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cality Challenge

해외탐사 프로그램 ‘Locality Challenge’

백문불여일견이라는 말, 알고 계십니까? ‘Locality Challenge’는 자신이 공부하는 지역을 직접 탐사하는 해외탐사 프로그램입니다.

참여하는 학생들은 탐사지역에 관해 인문·지역학적 탐구과정을 실시해 계획을 수립·발전시키고, 각 지역의 지역학적 효용가치를 재발견하며 도전정신을 배양하게 됩니다.

‘Locality Challenge’를 통해 학생들은 인터넷과 책에서만 보던 지역을 눈으로 직접 보고 피부로 느낄 수 있으며, 광역특화전공 내 4가지 트랙의 오지성 지역을 팀원들과 함께 구석구석 탐사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됩니다.

Title [2기] [인도 남아시아] - YOUNG Idiots 팀
Writer 로컬리티센터 Date 16-03-25 15:26 Read 2,874

본문

탐사테마

 

YOUNG Idiots 팀의 탐사주제는 ‘인도 건축물의 색을 통해서 본 역사와 종교 그리고 문화의 다양성탐구’ 이다. 인도라는 나라를 생각해보면 가장 먼저 수많은 인구, 그리고 이름을 다 외우지도 못할 것만 같은 수많은 신들 그리고 독특하고 다양한 수많은 향신료의 향들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이처럼 인도라는 나라는 ‘하나의’, ‘특정한’ 어떤 것이 떠오르기보다 ‘수많은’, ‘다양한’ 과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를 만큼 많은 문화들을 가지고 있다.

‘색깔’ 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색이라고 하면 태극무늬의 빨간색과 파란색, 혹은 백의민족에서 비롯된 흰색을 떠올릴 수 있고, 인도 못지않게 많은 인구와 다양한 문화를 자랑하는 이웃나라 중국만 해도 빨간색이 가장 먼저 생각 날 것이다. 하지만 인도라는 나라를 떠올렸을 때 한 가지 색을 머릿속에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이들을 대표하는 문화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 라고 생각하기에 인도는 4대 문명 중에서 하나인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이고 수많은 종교와 역사, 문화를 포함하여 현대에는 볼리우드라는 영화산업까지 장악하고 있는 국가이다. 인도가 대표하는 색을 떠올리기 쉽지 않은 까닭은 이들을 하나의 색으로 표현하기에 불가능할 만큼 다양한 ‘다양성’이 이들의 문화적 특징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이들의 문화적 다양성을 그들의 문화만큼이나 다양한 ‘색깔’에서 찾기로 했다. ‘색깔’이라는 것은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우리가 가장 먼저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특징이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문화를 가진 인도에서 잘 알려진 타지마할, 그리고 핑크시티, 블루시티가 특정한 색으로 알려진 이유와 그 역사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요소가 ‘의식주’라고 알려져 있는 만큼 우리 삶에서 ‘주’에 해당하는 집, 즉 건축물은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옷을 입고, 음식을 먹고, 건축물을 탐사한다면 이들의 모든 문화를 체험하고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역시 이러한 테마와 주제를 선정하는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한다. 

 

 

탐사목표

 

‘인도 건축물의 색을 통해서 본 역사와 종교 그리고 문화의 다양성탐구’라는 주제 아래 대표적인 색깔을 담고 있는 건축물을 방문하고 이에 담긴 역사, 종교, 문화 등에 대해서 학습하는 것이 본 탐사의 주된 목표이었다. 이에 따라 각각 색깔로 대표되어지는 뉴델리, 아그라, 자이푸르, 조드푸르라는 4개의 도시를 지정하고 이에 걸맞게 대표적인 건축물을 위주로 탐사 일정을 계획하였다.

탐사 이전에 스터디 리포트를 작성하고, 사전에 탐사 지역에 대해서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기존에 탐사 목표로 생각했었던 기본적인 인도의 역사나 종교, 신화, 건축 그리고 다양한 문화적 사실들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사전 조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탐사 지역과 주제에 대한 정보들을 최대한 조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탐사 지역에서는 현지에서 구하고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을 위주로 탐사를 시행하고자 목표를 다소 수정하였다.

비행기 결항으로 인하여 처음 방문지역인 뉴델리 에 대한 탐사시간이 다소 부족하기도 하고 전체적인 탐사 일정이 다소 크게 변화하기도 하였지만, 최대한 탐사내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단기간에 탐사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하였다. 이에 따라 본래 계획하였던 대로 각각의 색으로 대표되는 건축물을 찾아다니며 사전조사를 통해 얻었던 정보들을 바탕으로 건축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주변 가이드나 현지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자료조사를 통해 얻지 못했던 건축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들을 얻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더불어, 건축물에 대한 단순한 탐구에 그치지 않고 좀 더 현지인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하고 인도인들의 생각에 대해 탐구하기 위하여 각 지역에서 인터뷰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뉴델리와 아그라 지역에서는 특정한 색으로 대표되는 도시이기보다는 건축물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 건축물에 사용되어진 색깔에 대한 현지인들의 생각과 느낌에 대해서 조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통해 현지인들이 특정 색에 대해 가지는 생각과 느낌에 대해서 탐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색깔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을 인터뷰 하는 것 만으로도 그들의 생각 속에 내재 되어있는 문화적 요소들에 대해서 충분히 탐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리고, 특정한 색으로 대표되어지는 핑크시티 자이푸르와 블루시티 조드푸르에서는 일반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이 특정한 색상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현지 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여, 색깔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에게 색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조사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지역의 역사와 유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이 이러한 전통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아가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어진 시간의 한계로 인해 다수를 상대로 하는 설문조사를 시행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고 느껴지긴 하였지만, 인터뷰를 통해서 현지인들의 생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10여명의 소수의 의견으로 12억이 되는 인도의 전체 인구의 생각을 대변할 수는 없다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적은 인원이라도 직접 접촉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들어본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도록 하였다. 어디까지나 소수의 이야기이겠지만 이들 역시 ‘다양성’을 가진 인도의 문화 속에 일부라고 판단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사전조사 해 온 인도의 다양한 문화를 직접 느끼고 생각해보는 것이 이번 탐사의 주된 목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탐사내용

 

1일차. (01/08)

인도에 향하는 첫 날은 탐사 기간 중 가장 역동적이고 인도에 대한 기대치를 한 층 높여준 날이다. 출발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전원 적절한 수면은 취하지 못했지만 인도를 향한 기대감이 그 것을 충당시켜 주었다. 수속이 조금 늦어져 탑승 시간에 대한 작은 염려가 생겼다. 그래도 아침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돼 샌드위치와 햄버거를 사먹었다. 이렇게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탑승장으로 이동 중에 탑승장 쪽 승무원 분께서 상해 행 비행기의 남은 3명을 찾으며 Last call을 하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듣고 모두 직감적으로 탑승장까지 뛰었다. 게이트가 닫히기 전, 우리는 가까스로 상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느낀 것은 앞으로 절대 촉박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안전과 인도에 대한 탐사에 플러스가 된다는 점을 느꼈다.

