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상호 협력은 점차 극대화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같이 유라시아 지역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전략적으로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연구 자료나 성과가 미비한 실정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제 유라시아 지역의 현장을 탐사하는 것은 이 지역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앉아서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학습 방식을 넘어 두 지역의 현지인들의 생각과 인식은 실제로 어떠한 지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탐사내용
2017. 7. 4 러시아여행 1일차 – 블라디보스토크 첫째 날
우리 누리 팀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오후 1시 5분 비행기로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도착지인 블라디보스토크로의 첫발을 내딛었다. 비행기에서 간단하게 제공되는 러시아 식 흑빵(черный хлеб) 이 들어간 샌드위치는 우리가 정말 러시아로 가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우리는 현지시각 오후 3시 50분, 한국보다 한 시간이 빠른 시차를 고려했을 때 두 시간도 안 되어 도착했는데 러시아 국적의 항공기를 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나라 국적의 대한항공을 이용하면 북한 영해를 피해 중국으로 우회하는데 비해 러시아 국적의 항공기는 북한 영해를 바로 가로지르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 빠르게 도착이 가능하다.
우리 팀이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찾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행기간 내내 사업단과 언제든지 연락이 가능하도록 러시아 현지의 유심을 구매하는 일이었다. 러시아는 워낙 국토가 광활하여 유심이 러시아 전역에서 사용가능한 것도 있고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우리는 이어질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을 위해 러시아 전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심을 구매했다. 유심 장착 후 우리는 여행 전 미리 조사하여 설치했던 콜택시 어플을 통해 택시를 불렀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은 시내와 거리가 있는 편이기 때문에 택시를 많이 이용하는데 콜택시 어플을 사용하면 바가지를 쓰지 않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택시를 탈 수 있다. 다행히 우리는 유쾌하고 친절한 알렉산드르라는 이름의 기사님을 만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여러 명소들을 추천받았다. 택시를 타고 바라보는 블라디보스토크는 날씨가 좋은 탓에 유난히 하늘이 낮고 푸르렀다. 블라디보스토크를 흔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고들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느낌이 혼재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외양이나 다채로운 건물 색들은 분명 유럽의 느낌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길거리 간판들의 모습과 배치, 과일들을 늘어놓고 파는 행상들의 모습들이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전경을 떠올리게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우리의 탐사 주제인 동상이 눈에 띄었는데, 기사님에게 여쭤보니 블라디보스토크의 심볼인 ‘호랑이‘ 상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여행의 시작부터 우리의 탐사주제를 만나게 되니 탐사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친절한 기사님은 숙소로 가는 길에 블라디보스토크 전경을 훤히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며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다 주셨는데 그 곳은 우리의 여정 중 하나였던 독수리 전망대였다. 독수리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경치는 정말 예술이었다. 멀리 보이는 루스키 섬과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잇는 금각교와 노을이 비치면 금빛으로 빛난다는 금각만의 극동의 바다는 방금까지 블라디보스토크가 중앙아시아와 비슷하다고 여겼던 우리의 감상을 부정이라도 하는 듯 탁 트여 있었다. 실컷 바다를 감상하고 나니 바다가 바로 보이는 맞은편에 위치한 키릴 형제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슬라브권에 기독교를 전파하여 동유럽과 러시아 등지를 기독교화 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일부에서는 이 형제들이 슬라브족의 교화를 위해 키릴 문자를 창안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들의 한쪽 손에는 십자가, 다른 손에는 키릴 문자가 적혀진 책이 쥐어져 있었다. 이들의 손에서 탄생했을 키릴문자를 슬라브권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사용하고 있고, 또 한국인인 우리가 배우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러다 문득 왜 하필 이곳에 동상이 있는 지 궁금해졌다. 현지 분에게 여쭤보니 러시아에서는 특정 공간을 조성할 때 가장 많이 설치하는 것이 동상이라고 하셨다. 키릴 형제는 슬라브 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에 그 존재 자체로 슬라브와 러시아 문화를 상징한다. 극동의 바다가 훤히 보이는 이곳에 키릴 형제의 동상을 설치한 것은 슬라브와 러시아 문화가 극동 지방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길 바라는 러시아의 염원이 아니었을까. 블라디보스토크의 지명이 ‘동방을 지배하라’는 의미임을 생각해 볼 때 완전히 억지스러운 추측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한 숙소에서 체크인을 하면서 이 친절한 기사님과는 아쉬운 헤어짐을 했다. 저녁을 먹을 겸 해양공원으로 향했다. 우리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던 해양공원에서는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킹크랩과 곰새우를 한국보다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었다. 차가운 바다에 살아서인지 살이 탱탱하고 쫄깃한 킹크랩과 곰새우는 정말 꿀맛이었다. 신기한 것은 해산물과 더불어 중앙아시아의 음식인 샤슬릭을 이곳에서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알고 보니 러시아 사람들도 샤슬릭을 즐겨먹는다고 한다. 이러한 사소한 점 하나하나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긴밀한 교류를 보여주는 듯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징이라는 호랑이 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랑이 상에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위엄 있는 호랑이의 모습이라기엔 외양이 너무 귀여웠다. 우리는 아이들이 주변에서 뛰어놀고 서스럼 없이 동상 위에 올라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며 동상이 러시아 인들의 일상 속에 익숙한 조형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곳곳에 설치된 호랑이 상은 마치 우리가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도시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동상은 때로 지역 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물론 동상만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동상이 하나의 랜드 마크로서 그 지역의 역사를 반영하기도 한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7.5 러시아여행 2일차 – 블라디보스토크 둘째 날