델리 행 비행기의 경유지인 중국 상해 푸동공항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여유를 가지고 미리 게이트 앞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게이트가 바뀌어서 수많은 델리 행 인도인들과 대이동을 했다. 1시 45분 출발 비행기라 원래는 1시부터 탑승수속 예정이었다. 하지만 게이트는 열리지 않고 그렇게 기다리다 출발시간마저 넘겨버렸다. 결국 탑승 연기가 아닌 결항이 결정됐고 우리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이 당황하고 놀라서 어떻게 할지 모르고 한 동안 멍했다. 항공 기장의 델리와 중국의 기상악화로 인해 승객을 태울 수 없다는 말에 격분한 인도인들은 날씨 앱을 보여주며 거짓말을 한다고 안내데스크에 화를 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격노하고 있었기에 그들 사이에서 어떤 정보를 모으는 것은 불가능 했다. 우린 데스크에 모여 최대한 상황변화를 지켜보았다. 항공사 관계자가 갑자기 자리를 비워 게이트 앞은 짧은 시간 잠잠해졌다. 이내 곧 항공사 관계자가 찾아와 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 됐고 어째선지 항공사직원은 한 중국인 남성과 중국어로만 얘기할 뿐 인도인들과 영어로 소통해주지 않았다. 인도인들은 왜 간단한 영어문장으로라도 얘기하지 않는 것이냐며 분노가 극에 달했다. 기나긴 설명과 싸움 끝에 중국인 항공사 직원이 이리로 따라오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나갔다. 이에 인도인들은 휘파람을 불며 환호를 외쳤고 인도인들과 동화된 우리는 같이 환호를 외치며 따라 나갔다.

우리는 이 날 탐사지역인 인도에 도착하기도 이전에 조금이나마 인도인들의 특성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인도 영화의 한 편을 보듯 짧은 시간동안 한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감정과 행동을 보았다. 자신들의 피해에는 다혈질적인 면과 위협성도 갖고 있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휘파람을 불고 노래할 정도로 유쾌하고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런 위협적이지만 또한 긍정적인 상황은 그들의 단결력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경험은 탐사일정 중에서도 인도인들을 느낄 수 있는 가장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의 땅도 아닌 중국 땅에서 언제 인도인들과 다 같이 모여 같은 위치에서 언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있어보니 우리는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난감한 위치에 있었다. 우리는 중국인들을 향한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을 듣고 있어야 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호텔 측에선 그들을 위한 영어 소통 가능자가 1명뿐이었고 숟가락 없이 젓가락만 있고 야채식이 없는 그저 중국과 동양의 문화를 강요했다. 인도인에게 동양인에 대한 선입견이 생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날 한 가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건 국적과 집단을 불문하고 상호 간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도인과 중국인의 상황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배려가 있었다면 인종차별적 발언 같은 일이 생기지 않는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했다. 

 

2일차. (01/09)

델리 행 비행기의 시간과 셔틀버스 시간을 알기 위해 호텔 카운터에 정확한 시간을 물어보러 갔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우리도 정확히 모른다는 무책임한 답변뿐이었다. 결국 새벽에 일어나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렸다. 공항의 인력은 모자라고 일처리 또한 능하지 못했다. 결국 항공사의 무능함으로 승객들 간의 마찰이 생겼는데 왜냐하면 수속절차를 밟는 줄에서 항공사에서 만들어준 줄 외에 승객들이 독자적으로 만든 줄 때문이다. 독자적으로 만든 줄이기 때문에 줄의 기준이 모호했고 그 것을 이용한 중국인들이 새치기를 했다. 인도청년이 언성을 높이며 새치기를 제지했다.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뻔했던 일이었지만 항공사 직원들은 지켜볼 뿐이었다. 이 새치기 문제는 나중에 큰 싸움으로 다시 한 번 일어났다. 바로 이 줄이 기존에 있던 줄을 파괴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인데 줄이 만들어진 곳이 수속절차가 끝난 사람들이 나가는 출구였다. 수속절차가 끝난 사람들이 나가기 위해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전과 다른 중국인이 새치기를 했다. 새치기 문제로 인도인과 중국인이 언성을 높이고 욕설을 하며 싸우고 있었지만 중국 항공사 직원은 그저 바라만 볼 뿐 자신은 아무 힘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방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줄이 기존 줄의 수속절차 게이트를 침범했기에 새로운 줄을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그 요구 역시 수용돼지 않고 힘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상황을 회피했다.

이것을 통해 느낀 것은 ‘책임감’과 ‘통제’의 필요성이다. 항공사의 통제가 없는 그 곳은 무질서했으며 항공사 직원의 책임감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승객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무엇에 있어서든 맡은 것에 대한 책임감과 적절한 통제가 있어야 더 나은 상황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델리 행 비행기 안에서도 인도인들은 유쾌했다. 인도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오자 인도인들은 환호를 지를 정도로 정말 유쾌한 민족이다. 그리고 우리도 마침내 인도에 도착했다.

출입국 심사를 끝으로 비행기에서 짧게나마 알게 되었던 같은 항공편 이용 승객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결항된 하루 동안 정이든 것일까, 모두 웃으며 작별했다. 인도 공항의 보안 비중은 한국 공항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보안요원들은 서로의 모습이 시야에 보일 정도로 짧은 거리에 많이 배치됐으며 모두 실탄이 든 라이플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에 미숙한 초보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을 위해 선불 택시를 타기로 했다. 공항에서 나가고도 주변을 계속 경계했다. 택시기사님이 접근할 때도 사기꾼은 아닐까 경계했다. 기사님의 동료가 우리 짐을 트렁크까지 옮겨주셨다. 그런데 짐을 옮겨주었으니 팁을 요구했다. 우리는 20루피를 주고 숙소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기사님께서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셨고 우리는 맞추어 보라고 대답했다. 기사님의 추측은 중국과 일본이었다. 인도에서 아직 한국은 생소한 나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뉴델리의 도로 곳곳에는 옛날 한국의 고속도로처럼 뻥튀기나 꽃 장사가 있었다. 그리고 인도에는 앳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동냥하는 모습을 도로 곳곳에서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교통사고의 위험을 감수하며 구걸을 하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고 기사님께서 팁을 요구하셨다. 친절했다는 이유였다. 이에 이 또한 문화라고 생각하고 20루피를 드렸지만 40루피를 요구하셨고 우리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인들의 도움을 받으면 외국인인 우리에게 팁을 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한 일임에도 팁을 줄 수 있고 모든 인도인에게 부정적인 선입견이 생길 수 있다. 둘째는 먼저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인도인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사님의 친절함도 결국 호객행위일 뿐이었다.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다가오는 인도인들은 어떤 위험요소를 가지고 접근할지 모른다. 그들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도 인도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겠지만 항상 경계해야 함을 각인시킨 날이었다. 

 

3일차. (01/10)

비행기 결항으로 인해 일정에 다소 변경이 생겼다. 원래는 인도의 수도인 뉴델리에서 이틀이라는 시간동안 탐사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뿐이었다. 기존의 계획이었다면 뉴델리를 대표하는 건축물들인 인디아 게이트, 쿠툽 미나르, 스왑미나라얀 악샤르담, 그리고 레드포트 까지 탐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탐사 일정이 하루로 단축되었고 우리의 대표 탐사테마인 ‘색깔’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사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과감하게 일정들을 대폭 축소하고 아그라로 떠나기 전 뉴델리에서의 마지막 날은 “후마윤의 무덤”, “코넛 플레이스”, “빠하르 간지”를 탐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원래 ‘후마유의 무덤’은 다른 탐사지역에 비해 그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판단되어 계획에서 제외되었던 장소이었다. 본래는 계획에 포함되어 있고 뉴델리를 대표하는 색이라고 지정하였던 ‘붉은색’을 탐사하기 위해 레드포트를 집중적으로 탐사할 지에 대해 고민하였다. 하지만, 이곳을 방문하였던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와 도움을 통해 레드포트보다는 후마윤의 무덤이 더욱더 학습할 만한 요소가 많다고 판단되어 후마윤의 무덤을 찾았다.

델리의 후마윤의 무덤은 1570년에 세운 인도 아대륙 최초의 정원식 무덤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문화적 가치가 있다. 이 무덤은 다수의 주요 건축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타지마할 건축에 이르러 정점을 이루었다. 뉴델리를 대표하는 색상이 붉은색인 만큼 후마윤의 묘에 처음 들어설 때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띄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라자스탄 주에 붉은 사암이 많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이는 아름다운 곡선의 돔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굴 건축양식의 초기 발생 단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후마윤의 무덤은 무굴 건축사에서 이정표 역할을 한다. 제방과 수로가 있는 현존하는 무굴의 정원식 무덤의 전형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양식의 최초로 규격화된 작품임에도 후마윤의 무덤은 건축학적으로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인도 무굴 제국의 2대 황제인 후마윤의 무덤은 후마윤의 미망인인 비가 베굼 왕비가 후마윤이 죽은 후 14년 뒤인 1569년~1570년에 150만 루피라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건설하였다. 건축가는 미라크 미르자 기야트이다. 이후 많은 통치자와 그들의 권속들의 무덤이 되었고 현재 150구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이곳을 예부터 무굴 왕조의 공동묘지라고 불렸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후마윤의 무덤은 장기간에 조성된 최초의 왕의 무덤이며 여러 면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정원식 무덤을 인도 아대륙에 전파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후마윤은 이슬람 세계로 폭넓은 여행을 했으며, 특히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를 다녀온 후 자신의 무덤에 건축예술을 도입할 생각을 품었다. 결국 미망인의 지시에 따라 이 무덤에 후마윤의 생각을 적용하였다. 후마윤의 무덤은 역사적으로도 가치를 존중받았으며, 그 덕분에 원래 상태대로 온전히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특성을 보존하기 위해 인도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후마윤의 묘를 다녀온 소감은 인도 건축의 정교함, 색이 주는 아름다움, 인도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초기 건축양식임에도 불구하고 매끄러운 곡선과 작은 부분마저 정교한 인도의 건축에 감탄했다. 무덤에 예술양식을 도입하는 그들에게 무덤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앞으로 탐사하게 될 지역인 아그라에서 만날 수 있을 인도의 대표적 건축물이자 무덤인 타지마할에 대한 기대감도 더 높아졌다. 아침에 다녀온 덕분인진 모르겠으나 선선한 날씨, 평화로움, 여유로움이 넘쳤다. 팀원 모두 큰 나무 기둥 밑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빠하르 간지’, ‘코넛 플레이스’는 뉴델리역과 가까이에 있는 만큼 뉴델리 지역 내에서 가장 번화한 시장 중심가라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장소였던 후마윤의 무덤과는 달리 이들의 삶의 모습, 즉 문화와 종교에 대해서 탐구할 수 있었다. ‘빠하르 간지’와 ‘코넛 플레이스’ 두 장소는 확연히 달랐다. 빠하르 간지는 정찰제가 아닌 시장이었다면, 코넛 플레이스는 정찰제의 값비싼 브랜드들이 현대건축양식의 건물에 있었다. 시장에는 정말 여러 종교층이 있었다. 머리를 기르고 터번을 두른 사람, 수염을 자르지 않는 사람, 히잡을 두른 여성 등 다양한 종교층이 있었고 대립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종교에 따라 대립될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추측이 틀린 것일까, 그들은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고 대립적인 관계도 아니었다. 종교적인 이슈로 뉴스에 많이 나오는 인도였지만, 모두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해주었다. 이런 생각을 한 뒤에 복잡하고 정신없었던 시장과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보였고 마음에 왠지 모를 안정감과 평안함을 가져왔다.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성격이 뒤엉켜 평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서 참으로 인도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4일차. (01/11)

한국을 떠난 지는 4일차, 인도에 도착한지는 3일차가 됐다. 뉴델리에서 느끼고 마주한 인도인들의 공통점은 선행의 뒤에는 팁을 요구하는 것과 외국인에게 바가지요금을 물리는 것이다. 오토 릭샤 왈라들은 외국인에게 미터기를 켜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가지를 먹는걸 알면서도 흥정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큰 배낭을 메고 있기 때문에 뉴델리 역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곳이었다. 주의를 기울여 역 입구부터 플랫폼까지 모두 잃어버린 물품 없이 이동했다. 인도 기차의 낡은 커튼, 허름한 2층 침대, 누렇게 바랜 창문으로 비친 아름다운 풍경에 인도에게 설렘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 기차 칸 옆에 사이드 칸에 탄 인도인 로건을 알게 됐다. 그는 뉴델리에서 수백 킬로 떨어진 곳, 자발푸르(Jabalpur)에 살고 있는 군인이라고 소개했다. 기차에 타기 전부터 기차에 타고나서, 그리고 기차에서 내리기 전까지 짧게나마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여태까지 인도인들에게 경계심을 다소 가지고 있었더라면, 친절한 그 덕분에 인도인에 대한 경계심이 다소 풀릴 수 있었다. 그에게서부터 한국이 인도인들에게 가지는 이미지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는데,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한국은 매우 똑똑하고 발전된 국가였다. 비록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로건을 비롯한 많은 인도인들이 ‘삼성’의 휴대폰을 이용하고 있었고 그들은 우리를 보고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했다. 타국에서 외국인으로부터의 칭찬을 듣고 있자니 애국심이 저절로 커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색깔’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인도를 찾았다고 이야기 했더니 정말 주제를 잘 선택한 것 같다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색깔과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직 본격적인 탐사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던 터라 다소 부담도 있었고, 걱정도 되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탐사주제에 대해 더욱더 애착이 생기고 앞으로의 탐사에 대해 자신감도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그라에 내리기 전 그와 짧게 작별했다.

아그라는 인도의 대표적 고대 도시로, 1526년부터 1658년까지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현재는 ‘타지마할’로 가장 유명한 인도의 도시인데, 아그라의 대표적 건축물인 ‘타지마할’과 ‘아그라 성’은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들이다. 대부분의 인도 방문자들은 뉴델리와 아그라가 매우 가깝기에 뉴델리에서 머무르며 아그라를 잠깐 방문하는 일정을 계획한다. 실제로 아그라는 ‘타지마할’로 인해 워낙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장소이다 보니 인도에서 치안이 매우 위험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위험한 장소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안전에 힘 쓸 계획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호텔 인근의 여학교와 일반학교가 있어 주변의 치안이 나쁘지 않았다. 