일정 둘째 날 아침, 우리는 아침 식사로 러시아의 전통 음식 중 하나인 블린을 선택했다. 얇게 편 밀가루 반죽에 원하는 재료를 넣어먹는 블린은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아 아침으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날씨는 예상보다 무척 무더웠기 때문에 우리는 아르바트 거리를 탐방하기 전에 해양공원 주변의 카페에서 잠시 열기를 식히기로 했다. 날씨가 더운 탓에 우리는 주스와 에이드 같은 차가운 음료를 주문했다. 그런데 막상 음료가 나와 맛을 보니 시원한 맛이 부족하게 느껴져 얼음을 주문하자 우리를 유난스럽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러시아 사람들도 음료를 크게 차갑게 해서 먹는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한여름에도 음료를 마실 때 얼음을 넣지 않고 미지근한 채로 마시는 편인데, 이렇게 또 하나의 사소한 점에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가 겹쳐 보였다.
카페를 나와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르바트 거리로 향했다. 아르바트 거리는 본래 블라디보스토크를 러시아로 영구 편입시키는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뒤 한동안 베이징 거리라고 불렸지만 그 분위기가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그 이름을 따라 아르바트 거리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내에 위치한 중심가로 유동인구가 많은 편이다. 한낮의 아르바트 거리는 빛을 받아 매우 아름다웠다. 건축 양식이라던가 정중앙에 분수가 있는 모습, 그리고 거리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마치 유럽을 연상시켰다. 아르바트 거리에는 많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골목 골목마다 동상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황금으로 빛나는 여인의 동상부터 러일전쟁의 영웅 마카로프 제독의 동상까지 다양한 형태와 인물의 동상이 있었는데 개중에는 아무런 이름도 없고 설명도 없는 동상도 있었다. 러시아 인들은 익숙한 지 동상들을 그냥 지나치고 관광객들만이 관심을 보이는 듯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러시아의 동상 하면 보통 체제를 선전하는 정치적 목적이 있거나 특정 공간을 기념하기 위해 많이 설치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니다보니 단순한 조형 예술로서의 동상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저녁 즈음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큰 정교회 사원이라는 포크롭스키 정교회 사원을 찾아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크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크다’라는 느낌보다는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었다. 러시아 여행이 처음인 우리로서는 러시아 정교회 사원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봐오던 카톨릭이나 개신교 교회와는 다른 느낌이 있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머리카락을 스카프로 가리고 사원 내로 입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 정교회 사원에는 의자가 없어 앉아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서서 기도를 올리는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관광객들과 뒤엉킨 신도들이 어수선한 느낌도 있었다. 특히 우리가 주목했던 점은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성상을 세우는 대신 이콘이라는 성화가 교리를 묘사하고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한다. 일반 거리에는 동상이 이렇게나 많은 데 막상 교회 내에서는 흔한 종교 상 하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는 산책 겸 숙소 근처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으로 향했다. 많은 여행인들이 꿈꾸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작점인 이곳은 동시에 우리나라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곳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독립 거점이자 한인 강제 이주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연해주 내에서 가장 큰 항일운동 본거지였던 신한촌이 있었고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왕래가 잦았다. 특히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의거를 앞두고 그는 어떤 심정으로 이곳에 서있었을까. 그의 노력으로 되찾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이곳에 서있으니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이곳에서 기차를 탄 것은 독립운동가들 뿐만이 아니었다. 신한촌을 중심으로 이곳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연고도 없는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 긴 여정의 시작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슬픈 역사에 대한 회상을 뒤로 하고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맞은편에 위치한 레닌 동상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레닌은 스탈린과 달리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난 뒤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동상이 철거되지 않았고 비교적 아직까지 중앙아시아에서도 동상이나 거리 이름 등에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스탈린이 러시아 인들의 기억 속에 독재와 강압적인 통치로 남아있다면 레닌의 동상이 남아있다는 것은 러시아가 그 혁명 정신과 사회주의의 취지를 자신들의 역사로 기억하면서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정체성의 표현이었다. 레닌의 손가락이 극동의 바다 너머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은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 시점에서 어쩌면 허망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겠지만 우리의 눈에는 강성했던 러시아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러시아 인들의 의지로 보였다.