 

5일차. (01/12)

아그라에서의 일정이 시작 됐다. 관광객들이 많은 것을 생각해 아침 일찍 일어나 타지마할을 탐사할 채비를 했다. 타지마할은 1631년~1648년 무굴 제국의 황제 샤자한(Shah Jahan)이 사랑하는 아내를 추모하기 위해 아그라(Agra)에 건립하였다. 흰색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한 묘당인 타지마할은 인도 이슬람 예술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계 유산의 최고 걸작이다. 세기의 걸작이라 불리는 ‘타지마할’은 ‘무덤’이라고 칭하기엔 너무나도 아름답다. 으레,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유명 건축물들이 그렇듯 완성하는 데만 23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타지마할’이다.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았던 사람들은 ‘타지마할’만큼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지 못하게 하려는 절대 권력자 때문에, 손목이 잘려야 했다. 타지마할이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샤자한이 흰색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인도인들의 세공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부인을 특별히 여겨 흰 대리석을 구해서라도 특별하게 기리고자 하는 애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타지마할은 동, 서, 남, 북 4개의 문이 있었는데 우리는 문에 들어갈 때부터 크기에 압도되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붉은 문 안에 있는 흰색의 타지마할은 은은하게 빛나는 보석이란 느낌을 주었다. 타지마할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인도 초등학생, 선생님들과 사진을 찍었다. 학생들은 우리가 힌디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에 굉장히 신기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곤 했다. 타지마할 내부에서는 신발커버를 해야 입장할 수 있었다. 자국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후대에도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보존하여 물려주려는 인도의 노력이 보였다. 인도인들에게 흰색이 주는 느낌에 대해 인터뷰했다. 대학생, 의사는 평화, 안정, 여유로움을 답한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인도인들의 흰색에 대한 생각을 알게 됐다. 반면에, 첸나이의 교수는 슬픔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타지마할'이 무덤이라는 걸 고려한 듯 했다. 이렇듯 타지마할이 주는 흰색의 의미는 인도인들에게 전쟁이 없는 평화와 안정감을 주는 색이라는 결과를 도출했다. '타지마할'을 보고 있으면,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했던 "인도에 위치한 무슬림 예술의 보석이며, 인류가 보편적으로 감탄할 수 있는 걸작" 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비운의 역사가 서려있어서일까, 단순히 아름다운 느낌 말고도 '숭고'의 의미도 있다고 생각 했다.

타지마할(Taj Mahal) 근처에는 ‘아그라의 붉은 요새(Red Fort of Agra)’라고 알려진 16세기 무굴 제국의 중요한 기념물이 있다. 붉은 사암으로 튼튼하게 만든 2.5㎞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요새는 무굴 제국 통치자들이 거쳐 간 제국의 도시이다. 이곳에는 동화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궁전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자한기르 궁전(Jahangir Palace), 카스마할(Khas Mahal), 샤자한(Shah Jahan,1630~1655)시대에 만들어진 접견실인 디와니카스가 있으며 아름다운 모스크 2개도 있다.

붉은 요새(아그라)와 타지마할은 사라진 무굴 황제의 문명에 관한 특출하고 상호 보완적인 증거를 간직하고 있다. 아그라의 역사는 2,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그라가 지방 도시보다 더 크게 번영한 뒤 비로소 무굴 제국의 통치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무굴 제국 창시자의 아들인 후마윤(Humayun)은 괄리오르(Gwalior) 왕가로부터 당시 가장 유명한 코이누르(Koh-i-Noor)인 보석류와 값비싼 원석을 선물로 받았다.

아그라는 후마윤의 아들인 위대한 황제 악바르(Akbar, 1556~1605) 집권기에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그의 체제 아래 아그라 요새의 주요 부분이 건립되었다. 아그라의 붉은 요새는 야무나 강 오른쪽 제방에 있다. 요새는 1565년 황제 악바르 대제가 건설하였다. 타지마할을 에워싸면서 샤자한 정원의 북서 말단에 자리 잡은 요새는 기념비적인 통일성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해자 위에 솟은 붉은 사암 벽과 우아한 곡선, 높은 성채로 방어 체계를 이룬 요새 지역은 2.5㎞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무굴 제국 통치자들의 제국 도시로 알려졌다. 델리 요새처럼 아그라는 악바르, 자한기르와 샤자한 통치 아래 무굴 제국의 장대함을 드러내는 가장 뚜렷한 상징물로 여겨진다.

성벽에는 델리 문과 아마르 싱 문이 있다. 독창적이고 웅장한 출입구는 하티폴 또는 코끼리 문이라고 하는데, 내부의 관문과 연결된 델리 문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다. 지금은 아마르 싱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요새에는 동화처럼 아름다운 궁전이 늘어서 있다. 화려함을 즐기던 샤자한 통치 아래 카스마할, 시시마할, 무함만 버즈의 팔각탑은 물론 1637년 건립된 디와니카스, 1628년 많은 기둥으로 건축한 접견실 디와니암 등이 있다. 궁전 밀집 단지에는 흰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모스크 두 개, 샤자한이 1646년~1653년에 건축한 모티 마스지드(Moti Masjid, 모스크) 또는 진주 모스크 그리고 아우랑제브 치세(Aurangzeb, 1658~1707) 때 지은 나기나 마스지드(Nagina Masjid) 등이 있다.

몇몇 건물은 타지마할과 비슷하게 아름다운 조각을 새긴 순백의 대리석으로 세웠는데, 티무르 예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인도 무슬림 예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황제 샤자한은 죽은 아내를 애도하려고 지은 타지마할이 보이는 아그라 요새에 아들 아우랑제브의 손에 유폐되었다. 샤자한은 대리석 발코니가 아름다운 탑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워낙 타지마할이 유명한 건축물이었던 터라, 타지마할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오히려 아그라 성은 짧게 탐사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처럼 내부에 많은 건축물들이 있었던 터라 돌아보는 데에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요새와 그 내부에 지어진 흰색의 대리석이 잘 조화된 모습이 마치, 우리가 탐사하려고 했던 뉴델리 지역과 타지마할로 대표되어지는 아그라의 모습을 모두 탐사할 수 있었던 기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그라 성에서는 후마윤의 묘에서 미처 인터뷰를 하지 못했던 것을 보완하고자 ‘붉은색’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인터뷰 했다. 스터디 리포트에서 조사했던 바에 따르면 ‘붉은색’이라고 했을 때 정열이나 혹은 이와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인터뷰해보니 그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2명을 대상으로 ‘붉은색’에 대한 생각을 인터뷰할 수 있었는데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피’였다. 피의 색이 ‘붉은색’이니 피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하였다. 한국인들에게 ‘붉은색’이라고 하면 사랑이나 심장, 혹은 붉은 악마와 같은 단어들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 차이를 여기서 느낄 수 있었다. 또, 인터뷰했던 한 부부는 자신들의 종교에서 믿는 신을 대표하는 색이 ‘붉은색’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붉은색이 매우 중요한 색이라고 했다. 인도인들이 믿는 수많은 신들에 대해서 조사해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믿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정한 신이 있었다는 것과, 또한 그를 대표하는 색이 있었다는 점만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종교의 다양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6일차. (01/13)

어젯밤에 숙소에서 새벽까지 떠드는 인도인들 때문에 잠을 설쳤다. 우리나라 사람들만 밤에 노는 문화가 발달된 줄 알았는데, 인도인들 역시 밤에 모여서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눌 만큼 노는 것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아그라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무리하고 오늘은 또 다시 자이푸르로 이동해야했기에 서둘러 짐을 싸서 그저께 거쳐 왔던 아그라 칸트 역으로 찾아갔다. 아그라 칸트 역 앞에는 얇은 이불을 덮고 노숙하는 가족을 봤다. 한국에서 서울역 근처나 공원 등에서 노숙하는 분들을 간혹 보기는 했지만 이처럼 가족이 노숙하는 모습은 한국에서 볼 수 없었기에 다소 생소했다. 추운 날씨에 얇은 이불을 덮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역에 도착하고 나서는 배가 고팠기에 인도식 튀김만두인 사모사, 망고주스로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감자, 완두, 다진 고기 등이 들어갔지만 마살라 특유의 향이 나는 튀김만두였다.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보다 일찍 역에 도착했지만, 기차가 2시간 25분 연착됐다. 이른 기차를 예매해도 연착이 돼는 상황에서 더 늦은 기차를 탔다면 저녁 늦게 도착했을 것이고 신변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다시 한 번 시간적 여유가 중요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많은 인도인이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지나갔다. 인도인 가족과 사진도 찍었는데 인도에서는 외국인들과 애기와 사진을 찍는데 긍정적인 경향이 있다. 부끄럼이 많은 순수한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어 값진 경험이었다. 기차 칸은 3A로 양 쪽 칸에 3층의 매트가 있는 칸이다. 이젠 모두 인도의 기차에 적응했다. 기차를 타서 짐을 풀자마자 우리는 내 집처럼 자연스럽게 자리에 누워버렸다. 기차를 타는 것은 두 번째이지만 모두들 기차를 타는 것을 너무 재미있어 했다. 아마 12시간 동안 기차를 타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이푸르 행 기차는 화장실 칸의 기차 출입구가 열려있다. 그 앞에 서서 본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좁은 통로로 짜이나 인도 전통과자를 파는 상인들이 지나다녔다. 기차가 도착하고 내려서 마주 하게 된 자이푸르라는 도시는 여태 거쳐 왔던 뉴델리, 아그라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처음 ‘색’으로 대표되는 도시여서 그런 것인지 자이푸르는 핑크시티라는 이름에 걸맞게 도시 곳곳이 연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이푸르는 18세기에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핑크빛의 계획도시이며, 인도 라자스탄 주의 주도이다. 19세기 중반 에드워드 7세가 영국의 왕세자 시절 자이푸르를 방문했을 당시 원주민인 라지푸트족이 환영의 의미로 도시 전체를 분홍색으로 칠해 핑크시티라는 별명이 붙었다. 조사에 따르면 지금까지도 건물을 새로 증축할 때 주변과 비슷한 색상으로 색칠해야 한다고 들었다. 시티팰리스에서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계획도시인 자이푸르의 분홍색은 관광산업의 수단으로만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해 본 결과, 분홍색으로 계속 덧칠을 한다는 것은 편견이었다. 예전에 칠한 도색이 벗겨지지 않아서 그대로 둔 것일 뿐, 지금 덧칠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뉴델리, 아그라를 거쳐 자이푸르로 오니 점점 도시에서 시골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느낄 수 있었다. 역 주변은 릭샤, 버스도 많아 시끄럽지만 골목길로 조금만 걸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하다. 골목길을 걸어 예약해 놓은 숙소에 도착했다. 자이푸르의 호텔은 우리가 여태까지 가 본 숙소 중 당연 최고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편안했고 좋았다. 방에 가방을 풀어놓고 주변에는 뭐가 있나 구경하러 밖에 나갔다. 뉴델리와 아그라에서 봤던 정신없고 시끌벅쩍한 분위기와 달리 평화롭고 여유로운 자이푸르의 분위기에 반했다. 숙소 인근은 경적소리 없이 조용해서 편안한 오후였다. 한국에서 바쁘게 살았던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는데, 인도에서는 스스로 무장해제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 날 그 날 소화해야할 일정이 있고, 계획을 시행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었지만 기분은 항상 좋았다.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은 공작새가 있고 옛날 모기향을 틀어주어 향수를 자극했다. 이탈리아 음식을 주문했는데 세 명 모두 음식을 제대로 못 먹거나 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특이했던 것은 우리나라의 파스타와 인도의 파스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파스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스파게티처럼 생긴 긴 면을 생각하지만 인도에서는 펜네라고 부르는 빨대를 잘라놓은 것처럼 생긴 면을 뜻한다는 것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서 인도 과자를 몇 개 사왔다. 주인 아주머니께 힌디로 말을 거니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웃어주셨다. 자이푸르 호텔에 머무는 동안 그 마켓을 여러 번 갔는데, 항상 웃으면서 우리를 반겨주셨다. 호텔에서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 될 자이푸르에서의 일정을 기대하며 담소를 나눴다. 

 

7일차. (01/14)

아침부터 릭샤를 타고 시티팰리스에 다녀왔다. 시티팰리스는 자이푸르를 핑크시티로 만든 마하라자 자이싱 2세가 지은 궁전으로, 카츠와하 왕조(Kachwaha Dynasty) 시절 130년 동안 사용하던 암베르 성이 좁고 물을 구하기가 힘들어 자이푸르로 도읍을 옮기면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핑크시티 궁전의 위엄에 걸맞게 시티팰리스는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러 인도인들에게 자이푸르의 핑크색이 지금까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이 인조적인 색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유지하려고 칠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칠해 둔 색이 벗겨지지 않아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태까지 조사하면서 사람들이 여전히 핑크색으로 페인트칠을 하기 때문에 핑크시티로 유지되는 줄 알았는데 원래 건물이 지어지기를 핑크색으로 지어져서 이것이 유지되고 있다고 해서 다소 충격을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터뷰를 통해 얻은 정보와 충격을 안고 다시 건축물에 대한 탐구를 계속 이어 나아갔다.

입장 후 가장 먼저 보이는 무바라크 마할 (Mubarak Mahal)은 19세기 외국 귀빈들의 리셉션 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무바라크는 ‘상서롭다, 길하다’는 뜻으로, 이슬람, 유럽 그리고 원주민 라즈푸트족의 건축양식이 모두 혼합되어 만들어진 건물이다. 인도에서 봤던 건물들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는데, 전통적인 방식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문화권의 양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색다른 건축물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굉장히 진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역대의 마하라자들이 입었던 의류나 궁중에서 사용되던 악기들이 있는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안쪽에는 달빛 궁전이라 불리는 대리석의 7층 건물 찬드라 마할(Chandra Mahal)이 있다. 시티팰리스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자 유일한 금색 건물로, 현재까지도 마하라자의 후손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일부만 볼 수 있었다. 이 앞에는 쁘리땀 촉(Pritam Chowk)이라 하는 작은 광장이 있는데, 여기에 4개의 문이 있다. 각각의 문은 4계절과 힌두교 신을 뜻하며 문마다 의미가 있다. 북동쪽의 Peacock Gate는 가을을 뜻하며 비쉬누 신을 뜻한다. 남서쪽의 Lotus Gate는 끝없는 꽃잎의 패턴이 새겨져 있고, 여름과 시바-파바티 신을, 북서쪽의 Leheriya라고도 불리는 Green Gate는 봄과 가네샤 신을, 마지막으로 Rose Gate는 겨울과 데비 신을 의미한다. 특별한 의미 없이 만들 수도 있는 문에도 신들과 관련지은 것을 보아 인도인들에게 힌두 신들은 단순한 이론적인 신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제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듯 했다. 시티팰리스 내의 무기 박물관에 가봤는데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16세기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현재 사람들이 입는 옷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입던 한복을 여태까지 현대 사람들이 입는다고 생각하니 인도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우리나라와는 달리 점진적인 발전을 한 듯 했다. 아쉽게도 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오고 싶었지만 박물관 내라서 이 그림을 사진에 담아오지는 못하였다.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게 우리는 시티팰리스 탐사를 끝내고 릭샤를 타고 다시 암베르성으로 향했다. 암베르성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지어진 요새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지대부터 높은 산까지 성이 이어졌다. 암베르성은 미적인 힌두 스타일의 요소들로 알려져 있다. 큰 성벽과 여러 개의 문, 자갈길과 함께 성은 마오타 호수를 마주하고 있다. 마오타 호수와 암베르성이 이루는 절경에 압도되었고, 자연의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문이 있는 곳에서 성이 1층과 2층으로 나눠졌는데, 2층은 왕이 신하들을 만났던 아름다운 접견실이 있었다. 몇 백년 전에 존재했던 유적지를 현대로 가져온 듯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성 꼭대기로 올라가면 태양문이라는 뜻의 정문 수라즈 폴이 있다. 이를 지나면 디와니암(Diwan-i-Am)이라는 아름다운 접견실을 볼 수 있다. 이곳은 라자스탄 지역의 왕인 라자(Raja)가 신하들을 주로 만났던 곳이다. 5층에는 쉬시 마할(Sheesh Mahal)이라고 불리는 접견실 디와니카스(Diwan-i-Khas)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라자가 신하들이 아닌 일반 백성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유난히 반짝이고 화려한 내외부의 풍경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이는 유리 궁전이라는 뜻이다. 화려한 궁전으로 왕의 권위를 나타내면서도 신하와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라자의 모습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시티팰리스와 암베르성을 보면서 느낀 점은 오랜 시간이 흘러 세월의 흔적은 보이지만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각별한 신경을 썼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자국의 문화를 아끼는 인도인들의 마음을 깨달았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8일차. (01/15)