7.6 러시아여행 3일차 – 블라디보스토크 셋째 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는 혁명광장을 찾았다. 이곳은 구소련을 위해 목숨 받쳐 혁명을 일으키다 희생한 군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광장으로, 광장의 중심에는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을 기념하는 동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들은 2월 혁명으로 300년간 이어져 내려오던 로마노프 왕조를 몰아내고 이후 들어선 임시 정부가 민중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자 10월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주역들이다. 비록 사회주의가 지금은 실패한 이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뜨겁게 투쟁한 이들의 정신만은 실패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혁명광장을 지나 걷다 보면 소련 정부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다는 개선문과 2차 세계 대전 당시 실제 전투에 사용되었던 잠수함 내부를 개조해 만든 박물관, 전쟁 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꺼지지 않는 불꽃과 부조들이 한데 모여 있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떠올리던 우리는 거대하기보다는 아기자기한 개선문을 보며 저마다 소원을 하나 씩 빌었다. 개선문을 통과하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개선문에는 비운의 니콜라스 2세의 얼굴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징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다. 니콜라스 2세의 블라디보스토크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개선문다웠다. 우리는 개선문 뒤쪽에 위치한 정교회 사원을 간단하게 살펴본 뒤 용사들의 부조 쪽으로 향했다. 나라를 위해 싸운 전사들의 모습이 생동감 넘치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그들을 기리기 위해 365일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카자흐스탄을 떠올렸다. 알마티 중심부에 있는 판필로프 공원에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으로부터 전사한 판필로프 장군과 28인의 부하들의 모습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이들을 기리기 위한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자리해있다. 당시 카자흐스탄이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어 있었던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이렇게 그들을 동상으로 새기고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추모하는 것은 러시아로부터 중앙아시아로 이식된 문화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앞으로는 이들처럼 안타깝게 피 흘리는 일이 없도록 평화가 잘 지켜지기를 빌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군사도시답게 각종 군사시설들과 기념비를 찾아 볼 수 있었는데 러시아 해군의 극동 사령부를 비롯해 군항에는 해군 함정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었던 것은 한국 해군의 방문 기념비였는데, 역시 우리나라는 동상보다는 기념비를 세우는 문화가 더 익숙한 것 같다. 3.1운동의 80주년을 맞아 신한촌에 세워진 ‘신한촌 기념비‘,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주립 의과대학 앞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기념비처럼 우리나라는 기념비를 많이 세우는 반면 러시아에서는 쿠제네초프 흉상이나 솔제니친 동상의 경우처럼 동상을 통해 그 사람을 기리고 기억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솔제니친의 경우 스탈린에 대한 비판과 소련의 인권 탄압 등에 대한 고발로 탄압을 받았으며,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에도 보리스 옐친 행정부를 비판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으나, 2015년 블라디보스토크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는 현재 이 시점에서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동상은 단지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에 행했던 업적을 기리는 도구일 뿐만 아니다. 그 속에는 오늘날 사람들이 그 인물과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관한 평가가 담겨있다. 만약 오늘날까지 소비에트 연방 체제가 이어져왔다면 그 체제에 대해 반기를 든 솔제니친의 동상이 세워질 수 있었을까? 지금 세워져 있는 동상 또한 그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진다면 언제든지 철거될 수 있을 것이다.
7.7 러시아여행 4일차 – 모스크바 첫째 날
드디어 블라디보스토크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우리는 아쉽지만 다시 방문할 날을 기약하며 오후 12시 비행기로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로 떠났다. 현지 시각 오후 2시에 모스크바 브누코보 공항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는 세레메티예보, 도모데노보, 브누코보 3개의 국제 공항이 있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러시아 동부 방면의 국내선이 주로 발착하는 브누코보 공항을 이용하게 되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아에로익스프레스라는 이름의 공항철도가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는 지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7시간의 시차와 큰 기온차를 보여 세계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는 러시아의 방대함을 한 번 더 체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숙소에 도착해 휴식을 취한 후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르바트 거리로 나섰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는 블라디보스토크보다 훨씬 넓었지만 비가 와서 어딘가 모르게 차분한 느낌이었다. 유럽풍의 파스텔 톤 건물들이 비슷한 인상을 주었는데 수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모여 살던 거리에서 한때는 귀족들의 고급 주택가로, 그리고 지금은 모스크바 예술과 문화를 상징하는 거리로 그 역사가 다양한 아르바트 거리는 아무래도 수도이다 보니 스타벅스나 쉑쉑버거와 같은 글로벌 프랜차이즈가 많이 위치해있었고 아나톨리 리바코프 동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인물들의 동상들도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많이 볼 수 있어다.