다른 도시에 비해 할 일이 많은 자이푸르의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하와마할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에 도착해서 그런지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여전히 인도인들은 우리를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봤고, 우리는 여유롭게 웃으며 지나갈 만큼 익숙해진 듯 했다. 하와마할을 정면에서 제대로 보고 싶었는데 우리가 제대로 입구를 찾아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하와마할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을 뿐, 제대로 앞모습을 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다음 날 다시 와서 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와마할은 바람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1799년 자이푸르 지역의 왕이었던 마라하자 프라탑 싱이 건설하였다. 하와마할의 건 설 배경이 많이 언급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주된 이유는 퍼다(Purdah) 제도 때문이라고 한다. 퍼다 제도란, 이슬람 국가들에서 여자들이 남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집안의 별도 공간에 살거나 얼굴을 가리는 관습이다. 그 당시에는 라즈푸트의 왕실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밖을 볼 수 있는 전망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의 공간이었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특별한 거주 시설이 없기 때문에 왕실 여인들이 어디에서 거주했는지 궁금했지만, 이에 대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당연히 완공된 건축물인 줄 알았는데 워터 팰리스에서 만난 인도인 대학생이 설명해 준 바에 따르면, 기초 토대가 부실하여 짓다만 상태에서 건물 붕괴를 막기 위해 창문을 많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화적 측면 뿐 만 아니라 건축적 측면에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니 흥미로웠다. 총 953개나 되는 이 수많은 창문들의 이름은 자로카(Jarokha)라고 한다. 건물 방 내부로 들어갈수록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하와 마할은 시티 팰리스의 일부분일 뿐이지만, 유독 독특한 생김새로 인해 유명해졌다.

두 번째로 찾아간 잔타르 만타르는 온통 노란색의 천체 기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일단 도착하자마자 굉장한 크기의 기구들에 한 번 놀랐고, 인도인들의 과학에 대한 열정, 정교함에 한 번 더 놀랐다. 잔타르 만타르는 우리나라의 첨성대보다 크고 많은 천체 기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1728년 천문학자이자 왕이던 자이싱 2세가 세운 천문대이며, 델리, 바라나시, 웃자인, 마투라 등 5곳에 천문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뉴델리 지역을 조사하면서 그곳에서도 ‘잔타르 만타르’라는 이름의 유적지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그제 와서야 그 궁금증을 비로소 해소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이푸르의 잔타르만타르 해시계는 오차가 20초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한 시각을 나타냈다.

천문대에는 아랍-이슬람, 페르시아와 서양문화에는 이미 존재하는 기구들이 재현되어 있었다. 초반에는 기존에 있던 천체 기구들의 디자인을 복제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혁신과 거대한 크기를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소가 되었다. 또한 잔타르 만타르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손꼽히는데, 이는 고대시대부터 중세 시대 기간 동안, 이슬람 시대부터 페르시아와 중국에 이르기까지 발전되어왔다. 이곳에서도 시간이 흘러 기구가 변색된 부분을 페인트칠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의도가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이든 자국의 전통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이든 문화재를 보호하려는 노력만큼은 필요한 태도라고 느껴졌다. 페인트칠하는 분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려고도 했지만, 인터뷰를 진행할 만큼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하셨고 담당 가이드에게 이야기해보라고 하셨다. 영어가 아니라 힌디어로 인터뷰를 진행했더라면 응해주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에 더 열심히 공부해오지 않은 것에 대해 다소 안타까움을 느꼈었다.

거기에 더해, 인도에 온 지 일주일이 되었고, 돌아다닌 곳은 많은데 뉴델리와 아그라에서처럼 관광객 수가 적고 마땅한 인터뷰 대상자도 찾지 못해 우울하기도, 조금은 피곤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잔타르 만타르에서는 일정에 쫓기느라 조급해하지 않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고, 로컬리티 챌린지를 도전해보고 싶었다는 초심을 다시 다질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세 번째 목적지인 나하르가르 포트는 우리가 릭샤로 이동하면서 최장시간, 최고비용을 들인 곳이다. 처음에는 나하르가르 포트 입구에 내려서 정상까지 걸어갈 생각으로 갔지만, 입구에 도착해서 생각을 바꿨다. 정상까지는 도저히 걸어갈 수 없는 거리였고, 릭샤 왈라와 다시 요금 협상을 하고 정상으로 향했다. 인도의 다른 요새들과 비슷하게 나하르가르 포트 역시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어진 전투 요새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중간 지점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저녁을 먹으면서 만난 인도인 Rajneesh에 의하면 원래 라자스탄 지방 자체가 사막, 광물 등으로 인해 척박해서 농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도인들은 산을 잘라 흙을 덮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성을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도 굉장히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건축물 하나를 짓는 데만 해도 건축학자 뿐만 아니라 과학자, 지리학자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전에도 사람들은 화합하여 불가능을 가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 가상했다. 건물 내부에는 무굴 제국의 영향으로 라즈푸타나(Rajputana)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에 대해 사전조사하면서 나하르가르 포트라는 곳이 처음부터 이렇게 대비되는 양식의 모습으로 요새를 건축한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건축물이 추가적으로 변형된 것인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알아본 결과, 나하르가르 포트는 1734년 마하라자 싱 2세에 의해 도시 위 산등성이에 후퇴의 목적으로 지어진 요새이지만 1868년 사와이 람 싱의 통치 기간에 확대되었다고 한다. 1883년부터 1892년까지 나하르가르에 궁전들을 지은 것인데, 그 중에서도 마다벤드라 바완(The Madhavendra Bhawan)은 자이푸르의 여왕들을 위한 스위트룸이 있었고, 맨 꼭대기에는 왕인 자기 자신을 위한 장소를 따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역대 마하라자들의 사냥터로 이용된 것까지 고려하면 나하르가르 포트가 단순히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요새의 기능 뿐 아니라 그야말로 복합 단지(Multiple Complex)의 기능까지 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미관적 아름다움과 실용성의 조화를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성이었다.

 

 

 

9일차. (01/16)

자이푸르에서의 마지막 날은 일정을 많이 잡지 않았다. 전공 수업에서부터 볼리우드라는 독자적 영화산업이 있을 정도로 인도인들의 영화 사랑이 남다르다고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인도에서 영화관을 꼭 가보고 싶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라즈만디르 시네마는 자이푸르의 유명한 상징이자, 아시아의 자부심이라고 언급 될 정도로 인도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었다. 동시에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영화관으로, 볼리우드 산업의 부흥을 일으킨 증거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인도인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영화 중간 인터벌(쉬는 시간)이 있다는 점이었고, 많은 종류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기간동안 한 가지의 영화만을 상영한다는 것이다. 탐사 주제에 부합하도록 그 동안은 건축 양식의 특징을 바탕으로 탐사했지만, 이를 가장 근본적으로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는 인도인들의 문화적 특징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날 우리는 ‘바지라오 마스터니’(Bajirao Mastani)라는 영화를 보았다. 자막도 없는 힌디 영화여서 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영상에만 의지해서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사전 조사한 바로는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볼리우드의 영화의 주제가 ‘권선징악’인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었다. 우리가 보게 될 영화도 결말은 해피엔딩이겠지 생각했지만, 주인공들이 모두 죽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화를 감상할 때 반응이 그다지 크지 않은 것에 비해 인도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닥치는 상황 상황마다 크게 웃거나 아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단순히 영화를 보는 제 3자가 아니라 마치 스스로를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삶 속에서 충족될 수 없는 욕구를 영화를 통해 해소하는 경향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도 사회에서 법적으로는 카스트 제도가 사라졌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름만 보더라도 상대방의 계급을 알 수 있고, 국민들의 의식 속에 아직도 존재하는 신분으로 인한 굴레를 가상 세계에서나마 내려놓고 싶은 바람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인도인들에게 영화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삶 속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단순히 오락이 아닌 그들의 삶을 반영하는 매개체였다. 오늘날 인도는 1년에 1000편 이상의 볼리우드 영화를 제작한다. 또한 그 영화들이 세계의 다른 영화들과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형식도 아니다. 춤과 음악을 비롯하여 자국만의 독자적인 형식을 바탕으로 하는 볼리우드 영화의 저력은 인도인들의 춤과 음악, 영화를 사랑하는 국민성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인도에서 보고 느꼈던 그 어떤 경험보다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원래 계획했던 다음 일정은 자이푸르의 자얀티 바자르를 방문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직접 관찰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자얀티 바자르가 전자상가여서 계획을 바꿔 하와마할 로드의 시장까지 걸어갔다. 릭샤를 타고 다닐 때보다 걸어가면서 인도의 경적소리를 많이 들었다. 차선의 개념도 없고 혼잡 그 자체인 인도의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점은 언제 생각해도 신기했다. 정신없이 분주한 시장의 느낌이 생동감이 있어서 정말 사람이 사는 곳 같았다.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했을 때 인도는 길거리도 깨끗하지 않고 사방이 경적 소리에 낙후된 시설들도 많다. 시장을 지나갈 때마다 상인들은 우리에게 호객 행위를 한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인도에서 지내면서 능청스럽게 받아치기도 하는 배짱이 생겼다. 이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그 자체를 비난하지 않고 문화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듯하다. 모순적인 성격들이 한 곳에 모여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공존하는 인도의 모습을 바라보면 정말 흥미롭다. 인도는 분명히 매력적인 나라이다.

 

10일차. (01/17)

정신없으면서도 여유로웠던 하루다. 원래 계획은 5시에 호텔에서 출발하여 기차역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늦잠을 자서 5시 30분에 기상했다. 6시에 출발하는 기차시간에 맞추기 위하여 15분이면 여유롭게 가는 거리를 오토 릭샤를 타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섰다. 그런데 거리에는 오토 릭샤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걸어서 기차역까지 가기 시작했다. 기차역에 다다른 시간은 5시 45분이었다. 짐 검사 후에 플랫폼 4번을 찾아가니 50분이었다. 기차가 보이지 않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앞에 기차가 보였다. 다급히 우리 칸을 찾아 탑승한 것이 5시 58분이였다. 정말로 피 말리는 시간싸움 이었다. 다음에는 절대로 어떠한 일정에서도 시간에 쫓기게 하지는 않자고 다짐하였다. 짐 도난을 주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침 일찍 무거운 짐을 들고 뛰어가듯 기차에 탔기 때문에 쏟아지는 잠에 몇 시간쯤 눈을 붙였다. 일어나보니 어느덧 조드푸르까지 1시간만 남아있었다. 사이드 로어에 탄 인도 아기와 장난을 치며 조드푸르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드푸르에 와서도 첫날인지라 일정을 하나도 잡지 않고 여유롭게 첫 날을 즐겼다. 릭샤왈라와 흥정을 끝내고 숙소 이름을 말하자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건 곳은 숙소 사장님이었고 그 둘은 친구사이였는데 공짜로 픽업 해주신다고 타라고 했다. 아무런 의도가 없는 호의는 없을 것이라고 첫날부터 느끼고 그렇게 생각해왔던 인도였기에 릭샤에 짐과 몸을 싣는 그 순간까지도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하였다. 다소 불안하기는 하였지만 휴대폰 지도로 릭샤의 위치를 파악해가면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서야 릭샤왈라의 말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게스트하우스 까지 들어오는 길에 만난 조드푸르는 골목골목 길이 협소하고 빽빽했지만 낡고 파란건물의 아름다운 색채가 악취, 불편함을 잊게 해줬다. 일찍 도착한 만큼 가장 여유롭고 인도인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내려다보는 조드푸르의 광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저녁은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과 밥을 먹어 오랜만의 한식을 먹었다. 인도에 도착한지 10일만에 제대로 피로를 풀고 기력을 다시 회복하는 느낌이다. 

 

11일차. (01/18)

오늘도 어김없이 로컬리티 챌린지로서의 일정을 시작했다. 항상 하루 전날이면 그 다음날의 일정을 체크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비행기 결항으로 인해 뉴델리에서 일정을 대폭 수정한 것 이외에는 사전계획대로 이동해왔다. 하지만 조드푸르에서의 일정은 다소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계획했던 것 보다 마을이 작았기도 했고, 우리가 예상했던 동선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첫 날인 오늘은 주요 방문장소인 ‘자스와트 타다’와 ‘메헤랑가르 포트’를 찾아가고, 내일 하루 동안은 사다르 바자르와 주변 시장을 탐색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아마 좁은 마을에서 하루 동안 일정을 몰아서 소화하고 두 번째 날은 또 다시 인도인들처럼 여유를 느끼고자 하는 생각 역시 한 몫 한 것 같았다. 인도인들의 문화에 서서히 적응하고 있다는 뜻인 것일까. 그렇게 릭샤를 타고 첫 번째로 찾아간 자스완트 타다는 마하라자 자스완트 싱 2세를 기리기 위하여 1899년에 완성한 건축물이다. 성 앞에는 오리 등이 살 정도로 깨끗한 호수가 있었다. 아그라의 타즈마할과 같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하여 ‘메와르의 타즈마할’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이라 ‘화이트 캐슬(White castle)’이라고도 불린다. 그래서인지 하얀 대리석 건물이 밝고 환하게 느껴졌다. 온통 하얀 대리석의 궁전 안에는 메와르 왕가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위대한 왕’이라는 뜻의 마하라자는 인도의 지방 군주를 의미한다.