조금 걷다보니 아르바트 거리 초입에 위치한 밝은 민트색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문장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푸쉬킨의 신혼집이었다. 러시아 문학의 모든 유파가 푸쉬킨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정도로 러시아 인들에게 푸쉬킨은 특별한 존재이다. 우리나라 식 표현으로 하면 국민작가 쯤 될까. 그는 전제 정치에 대항하는 여러 문구들로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성장한 작가이다. 그러나 푸쉬킨하면 그 작품만큼이나 흥미로운 러브스토리로도 유명하다. 당대 최고의 미녀였던 나탈리아에게 반해 네 번의 청혼 끝에 결혼에 성공한 푸쉬킨은 결혼 후에도 끊임없는 아내의 스캔들에 시달렸다고 한다. 결국 아내의 불륜을 고발하는 투서를 받게 된 푸쉬킨은 아내의 내연남으로 알려진 당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게 되고 그 결투로 인해 총상을 입어 죽게 된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다. 그 러브스토리를 상징하듯 푸쉬킨의 신혼집 맞은편에는 푸쉬킨과 그의 아내 나탈리아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젠가 기쁨의 날이 올 것이라 노래했던 그는 죽는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의 마음이 어땠을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러시아 인들은 그의 죽음을 숭고하게 여기는 듯하다. 오늘날 불륜녀라고도 볼 수 있는 나탈리아의 동상이 푸쉬킨과 여전히 함께인 것은 푸쉬킨이 죽음으로라도 지키고자 한 사랑을 지켜주기 위한 러시아 인들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7.8 러시아여행 5일차 – 모스크바 둘째 날
비가 내리고 강한 바람이 부는 모스크바 날씨 때문에 우리는 단단히 무장을 하고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도무지 7월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날씨였다. 붉은 광장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동상을 전시해놓은 것 같았다. 길목을 돌아설 때마다 동상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대학교 건물 앞에도, 지하철 역 앞에도, 건물의 기둥에도 동상이 있었다. 역시 동상의 나라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힘겹게 도착한 붉은 광장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었다. 원래 러시아어로 ‘붉은’(красная)이라는 단어는 옛날에는 ‘아름다운’이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붉은 광장이라는 말은 사실 단어의 의미가 바뀌면서 생긴 오역이다. 그러나 실제로 본 붉은 광장은 그 이름과 어울리게도 사방이 붉은 건물들로 둘러싸여 정말 아름다웠다. 붉은 광장에는 굼 백화점과 카잔 성당, 국립역사박물관을 비롯해 모스크바의 상징적인 건물인 바실리 성당과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크렘린까지 한데 모여 있었다. 크렘린 앞에는 레닌의 묘가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역대 소련 지도자들의 상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닌의 묘는 공개하는 요일과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었기에 아쉽게도 입장을 하지는 못하였다.
붉은 광장의 초입, 국립역사박물관의 정문 앞에는 이제껏 보았던 동상 중 가장 크고 늠름한 동상이 위치해 있었는데 바로 주코프 장군의 동상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에서 맹활약하여 모스크바를 지켜낸 주코프 장군은 강성했던 러시아의 영광을 나타내듯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사실 주코프 장군은 거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며 스탈린과 이후 정권에게 숙청당하여 정치적 군사적 활동이 제한된 채 말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인들은 주코프 장군을 자랑스러운 전쟁 영웅으로 여기며 그 영광스러운 공로를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장군의 동상은 붉은 광장의 입구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코프 장군의 동상과 멀지 않은 곳에는 전쟁으로 희생된 무명 용사들을 추모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또한 위치해 있었다. 그 앞에 놓인 헌화들과 기도를 올리고 있는 시민들을 보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느꼈지만 러시아는 전쟁 영웅들을 무척이나 예우하고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숙소로 향하는 길에 우리는 레닌 도서관 앞에서 도스토예프스키 동상을 만날 수 있었다. 도서관의 앞에 러시아의 3대 문호 중 하나인 도스토예프스키 동상이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우울하면서도 사색적으로 보였는데 그 모습이야말로 러시아의 ‘위대한 고뇌자‘ 라고 불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잘 표현한 듯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아버지가 살해되고 아들은 일찍 죽었으며, 그 자신은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하고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굴곡진 삶 속에서도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집중했다고 한다. 아마 그의 모든 작품이 소름끼치도록 상세한 주인공의 심리 묘사로 인간의 내면을 비추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볼 수 있는 사색에 잠긴 표정은 문학가라기보다는 철학자에 가까워보였으며,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의 동상을 마주보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도스토예프스키는 한때 존재했었던 과거가 아니라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내면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현재이자 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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