사원 부근에는 왕족의 화장터로 이용되었던 정자들이 있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었지만 왕과 왕비의 화장터와 묘지는 붉은 사암으로 지어져 있었다. 자스완트 타다를 보고 아그라에 있는 타지마할을 작게 본 따 만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새하얗고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으며 정원 또한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궁전 내부엔 신을 모시는 성전이 있고 궁전 내부에선 밖의 햇빛이 대리석을 통과해 보일 정도였다. 다시금 인도의 세공기술이 뛰어났음을 인지했다. 왕족과 귀족들의 화장터였던 만큼 미를 추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긴 이동기간 때문이었을까, 왠지 모를 무력감과 피곤함을 느낀 우리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메헤랑가르 포트까지 오토릭샤를 타고 도착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릭샤왈라들이 많이 없어 분명 릭샤 가격에 사기를 치는 것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지만, 흥정을 할 힘조차도 생겨나지 않아 꽤 비싼 가격에 짧은 거리를 달렸다. 그렇게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이름하여 ‘메헤랑가르 포트(Meherangarh fort)’이다. 122M 바위산에 세워진 메헤랑가르 성은 가파른 절벽 위에 있어 적군의 공격을 막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메헤랑가르 성은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의 성이라는 뜻이다. 요새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성 내부 조형물과 성의 건축은 매우 정교했다. 조드푸르 왕인 마하라자의 소유로 운영되는 이곳은 성문이 7개나 될 만큼 인도 전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이다. 가장 규모가 큰 만큼 외국인을 위한 가이드가 11개국어로 있었고 한국어도 포함됐다. 성문을 들어가면 안 쪽 벽면에 붉은 손자국들이 있다. 악습이라고도 하고 오랜 전통이라고도 하는 싸티이다. 마하라자 만심이라는 라자스탄 지방의 왕이 죽었을 때 그 아내들이 산 채로 함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남편과 죽음을 함께했던 흔적이다. 손자국은 몇 십개나 되었고 성인의 손부터 어린아이의 손까지 다양한 크기가 있었다. 손자국이 많은 것으로 보아 집단 자살의 형태일 것이다. 명예라는 이름 아래 강요된 죽음은 아닌가 생각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성 내부 곳곳을 탐사했다. 성의 내부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컸으며 성의 꼭대기에서는 블루시티가 전부 보인다. 메헤랑가르 포트는 성 외벽과 내부 모두 보존이 잘 되어있는 것 또한 특징이었다. 튼튼하게 쌓아올린 사암에 정교하게 무늬를 넣은 외벽은 블루시티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파란 건물 사이에 적광생 메헤랑가르는 더욱 신비해 보인다. 왕과 가족이 지냈던 성 안은 조사한대로 스테인드글라스로 치장돼있었다. 명확한 색 그림자가 비치는 것이 특징이자 아름다움을 내뿜는 장치였다. 꼭대기에는 대포들이 줄지어 성 밖을 향하고 있다. 힌두이즘의 키워드 중에 하나가 아힘사인데 이는 우리나라말로 ‘불살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아힘사의 교리를 가장 핵심적인 교리 중 하나로 생각하는 힌두이즘이나 불교나 자이나교를 믿는 인도인들 역시 그들의 가치관과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장 높은 곳에 수백 년 전에 거대한 성채를 쌓고 수십 문의 대포를 바깥세상을 향해 배치하고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민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밤에 본 메헤랑가르 포트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메헤랑가르 포트를 모르고 본다면 아름답게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이 성이 과거부터 이 지역을 지켜준 요새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메헤랑가르 포트를 본다면, 문화재의 보존도와 지금의 평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생각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12일차. (01/19)

어제를 끝으로 공식적인 유적지 탐사는 모두 끝났다. 원래는 어제 계획했던 대로 시계탑에 있는 사다르 바자르에서 시장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가는 도중에 팀원 한 명이 체한 것 같다며 다시 숙소로 돌아갔고, 두 명이서 숙소 반대편의 파란색 페인트칠을 한 집이 많은 곳으로 이동했다. 조드푸르가 여태 다녔던 다른 지역들 보다는 좀 더 작은 마을이여서 그랬던 것인지 지역 주민들은 영어를 사용하는데 익숙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간단한 호객행위는 가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인터뷰를 요청하니 이에 응해주는 사람들은 찾기 힘들었다. 게다가 파란색 집에서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은 거의 영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이푸르 잔타르 만타르에서 페인트 공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지 못한 이후로 처음으로 힌디어에 능숙하지 못한 것에 대해 또 다시 아쉬움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 가량을 계속해서 마을을 맴돈 결과, 우리가 머물렀던 게스트 하우스 주인아저씨를 포함 3명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적은 수의 인원이었지만 이곳에서 만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해보니 조드푸르에 대한 현지인들의 생각이 매우 다양한 것 같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파란 골목의 시계방에서 시계를 수리하시던 아저씨는 조드푸르가 덥고 모기가 많은 도시이기 때문에 시원한 색감이면서 모기를 쫓는 색인 파란색을 쓰기 시작했다고 이야기 해주셨다. 실제로 사전조사를 할 때에는 파란색이 카스트 제도 중에서 브라만계급을 나타내는 색이었는데, 브라만들이 이 색을 집을 칠하는데 사용하다가 마을 전체로 퍼졌다는 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진행해보니 집 색을 카스트제도와 연결시키는 사키는 사람은 그렇게 많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신들을 나타내는 색이라서’ 라는 답변도 있었고 ‘그냥 오래 전부터 파란색이었으니까’ 라는 굉장히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답변들도 있었다. 어떤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색을 칠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생각했었는데 그저 오래 전부터 그래왔고, 우리의 전통이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한편으로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집을 이렇게 보존할 수 있었을까? 새로운 기술이 발달하고 점점 좋은 물건들이 나오는 요즘 세상 속에서 더 빠른 것, 더 나은 것, 더 발전한 것만 찾는 우리의 모습이 전통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인도인들의 모습에 비추어져서 조금은 부끄러워지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인터뷰를 끝으로 인도에서의 공식 일정이 모두 끝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책과 인터넷으로 공부한 인도가 아닌 살로 부딪히는 살아 숨 쉬는 인도를 참으로 느끼고 온 시간들인 것만 같았다. 우리가 본 인도는 무질서 속에서의 질서가 있는 나라였다. 그리고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이 가장 인상 깊었다. 전통을 지킨다고 해서 그들이 결코 기술적인 측면이나 과학적인 발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의 지하철만큼이나 복잡한 지하철 노선을 가지고 있고, 어느 곳에서나 인터넷을 비교적 손쉽게 이용할 수 있을 만큼 떠오르는 IT 강국이었다. 그런 발전된 모습의 ‘인도’이지만 길거리에는 전통 옷인 ‘사리’와 ‘꾸르띠’를 입는 여성들을 항상 볼 수 있고 커리 없는 식당을 찾을 수 없으며, 수백 년 길게는 수만 년의 시간동안 있어왔던 건축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인도’라는 나라였다.

‘색깔과 건축물’을 바탕으로 인도라는 나라를 만나고자 했던 우리 탐사 팀은 상상했던 것 보다 더욱 더 많은 것을 얻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인도의 색깔과 건축물 속에는 그들의 역사가 있었고, 종교가 있었으며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결코 빠질 수 없는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생각. 그 생각이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찾고 인도의 매력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느끼고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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